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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서사

[이종범의 사림열전] 남효온: 방랑, 기억을 향한 투쟁 ⑧

아름다운 반역

오늘날 누구라도 사육신을 기억하지만, 이들을 충의의 열사로 되살린 사람이 남효온인 줄은 아스라하다. 관서지방을 오래 돌다가 고향 의령에 머물던 성종 20년(1489) 겨울이었다. 깊은 시름, 병마로 몸도 가누기 힘든 터에 붓을 들었다. "내가 한 번 죽는 것이 두려워 어찌 충신의 이름을 없어지게 할 수 있으랴!"

일찍이「귀신론」에서 '충신과 현자의 죽음은 사사로운 욕망이 아니라 의리를 간직하기 때문에 원한을 남기지 않는 법'이라고 하였던 터라, 우선 이들의 혼백이나마 원통하게 천지의 기운을 타지 못하게 할 수는 없고 그러자면 이들을 충의열사로 기리지 않으면 아니 된다, 하였을 것이다. 박팽년(朴彭年)·성삼문(成三問)·이개(李塏)·하위지(河緯地)·유성원(柳誠源)·유응부(兪應孚)의 삶과 죽음을 극적으로 재구성한 『육신전(六臣傳)』의 탄생이었다.

남효온은 육신의 충성과 청렴과 경륜을 드러냈다. 계유정난 직후에 수양대군이 의정부에서 큰 잔치를 베풀자 박팽년이 처연하여,

묘당 깊은 곳 풍악소리 구슬프니 廟堂深處動哀絲
오늘 같은 세상만사가 어찌될지 도통 모를레라 萬事如今摠不知


하였다.

하위지는 세조가 즉위하자마자 모든 국사는 의정부의 의결을 거쳐 시행하도록 하는 의정부서사제(議政府署事制)를 폐지하고 육조가 직접 임금에게 보고하여 처결하도록 하는 육조직계제(六曹直啓制)를 실시하자, 이를 반대하였다가 죽음 일보 직전까지 간 적이 있었다. 도저히 조정에 머물 수 없어 고향인 선산으로 내려갔다. 이때 박팽년이 도롱이를 주었던 모양인데 하위지가 「박팽년이 도롱이를 빌려주자 화답하다」에 속마음을 건넸다.


남아의 득실이 예나 지금이 같구나 男兒得失古猶今
머리 위에 밝은 달이 밝게 비추는데 頭上分明白日臨
도롱이를 건네주는 뜻이 있을 것이라 持贈簑衣應有意
강호에 비 내리면 즐겁게 서로 찾자는 것이로군 五湖煙雨好相尋


하위지는 도롱이를 빌려준 뜻을 다시 돌아와 상왕을 다시 모시자, 그렇게 들었다. 실제로 다시 출사한 하위지는 거사에 기꺼이 참가하였다.

이들은 울적한 마음을 주고받으면서 바른 뜻을 새겼으니, 다음은 이개가 지었다.

까마귀 눈비 맞아 희난 듯 검노매라
야광명월(夜光明月)이 밤인들 어두우랴
임 향한 일편단심(一片丹心) 변할 줄이 있으랴


남효온은 유응부가 함경도 북병사로 있을 때 지었던 시까지 수습하여 실었다. 그의 기상은 우렁찼다.

장수가 도끼를 휘둘러 변방의 오랑캐를 진압하니 將軍持節鎭夷邊
자줏빛 요새에 흙먼지 가라앉고 군사는 졸고 있네 紫塞無塵士卒眠
오천 필 준마들은 버드나무 아래에서 울고 駿馬五千嘶柳下
삼백 마리 날쌘 송골매가 누대에 앉아 있구나 良鷹三百坐樓前


『육신전』은 국문 현장을 상세히 담았다. 이들은 세조를 '나으리[進賜]'로 부르며, '평일에 주공(周公)을 끌어댔는데, 주공도 남의 나라를 도둑질하여 빼앗았는가?' 하였다. 계유정난 직후 수양대군이 전권을 잡고서 옛날 주나라 시절 어린 조카 임금 성왕(成王)을 도와 성세를 열었던 주공이 되겠다고 한 약속을 배반한 잘못을 들춘 것이다. 그럼에도 세조는 박팽년과 하위지를 회유하였다. "네가 항복하고 역모를 하지 않았다고 숨기면 살 수 있다." 세조에게 명분이 없음을 들춘 것이리라.

▲ 창절서원(彰節書院)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본래 장릉 경내의 육신창절사(六臣彰節祠)였는데, 단종이 복위되어 장릉이 조성되면서 현 위치로 옮겼다. 정조(正祖) 15년(1791)에 김시습, 남효온을 추가로 모시고 매년 봄, 가을에 제사를 지내오고 있다. 성삼문 등은 '역적'으로 몰리고 거의 모든 글이 폐기되면서 문장과 학문을 살필 수 없게 되었지만 대단한 인재들이었다. 훈구계열로 문장이 뛰어난 학자로 훗날 문형을 맡기도 성현(成俔)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 나온다. "세종께서 집현전을 설치하고 문장과 학문의 선비들을 맞아들였는데, 신숙주·최항·박팽년·성삼문·유성원·이개·하위지 그리고 이석형(李石亨) 같은 이들이 이름을 떨쳤다." 즉 세종 치세 집현전이 배출한 문장과 학문이 뛰어난 8인 중에 사육신이 5인이나 되었다. 물론 이들 사이에도 장단점이 있었다. 이개는 시문이 뛰어났고, 하위지는 대책(對策)과 소장(疏章)에는 발군이었다. 그러면서 당대 선비들이 박팽년을 문장과 경술, 필법에 모두 뛰어난 '집대성(集大成)'으로 추대하였다고 하였다. '집대성'은 맹자가 공자를 때를 알고 때를 지킨 지시수시(知時守時)의 성인 즉 시중(時中)의 성인으로 찬양하면서 '백이(伯夷)와 이윤(伊尹)과 유하혜(柳下惠)와 같은 옛 성인이 한데 모여 되신 분이다'고 한 데서 나왔다. 박팽년의 위상을 가늠케 한다. ⓒ프레시안


집현전의 동지로 사육신과 무척 절친하였던 신숙주나 강희안의 처신도 적었다. 성삼문이 '그대의 악함이 이 지경에 이를 수 있는가'하며 질타하자 신숙주는 부끄러워 자리를 피하였으며, 또한 거사 계획을 알았기에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던 강희안은 '정말 현사이니, 많은 사람이 죽게 된 마당에 이 사람만은 남겨 두고 쓰시오' 라고 하였던 성삼문의 절규 덕분에 겨우 풀려났다. 죽음 앞이라도 우정과 의리를 변치 않는 육신의 장렬함을 극명하게 들추었던 것이다.

『육신전』의 백미는 의연한 죽음이었다. 불로 살을 지지는 낙형(烙刑)이 계속되자, 성삼문은 '나으리의 형벌이 참으로 독하다' 하고, 이개는 '이것이 무슨 형벌인가?' 하였으며, 하위지는 '반역의 죄명은 마땅히 베는 것인데 무엇을 다시 묻는가?' 하였다. 유응부도 '한 칼로 족하(足下)를 폐하고 상왕을 세우고자 하였으나 불행하게도 간인(奸人)이 고발하였으니 다시 어찌하겠는가. 빨리 나를 죽이시오' 하였다. 족하는 그대, 자네와 같은 호칭이다.
또한 재상 반열의 무반이었지만 거적으로 바람을 가릴 정도로 가난하게 살았던 유응부가 '사람들이 서생과는 일을 같이 할 수 없다고 하더니만, 과연 그렇다' 하며 성삼문 등을 질타하였음도 빠뜨리지 않았다. 한명회 등이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연회에 운검(雲劒)을 세우지 않기로 하자, 성삼문 등이 쉽게 거사계획을 포기하며 물러선 사실이 죽음 앞에서도 못내 아쉬웠던 것이다.

남효온의 서사는 장렬하고 애절하였다. 절명시(絶命詩)와 가족의 절규를 실었으니, 성삼문은 '한 번 죽음이 충의인 줄 알았다' 하고, 이개는 '죽음도 가벼이 보아야 한다면 이 죽음이 영화로세' 하였다. 나아가 유응부의 늙은 아내는 '편히 살아본 적 없다가 죽을 때에는 큰 화를 얻었다' 하며 애통함을 숨겼다.
『육신전』은 다음과 같은 사찬(史贊)으로 마감하는데 줄여 싣는다.

누가 신하가 아닐까마는 지극하다 육신의 신하됨이여! 누군들 죽지 않을까마는 장하다 육신의 죽음이여! 살아서는 임금 사랑의 신하 도리를 다하고, 죽어서는 임금 충성의 신하 절개를 세웠도다. 충분(忠奮)은 백일을 꿰뚫고 의기는 추상보다 늠름하다. 슬프다. 육신으로 하여금 금석 같은 단심을 지키고 강호에 물러나게 하였더라면 상왕의 수명도 연장할 수 있었고 세조의 치세는 더욱 빛났을 것인데 불행히도 분격한 마음으로 큰 화에 빠지고 말았구나.

'사육신은 충신이다'라는 선언이며 내일을 향한 희망통신이었다. 노산군의 복위, 육신의 복권을 주장한 것이다. 현덕왕후의 복위와 함께 추진하여야 할 또 하나의 진실 과제를 제시한 셈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마냥 현실을 부정할 수만은 없었다. 앞으로도 나라는 세조를 계승한 사왕(嗣王)이 다스려갈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세조가 육신을 죽이지 않고, 상왕도 폐위하지 않고 오래 살게 하였다면, 그의 치세가 더욱 빛났을 것이라는 소망으로 매듭지었다.

남효온은 언제 지었는지 분명하지 않지만 「허후전(許詡傳)」도 지었다. 세종의 명상 허조(許稠)의 아들로 계유정난 당시에 좌참찬이었는데, 지나친 살육에 반대하다가 유배를 가서 목이 졸려 죽었다. 세조의 왕위는 잔인한 전취물(戰取物)임을 밝힌 셈이다.

그러나 남효온의 소망과 정치현실의 괴리는 너무나 요원하였다. 언제 현재를 살아가는 가해자나 피해자가 짊어진 어두운 과거의 짐을 벗게 할 수 있을는지? 아득하였다.

부르지 못한 노래: 『원생몽유록(元生夢遊錄)』

중종 8년(1513) 현덕왕후가 복위되면서 남효온도 신원되고 좌승지로 증직되었다. '소릉복위상소'의 뜻을 죽어서 이룬 셈이다. 그러나 천상에서 반갑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노산군과 사육신은 여전히 종묘사직의 죄인이었기 때문이다.

조광조·권벌(權橃)·김안국(金安國)·김정(金淨) 등 기묘사림이 혁신정치를 주도하면서 사정은 호전되었다. 이들의 주장에 따라 노산군에게 봉사손을 정하여 나라에서 제관과 제물을 보내 제사를 지내도록 하는 입후치제(立後致祭)가 단행되었다.

또한 "성삼문 등은 노산군에 대한 지조를 잃지 않았으니 만약 세조에 바쳤다면 또한 세조의 충신이 되었을 것이다" 혹은 "성삼문 등은 국가가 위태롭게 되자 목숨을 바쳤다"는 의견이 임금께 올라갔다. 이른바 '사육신충신론'이었다. 『육신전』이 빛을 본 것이다. 놀라운 진전이었다. 그러나 잠깐이었다.

흔히 기묘정국은 신진사림의 현량과의 실시, 반정의 거짓 공훈 삭출 등에 따른 훈구파의 반격, 즉 수구와 개혁, 기득권을 둘러싼 이해갈등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역사의 진실인가 은폐인가, 나아가 기억인가 망각인가를 둘러싼 역 투쟁의 양상을 띠고 전개되었음도 간과할 수 없다.

기묘사화 이후 진실은폐, 역사망각의 정국이 반세기 계속되면서 '사육신충신론'은 잠복하였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육신전』은 널리 읽히고, 감동은 깊게 퍼졌다. '전(傳)'의 형식을 취한 소설적 구성도 한 몫을 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 금서조치가 내려질 뻔했으니, 외척권신체제가 마감된 선조 치세 초반, 사림이 정국을 주도하던 때였다.

『육신전』을 읽은 선조가 "실로 놀랍다. 망령되게 선조(先朝)를 욕하였으니 모두 찾아내 거두어들여 불에 태우고, 이 책을 읽고 말하는 사람을 죄 주겠다"고 하며 무척 분개하였다. 이 책을 보고 누가 왕실을 따르겠는가, 두려웠을지 모른다. 영의정 홍섬(洪暹)이 극진히 만류하여 그만두기는 하였지만, 우리나라 금서 1호가 나올 뻔하였다. 『석담일기』선조 9년(1576) 6월조에 나온다. 이렇듯 『육신전』은 임금도 읽을 만큼 당대를 풍미하였고, 임금까지 전율시킬 정도로 왕실의 어두운 과거를 적나라하게 펼쳐놓았던 것이다.

이즈음 임제(林悌)가 『원생몽유록』을 지었다. '원자허(元子虛)'란 선비가 꿈에 호남아(好男兒)를 만나서 단종과 사육신을 상봉한다는 꿈 이야기로 『육신전』의 가공이며 각색이었다.

여기에서 남효온은 '훤칠하고 이목이 수려한 호남아'로 형상화되었는데, 들옷을 입고 두건을 썼다. 압도에서 농사짓고 한때 소요건을 쓰고 청담파를 자처하였다는 사실을 옮긴 것이다. 호남아는 단종과 사육신 앞에서도 절망하고 분노하였는데, 이렇게 말하였다.

요·순과 탕·무는 만고의 죄인입니다. 후세에 여우처럼 아첨을 떨어 선위를 얻은 자 이들을 빙자하고, 신하로서 임금을 친 자 이들에게 명분을 붙여서 천 년이 흘러 마침내 구할 길이 없게 되었습니다. 『원생몽유록』

고대 성군의 선양과 혁명을 빌미로 정치적 명분과 질서를 파괴하는 역사 현실에 대한 극렬한 반감으로 요·순과 탕·무가 죄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어디서 들은 듯하다. 김종직의 「도연명의 술주시에 화답한다」와 김시습의 「역사를 보면 마음이 아프다」에 나오는데 후자에 더 가깝다. 물론 남효온의 실제 발언이 아니었다. 남효온의 정서와 의식을 임제가 그렇게 표현하였던 것이다.

『원생몽유록』은 사육신이 단종 앞에서 주고받은 가상의 시구를 통하여 복위운동의 좌절에 따른 감회와 상흔을 고스란히 재현하였다. 특히 세조가 즉위하였을 때 벼슬에 머물렀던 속셈, 처음의 계획을 실행할 수 없자 쉽게 포기하는 성삼문 등을 질타하였던 유응부의 분노와 용서를 절절히 드러냈다.

호남아 즉 남효온도 따라 지었다. 백이숙제와 굴원과 도연명의 아름다워 차라리 서러운 절의를 노래하며 이렇게 마감하였다.

한 편의 야사를 감히 후세에 전하니 一編野史堪傳後
앞으로 천 년 동안 선악의 가르침 되리라 千載應爲善惡師


생명이 천세토록 이어질 진실기록의 작품을 남기겠다는 각오를 피력한 것이다. 임제가 그려낸 『육신전』저술의 의도였다.

『원생몽유록』은 남효온의 기록 정신을 새삼 일깨우며, 기억운동이 역사의 진보에서 어떠한 역할을 하였으며, 또한 기억하지 못하면 역사가 없고 나아가 다시 거친 모멸의 시대가 온다 한들 어떠한 변명도 할 수 없다는 임제의 당대 통신이었다. 비록 꿈의 공간에 의탁하였지만, 어두운 과거를 결코 잊지 않아야 한다는 '참여문학'이며, 정치를 소재로 삼아서가 아니라 정치적 의도가 분명하다는 의미에서 '정치소설'이었다.

그런데 흥미롭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이 꿈에서 깨어난 원생이 친구인 해월거사(海月居士)를 만난 장면이었다. 그렇다면 해월거사는 누구를 형상화한 것일까? "요와 순은 아득하기만 하고, 탕과 무는 어찌 이리 많다는 말이뇨?" 하였음으로 미루어보면 분명 매월당 김시습이다. 그렇다면 '원자허'는 누구일까? 바로 원주에 숨어살았던 원호(元昊)였다.

임제는 사림의 시대를 이룩한 정신계보를 '김시습-남효온'으로 그렸던 것일까? 알 수 없다. 그러나 설사 그렇다고 하여도 이런 관점은 이어지기 힘들었다. 선조의 분노에서 보았듯이 자칫 잘못하면 세조의 왕위계승을 부정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남효온과 김시습이 '꿈의 공간'의 주인공으로 남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기에 더하여 우리나라 성리학이 기학이 아니라 리학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는 사실도 영향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이들은 조선후기 숙종 치세에 단종과 함께 온전히 복권되지만, 이미 신화가 되고 전설로 굳어진 한참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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