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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스승 나의 친구

[이종범의 사림열전] 남효온: 방랑, 기억을 향한 투쟁 ③

호탕한 만남

언젠가 남효온은 수락산으로 김시습을 찾았다. 길을 몰라 30리나 헤매다 복숭아로 허기를 달래며 찾아갔다. 「수락산으로 청은(淸隱)을 방문하다」두 수가 있는데 다음은 첫 번째다. 청은은 김시습의 여러 자호(自號) 중 하나다.

하루를 빙빙 돌며 헤매다가 개울을 건너서 頃日崎嶇渡一溪
저녁 바람 들이쉬니 이름 모를 새 운다 晩風吹進怪禽啼
깊은 산 바위에 복숭아나무가 山窮石角桃花樹
가을 열매 늘어뜨리며 나그네에게 고개를 숙이네 秋實離離向客低


복숭아나무가 열매를 늘어뜨리고 인사를 한단다, 친근하다. 다음의 시 「동봉에게 드림」은 김시습을 처음 찾을 때 올린 시 같다. 동봉 역시 김시습의 자호이다. 두 수가 있는데 첫 수이다. 남효온은 신동으로 이름을 날린 김시습이 세종의 상급을 받은 사실을 알고 있었다.

문장으로 이름 알린 지 삼십 년 文名三十載
한양에는 발걸음도 하지 않으시다가 足不履京師
수락산 바위 앞에 이리 계시니 水落前巖得
봄이 오면 저 뜰의 나무도 이뻐지겠지요 春來庭樹宜
선사께서 불법을 즐겨하지 않으시니 禪師不喜佛
제자들도 모두 시 짓기를 좋아 한다지요 弟子惣能詩
이 몸은 세상에 묶여 있음이 한스러워 自恨身纏縛
스승을 찾아뵈올 뜻을 펴지 못하였습니다 尋師意未施

남효온은 애써 김시습이 승려임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불법을 즐겨하지 않는 처지에서 이제 한양에 왔으니 무슨 일을 하시렵니까? 그리고 속세에 묶여 있는 저 같은 사람이 승려이신 선생께 어찌하면 배움을 청할 수 있을는지요?' 하는 듯하다. 김시습의 대답이 걸작이었다.「추강에 화답하다」 네 수에 담았는데, 첫 마디에 대뜸 이렇게 답했다.

세상은 내가 허송세월 보냈다고 비웃으며 堪笑消子
나를 까까머리 선생이라고 부른다네 呼余髡者師


'그대들이 세월을 헛되이 보냈다고 비웃는 것을 잘 안다' 하면서 '내가 머리는 깎았어도 너희들을 가르칠 수 있다'고 하는 듯하다. 김시습이 머리 깎은 교사를 자처한 것이다. '같이 공부하자'고도 들린다. 그리고 적었다.

그대 근력을 힘들게 하며 聞子勞筋力
장차 큰일을 하려 한다는데 方將大有爲
모름지기 운각(芸閣)의 모든 책을 다 읽어야 하네 須窮芸閣帙
월계수 향기는 때가 있는 법 莫負桂香期
고깃배는 지는 해 가느다란 빛에도 흔들리고 漁艇搖殘照
갈매기가 날며 물결 출렁이면 반궁(泮宮) 길 사라진다네 鷗波漾泮澌
벗이란 글방에서 사귀고 맺어지는 법 贊房交契友
그래야 지란(芝蘭)의 향내가 방 안을 가득 채우지 滿室是蘭芝


운각(芸閣)은 교서관이나 예문관을 말하며, 반궁(泮宮)은 물길 갈라진 동네에 있는 성균관을 말한다. 그래서 아래 마을이 반촌(泮村)이다. 이렇게 들린다.

그대가 지금 힘들여 나라의 사업을 하려고 하지만 교서관이나 예문관에 있는 책을 모조리 읽지 않으면 뜻을 펴지 못할 것인데, 지금 강에서 고기 잡고 갈매기를 벗 삼고 지내며 성균관 가는 길을 잊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일세. 부디 글방에서 만난 친구들이 오래도록 변치 않음을 잊지 말고 함께 정진하시게나.

다정하나 매서운 충고였다.
남효온이 언제 처음 김시습을 만났는가는 분명하지 않다. 만약 '소릉복위상소'를 올리기 전이었다면, 국가적 금기를 드러낸 최초의 언론에 어떠한 식으로든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러나 김시습이 남효온이 19세 연하임에도 '추강'으로 존칭하고 있음을 보면, 아마 이후, 더구나 진사가 된 다음에 비로소 만난 것 같다.

흔쾌한 대화

남효온과 김시습은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얼마나 재미있었을까?

남효온: 저의 소견이 어떠합니까?
김시습: 창문에 구멍을 내고 하늘을 훔쳐보는 혈창규천(穴窓窺天) 격이다.
남효온: 그러면 동봉은 어떠신지요?
김시습: 넓은 뜰에서 하늘을 쳐다보는 광정앙천(廣庭仰天)이다.
▲ 장릉(莊陵),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소재. 영월로 유배를 온 노산군은 금성대군(金城大君)의 복위운동이 발각되고 얼마 후인 세조 3년(1457년) 10월 24일에 사사(賜死)되었는데 17세였다. 그때 유해가 동강으로 흘렀는데 영월호장 엄흥도(嚴興道)가 '옳은 일을 하다가 화를 입는 것은 달게 받겠다'는 충정으로 옥체를 수습하여 이곳에 밀장(密葬)을 하였다고 한다. 중종 12년(1517) 노산군의 후사를 정하여 제사를 지내게는 되었지만 묘를 찾지 못하였는데, 중종 36년(1541) 영월군수 박충원(朴忠元)이 엄홍도의 후손과 함께 묘를 찾아 수리하고 처음으로 제를 올렸다. 선조 치세 초반 김성일(金誠一)이 노산군 묘를 봉축하고 육신의 벼슬 회복 주장하였으며 얼마 후 강원감사로 온 정철이 노산군 묘를 노릉(魯陵)이라고 하여 왕자묘의 예로 제사 지내도록 장계를 올려 관철시켰다. 숙종 24년(1698) 비로소 복위되어 묘호는 단종(端宗), 능호를 장릉(莊陵)이라 하였다. 이때 부인 송씨도 정순왕후(定順王后) (1440~1521)로 복위되었으며, 능침을 사릉(思陵)으로 높였다.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眞乾面) 사릉리(思陵里)에 있다. ⓒ프레시안

언젠가 남효온이 「끌려간 군인의 원망을 노래함」열 수를 김시습에게 보였다. 그중 하나가 이렇게 되어 있었다.

서리 내려 온갖 풀 시들고 텅 빈 하늘에 달이 뜨면 百草凋霜月滿空
해마다 군마를 동서로 몰았지 年年鞍馬任西東
막사 즐비한 들판에 엄한 군령이 내리는 밤이면 令嚴萬幕平沙夜
대오는 북치고 나팔 불며 서로 손짓하여 부른다네 部伍相招鼓角中


김시습이 웃음을 터트렸다. "선비, 틀렸소. 군령이 엄한 때에 어떻게 서로 손짓을 할 수 있겠소?" 그러나 남효온은 열 수를 여덟 수로 줄였을 뿐 김시습이 지적한 3, 4행은 고치지 않았다. 남효온이 금주를 다짐하였을 때였다. 김시습이 두 차례 편지를 보내 충고하였다. 요약하면 이렇다.

옛적부터 세상의 쇠란(衰亂)에 마음 상하여 이를 잊고자 술을 찾는 사람들이 있었다. 술로 즐겁기도 하고 우울함을 씻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술이 사람을 살리는 음식임도 잊어서는 아니 된다. 더구나 술은 조상을 모시는 제사에 올리고, 노인을 모실 때 병을 다스리는 데 필요하니 결코 없을 수 없다. 그런데 술의 마땅한 이치를 잊고 마시니 주사(酒邪)가 있게 되고 스스로 비천해지는 것이니, 오로지 술을 그만둔다고만 하면 중용을 생각하는 군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추강에 보내는 답장(答南秋江書)」

누군가 이 편지를 증거로 남효온으로 하여금 술을 못 끊게 만든 주범이 김시습일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아니다! '예절과 의리를 버리고 임금과 부모, 일가를 떠나 아무도 없는 데서 홀로 살 것 같으면 모르지만, 예악 문물을 위하여 소학을 읽으며 선왕의 말씀을 읽으며 살 도리를 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또한 '금주하는 수준에서 그대가 반성한다는 것은 가당치 않다. 오히려 인의예지의 본성이 활짝 피는 세상에서 활보하려거든 술을 마셔라. 그러나 너를 잊어서는 아니 된다' 하였던 것이다.

언젠가 김시습이 남효온에게 출사를 당부한 적이 있었다. "나는 세종의 지우(知遇)를 얻어 이렇게 살지만 그대는 과거를 보아야 하지 않는가." 그러나 남효온은 현덕왕후가 복위되고 난 다음에 과거를 보아도 늦지 않다고 거절하였다.

당신이 떠난 자리

성종 14년(1483) 늦봄 김시습이 수레에 책을 가득 싣고 관동으로 떠나자 남효온은 무척 서운하였다. 「관동으로 돌아가는 동봉, 열경을 송별하다」가 있다. 동봉은 김시습의 호요, 열경은 자이니 특이한 부름이었다. 친근한 존경감이 묻어난다.

허유는 기산에 들어가 許由入箕山
맑은 이름으로 세상을 등졌지요 淸名與世隔
그렇다고 요임금 덕이 가벼워질까요 非薄帝堯德
산수를 좋아하는 고질병 때문이라오 偏成山水癖
하물며 지금은 좋은 임금이 계시는데 況當聖明時
미치광이가 기껍지 않으신 때문이겠지요 不喜風漢客
나서고 숨은 것은 정해진 운명이리니 行藏有定命
잃고 얻음에 무엇을 걱정하리오 得失何戚戚

마치 '김시습 당신이 요가 임금 자리를 넘겨주려고 하자 기산에 숨은 허유인가' 묻다가, 이 세상에 앙탈하며 거침없이 비판하는 자신이 거북하여 떠나는지도 모른다는 자책감을 담았다. 김시습도 「추강과 헤어지며」를 주었다.

옛사람이 지금 사람 같고 昔人似今人
지금 사람은 나중 사람과 비슷하겠지 今人猶後人
세상사 유수와 같고 世間若流水
유유히 가을 가면 봄이 오니 悠悠秋復春
오늘 소나무 아래에서 술을 마시고 今日松下飮
내일은 골짝 나라로 가야지 明朝向嶙峪
그 골짝 푸른 봉우리에 숨으리 嶙峪碧峰裏
그래도 그대 생각은 실타래겠지 似爾情輪囷


'옛사람이 지금 사람 같고, 지금 사람은 나중 사람과 비슷하겠지' 라니, 무슨 뜻일까?
노장학파의 중요 고전인 『장자(莊子)』는 장주(莊周)의 작품인 내편(內篇)과 훗날 노장학파가 덧붙인 외편(外篇)으로 되어 있는데 외편에 이런 내용이 있는데 줄여 옮긴다.

공자는 제자 염구(冉求)가 '하늘과 땅이 있지 않았을 때의 일을 알 수 있습니까?'라고 묻자, '알 수 있다, 옛날도 지금과 같았다' 대답하고, 안회(顔回)에게는 '가는 것을 전송하지 말고 오는 것을 마중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장자 외편』「지북유(知北遊)」


공자가 '옛 사람은 세상이 변하여도 자기 마음을 변치 않았지만 지금 사람은 마음이 변하여 세상의 변화에 동화하지 못한다고 가르쳤다'는 것이다. 사실 공자는 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노장학파가 도가의 우월성을 내세우기 위하여 '공자도 도의 무위자연(無爲自然)과 무시무궁(無時無窮)에 찬동하였다'고 할 요량으로 꾸몄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청의 고증학자들이 밝혔지만, 천도(天道)를 거의 말하지 않아 공자에게 형이상학이 없음이 아쉬웠던 유가들은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김시습도 그랬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당부한 셈이 된다.

처음도 없고 끝도 없는 무시무궁의 우주에서 만남과 헤어짐이 무슨 의미가 있어 아쉬워하겠는가. 차라리 자연과 세상의 변화의 주인이 되어야 하리라.

남효온은 무척 허전했다. 술에 취한 밤, 「행주 전장에서 동봉을 그리워하다」에 담았다.

가을 궂은비 띳집에 핀 꽃을 적시는데 秋霖濕茅榮
밤에 일어나 머언 당신 생각하네 夜起憶遠人
바른 길 배우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學道反類狗
앉은 채로 세월만 보내고 있으니 坐道秋與春
세상은 바람처럼 사는 사람 기억하지 못하리 世不記風漢
우리 도가 산속에 묻혔나니 吾道屬嶙峪
괜스레 술을 찾아 이리저리 空然醉鄕裏
그러다 우리 집 곳간에 꼬꾸라져 버렸다오 顚沛倒吾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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