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 유랑. 늙은 매화와 쭉쭉 뻗은 대밭, 겨울에도 자태 고운 난초와 동백, 그리고 사철나무가 장관이었다. 유자와 귤도 신기했다. 호남은 산물이 풍성하고 민생 또한 근실하였다. 영광 법성포와 염산의 바닷가를 갔을 때는 감탄하였다. 「해시(海市)」에 나온다. "땅을 둘러 어염의 이익이 넉넉하고, 비린내는 갯가를 진동하는구나."
김시습은 백제가 수월하게 나라의 기틀을 세운 것도 풍분한 물산 덕택이라고 생각하였다. 「백제의 옛날을 노래하다」중 후반이다.
백 사람이 중국으로부터 百人自中國
멀리 푸른 바다를 건너와서 遠渡滄溟來
어른으로 추장을 삼고 以長爲其酋
약한 자는 쫓아가서 앞장서 백성이 되었네 孱者趨爲民
우물 파고 밭 만들고 집터를 닦고서 鑿井又耕垈
씨앗 뿌리고 집 지어서 거친 땅을 개척하니 種築開荒榛
이것이 바로 옛 백제라 是爲古百濟
풍속은 참으로 도탑고 순박하였다 風俗何厖淳
국호를 백제로 삼은 이유가 '중국에서 건너온 백 명이 세웠기 때문'이란다. 백제는 물산이 풍부하고 풍속이 무척 순박하였다. 그러나 백제는 '풍족함을 믿고 안일하다가' 마침내 멸망하기에 이르렀다. 후백제도 마찬가지였다. 「완산에서 견훤이 일어나다」에서 풀었다. " 굳세고 강함은 남들도 멸시하지 못하였는데, 풍성하고 편안하여 마음을 징계하지 아니 하였다." 그러다가 역사에 씻지 못할 오점을 남기고 망하였으니,
졸지에 효파경의 화를 당하고 卒被梟獍禍
생선 문드러지듯 서로 나뉘어 무너졌다 魚爛相分崩
하였다. 효파경(梟破獍)은 제 어미를 잡아먹는 올빼미와 제 아비를 먹어치우는 짐승이다. 견훤이 아들 신검(神劍)에 의하여 금산사에 갇힌 사실을 빗댄 것이다.
금오산에서 호남에서 지은 시를 한 데로 묶었던 김시습은 물산의 풍요로움이 이 지방의 풍속 및 옛 나라의 흥망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를 곱씹었다. 「유호남록(遊湖南錄)」뒤에 적었다.
호남 백성의 살림이 튼실하고 산물이 풍부한 것은 관동의 몇 갑절이었으니 이로서 백제가 부강해질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을 믿고 교만하게 굴다가 망하였으니 지금도 민속이 매우 억세어 싸움에는 굴복하려 하지 않고 지더라도 되갚으려 생각하는 것은 바로 백제의 유풍(遺風)이다.
「탕유호남록후지(宕遊湖南錄後志)」
물산에 대한 과신이 교만과 저항을 낳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이어서 적었다.
근래는 풍속이 변화하여 사람마다 학문을 하여 효제(孝悌)와 염치(廉恥)의 고장이 되었고 좋은 인재가 연이어 나와 대대로 왕실을 보좌하고 있으니 바로 성조지치(聖朝至治)의 상서로운 징조라 하겠다.
근래에는 풍속이 변화하고 학문이 일어나 왕실을 뒷받침하는 인재가 많이 출현하고 있다고 한 것이다. 그러면서 당대를 성조지치(聖朝至治) 즉 성스러운 왕조의 지극한 다스림의 시대로 인정하였다. 무엇 때문에 맺힘이 풀어진 것일까?
새로운 고향
김시습은 한동안 용장사의 경실(經室)에 머물렀다. 경적을 보관하였는 방이었으니 사찰 도서관인 셈이다. 이태 뒤에는 집을 지었다. '금오산실(金烏山室)'이었다. 화초와 나무에 정을 주면 오래 머물 수 있을 것 같았다. 매화와 장미를 심어 정원을 가꾸고 잣나무와 삼나무를 심어 작은 숲을 조성하였다. 차밭을 일궜고 송이버섯을 따고 대나무 죽순이 얼마나 올랐는가를 살피며 지냈다. 밭농사도 얼마간 지었다. 이곳에서 생을 마칠 생각이었다. 김시습은 간혹 인근 고을을 출입하였다. 동해를 따라 소요하다가 경상도 깊은 산을 거쳐 돌아오곤 하였다.
금오산 시절 김시습은 두 차례 한양 출입을 하였다. 첫 번째는 경주에 정착한 첫 해 봄에 책을 구하러 갔다. 그러다가 효령대군의 눈에 띄어 어쩔 수 없이 열흘가량 내불당에 머물며 『묘법연화경』의 언해에 참여하였다. 여러 불경을 언해하고 간행하던 간경도감(刊經都監)을 관할하던 효령대군이 김시습을 불경에 밝은 학승(學僧)으로 대우한 것이다.
그때 김시습은 효령대군에게 받은 얼마간의 돈으로 국영 출판국이던 교서관(校書館)에서 펴낸 『맹자대전』『성리대전』『자치통감』『노자』 등을 구입하고 서둘러 돌아왔다.
금호산실을 짓던 해에도 도성을 다녀왔다. 원각사를 준공한 후에 전국의 스님을 초치한 운수천인도량(雲水千人道場)에 불려간 것이다. 효령대군이 급히 올라오라고 말까지 보냈다.
원각사의 일화가 전한다. 낙성법회가 있던 날 세조를 만나지 않으려고 한 김시습이 미친 척 뒷간에 빠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이 아니다. 사실은 승려로서 평생을 살 수 있는 신분증으로 계권(契券)이라고도 하는 도첩(度牒)을 받고 이렇게 찬양하였다. "불법을 널리 반포하니 요임금 하늘이 가깝고, 왕도(王道)의 강령을 널리 펴시니 순임금 날이 펼쳐지네." 효령대군이 강권하여 지었다고 하지만 '호불(好佛) 군주'를 자처하는 세조를 쉽게 들뜨게 할 수 있음을 과시한 것이리라.
세조가 기꺼워서 친히 접견하겠노라는 전지를 내렸다. 그러나 서둘러 도성을 빠져나왔다. 도첩을 받았으니 멈칫할 까닭도 없었고, 금오산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것이다. 「고향 산이 그립다」의 뒷부분이다.
고향 산의 매화 살구 누렇게 익어 떨어졌겠네 故山梅杏已黃落
객관에서 전대는 이미 남은 것이 없구나 客館橐囊已無貯
동쪽을 바라보니 물과 구름이 천 리 밖이라 東望水雲千里外
물 깊은 구름 속이 내가 돌아갈 데가 아닌가 水雲深處可歸歟
경주로 돌아온 김시습은 일상으로 돌아와서 한가하게 지냈다. 그러나 항상 아픔이 있었다. 특히 열심히 생산하지만 가혹한 수탈로 가난을 면치 못하는 백성의 한탄을 견디기 힘들었다. 그런 심정을 「산가(山家)의 고통을 읊다」여덟 수에 담았는데 그중 세 번째다.
척박한 땅 싹이 자라면 사슴 돼지 먹어대고 薄田苗長麕豝吃
수숫대에 목이 나오면 새와 쥐가 훔쳐 먹네 莠粟登場鳥鼠偸
세금을 내고 나면 들어간 비용도 건지지 못하는데 官稅盡收無剩費
빚을 감당할 수 없어 소까지 빼앗기네 可堪私債奪耕牛
민생에 대한 이해의 수준이 아니었다. 스스로 땀 흘려 일하면서 겪은 괴로움이었다. 농민의 고통에 대한 대변이 아니었다. 부양할 식솔이 없고 세금도 물지 않는 자신이면서도 어찌 할 수 없는 무능에 따른 절규였다.
문명에 대한 두 가지 생각
김시습은 간혹 경주 읍내로 나가 천 년의 역사 유적을 살폈다. 문명의 향기를 만끽한 것이다. 원효를 만나서 무한 경배를 올린 적도 있었다. 「무쟁비(無諍碑)」에 세상 모든 것이 일체원융(一切圓融)이며 세상의 모든 것이 진실이라는 제법실상(諸法實相)을 설파하였던 선각의 모습을 담았다. 무쟁(無諍)은 원효의 시호인 화쟁(和諍)이다. 이런 구절이 있다.
당에 들어가 불법을 배우고 고국에 돌아와 入唐學法返桑梓
승속을 넘나들며 마을을 나다녔다. 混同緇白行閭里
거리의 아이와 마을의 아녀자도 쉽게 얻어듣고 街童巷婦得容易
저 분이 뉘신지 이름이 무엇인지 모두 알았다네 指云誰家誰氏子
김시습은 당대 불교의 호국주의를 극복하고 천민과 아녀자도 인간의 본성을 자각할 수 있다는 것을 승속을 넘나들며 알렸던 원효에게서 온몸을 기꺼이 던졌던 희사(喜捨)를 보았던 것이다. 그러면서 옛사람의 사람 아끼는 생각, 세상 다스리는 그윽한 뜻이 지금은 왜 통하지 않고 또한 그러할 수 없는가를 탄식하였다. 첨성대를 보았을 때다. 문답 형식으로 소회를 풀었다. 먼저 「첨성대에게 묻노라」이다.
높구나 하늘까지 닿으려 하네 高臺卓犖接穹蒼
천문을 또렷이 한 번에 살폈다지 歷歷乾文一望詳
그대가 바로 하늘을 살펴 덕을 닦는 기구로세 此是仰觀修德器
그런데 어찌 힘들게 성 한구석에 쳐 박혔나 如何屓屭故城傍
첨성대 그대는 천문(天文)을 살피며 사람의 덕을 도탑게 해주었는데 지금은 왜 이리 푸대접을 받는가 물은 것이다. 하늘을 두려워하지 않는 세상이라 내팽개쳤다는 뜻을 담았다. 그리고 「첨성대를 대신하여 화답하다」를 읊었다.
주나라 때 영대가 있었어도 결국은 망하고 周有靈臺赧覆亡
측천무후도 명당자리에 천문대를 세웠다네 則天曾自立明堂
지금 임금들이 천문의 변화를 살피려 들지 않는다고 時君不省乾文變
그렇다고 나 때문에 재앙이 온다고 하지는 말게 非是由吾致禍殃
첨성대는 천문의 변화를 아무리 살핀다 한들 나라가 나라의 구실을 제대도 하지 못하면 망하는 것이지 내가 있고 없음이 무슨 상관이냐고 대답하고 있다. 하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결국 멸망에 이르리라는 김시습 자신의 두려움을 풀어낸 것이다. 그것은 교만과 방종, 사치와 일락을 일삼는 권력에 대한 분노이며 번민이었다.
여가문학의 탄생
김시습의 일상은 책을 읽고 시를 읊고 글을 짓는 일이었다. 자유스럽게 읽고 분방하게 써내려갔다. 격식과 주제에 구애받지 않았다. 관록(官祿)을 바라거나 평가와 감식에 얽매일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언젠가 명나라 구우(瞿佑)의 『전등신화(剪燈新話)』를 읽었던 모양이다. 괴기소설, 요사이 말로 판타지인데 세상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는 신간이었다. 재미있었다. 「전등신화 뒤에 쓰다」에 나온다.
한 편만 흘려 보아도 웃음 나와 이빨이 드러나고 眼閱一編足啓齒
평생 억장에 뭉친 응어리가 쓸려 없어지누나 蕩我平生磊塊臆
이상한 소재, 환상적인 줄거리에서 응어리가 풀리는 정화작용을 경험한 것이다. 문득 공자가 『시경』을 편집할 때 이해 못할 일을 삭제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가 하다가 '사실무근의 말도 교화에 관계가 있고 사람의 감동을 불러일으키면 괜찮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말이 괴이해도 세상 교화와 관계가 있으면 무방하고 語關世敎怪無妨
일이 황당해도 사람에게 감동을 주면 기껍지 않을까 事涉感人誕可喜
김시습은 『전등신화』와 같은 새로운 형식의 글을 짓고 싶었다. 자신은 나라와 조정이 필요로 하는 글을 짓는 문사가 아니요, 시간이 많은 한인(閒人)·일민(逸民)일 따름이었다. 더구나 창에 가득한 매화와 소나무 그림자를 두고 홀로 새는 밤이 너무 길었다. 이리하여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이생규장전(李生窺墻傳)」「취유부병정기(醉遊浮碧亭記)」「남염부주지(南炎浮洲志)」「용궁부연록(龍宮赴宴錄)」으로 구성된 『금오신화(金鰲神話)』가 탄생하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이었다.
김시습은 어디서 겪고 들어보았을 것 같은 공간, 이를테면 남원의 만복사나 평양의 부벽루와 같은 데에서 벌어지는 여러 인간의 서로 다른 인연과 만남을 귀신·염왕·용왕 등 상상의 모티브로 얽어가며 그들 사이의 사랑과 유혹, 속임과 원망, 헤어짐과 슬픔을 그려나갔다. 그것은 현세에서는 풀 수 없는 인간의 업에 대한 탄식이며 인간의 한에 대한 위안이었으며 나아가 신명나는 세상에 대한 희망의 발로였다.
『금오신화』는 어쩌면 김시습 자신에 대한 살풀이, 해원(解寃)의 의례였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에 그치지 않았다. 그것은 교훈이 아니라 여가를 위한 문학의 출현을 알리는 일대 사건이었다. 출세와 명예를 위한 문학이 아니라 삶의 여정에 활력소가 되는 읽을거리를 선사하는 문학혁명을 향한 최초의 깃발이라면 과장일까?
김시습도 자신의 창작이 어떤 의의가 있는지를 어슴푸레 가늠하였다. 그래서 「금오신화에 쓰다」에서 "사람들이 못 보던 책을 한가롭게 적었으며" 하면서, "풍류와 괴기한 이야기를 세심히 뒤졌네" 하였다.
김시습은 과거 공부나 유람을 위하여 금오산을 찾는 선비에게 『금오신화』를 보여주었을 것이다. 또한 자신에게 호의를 베풀어준 경주 부윤과 통판에게도 넌지시 건넸을 것이다. 훗날 청년 조광조를 희천 유배지의 김굉필에게 소개한 양희지(楊熙止)도 과거에 낙방하여 공부하러 왔다가 만난 적이 있으니 보았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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