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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임금을 만나고 싶다

[이종범의 사림열전] 김시습: 머리를 깎았다고 못 가르칠 것은 없다 ④

공공의 명분

세상은 음사가 횡행하고 신선이 되겠다는 허망한 풍조가 활개를 치는가? 나라에 기강이 없고 질서가 없기 때문으로 임금이 명분을 세우지 못한 탓이었다.

김시습은 명분을 국가와 임금이 있기 전부터 인간사회를 지탱한 기본 가치라고 보았다. 「명분설(名分說)」에서 밝혔다. "명분은 천지가 정하였고, 성인이 닦았고, 고금의 역사가 바로 세웠으니 말안장을 꾸미는 치장물이 아니다." 따라서 명분은 지배와 통치를 위한 일방의 논리나 강제나 폭력으로 세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예절을 동반하는 명분이 건재함으로써 임금과 신하는 서로 보탬이 되고 나라와 백성을 모두 이롭게 할 수 있었다.
명분을 세우는 주인이 바로 임금이었다. 『서경』에 나오는 기자(箕子)가 무왕에게 주었던 「홍범(洪範)」의 '황극(皇極)'으로 풀었다.

황극은 임금이 세우는 극을 말함인데, 극이란 지극한 의리이며 표준이 되는 명분으로 공공(公共)의 바탕이 된다. 임금이 중심에 극을 세우면 신하는 앞에서 보좌하고 만백성은 아래에서 그림자를 드러낸다. 「인군의(人君義)」

즉, 임금이 의리와 명분의 표준을 세우면 공정하게 함께 하는 세상을 이끌 수 있다는 것이다. 이때 신하는 앞장서 임금을 보필하고, 백성은 빛을 따르는 그림자와 같이 임금을 위하여 자신을 드러낸다.

주희(朱熹)의 문인으로 『서경』에 대한 선현의 여러 주석을 『서경집전(書經集傳)』에 갈무리한 채침(蔡沈)도 말했다. "극은 복(福)의 근본이며, 복은 극의 효험이다. 따라서 건극(建極)은 복을 모으는 집복(集福)이다. 임금의 집복은 제 몸을 도탑게 하려는 것만이 아니라, 백성에 복을 베푸는 부복(敷福)으로 사람을 저마다 교화시키려는 데에 있다."

임금의 의리와 명분은 백성에서 복을 나누어주고 백성을 교화시키는 데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자면 임금이 솔선수범하여 검약하고 절제하여야 한다.

옛적 성인 임금은 궁궐을 낮춰서 백성이 편히 살기를 바라고, 의복을 누추하게 하며 백성이 따스해야 한다 하고, 음식이 보잘것없어도 백성은 배불렀으면 하고, 자신의 휴가는 채우지 않으면서 백성의 넉넉한 즐거움을 원했다. 「인군의」

임금부터 재물과 욕망을 줄여 백성을 이롭게 하는 손상익하(損上益下)야말로 공공성의 추기(樞機)라는 것이다.
그런데 임금이 의리와 명분을 상실하면 어떻게 될까? 백성은 생각과 모습을 숨기는데, 백성은 숨으면서 마침내 난리를 생각하게 된다. 즉 민란(民亂)은 민은(民隱)에 단서가 있는 것이다. 김시습은 말하지 않았지만 그의 글을 읽고 있노라면 여기에 미치는구나, 할 것이다.

민부와 국부

임금은 어떻게 하여야 백성에게 복을 나누어 줄 수 있는가? 「애민의(愛民義)」「애물의(愛物義)」「생재설(生財說)」등에 절실하게 풀었다.

첫째, 임금은 백성이 나라의 근본으로 백성이 없으면 하루도 살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임금의 창고는 백성의 몸이요, 임금의 의상과 신발은 백성의 가죽이며, 임금의 술과 음식은 백성의 기름이기 때문이다." 옛 성인 임금은 이러한 생각을 한시도 놓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다. 음식을 먹으며 백성들도 자기처럼 먹을까, 옷을 입으면서 자기처럼 입을까, 전혀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

백성이 나라의 근본임을 어떻게 구현할 수 있는가? 먼저 의식에 필요한 농사나 양잠 등 생업을 보장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명령을 번거롭게 내리지 않음으로써 백성의 일하는 시간을 빼앗지 말아야 하며 공물이나 부역을 가볍게 함으로서 백성의 재물을 소중하게 생각하여야 한다.
▲ 서산서원(西山書院), 함안 군북면 원북리 소재. 이 곳 출생으로 단종 원년(1453) 진사가 된 조려(趙旅)는 세조가 즉위하자 벼슬의 뜻을 접고 내려와 인근의 어계에서 낚시를 하며 세월을 보냈다. 그러나 멈추지는 않았다. 단종을 위한 초혼제를 참석하였으며 인근의 선비의 모범으로 살면서 말년에는 진주 향교의 훈도로 내려온 김일손을 만나 한 시대를 증언하기도 하였다. 이 서원은 단종이 복위되고 사육신을 위한 서원이 생기자, 경상도 유생들의 조려를 비롯하여 김시습 이맹전 원호 남효온 성담수 등의 생육신을 제향하자는 발의로 숙종 32년(1706)에 세워졌다. 숙종 39년(1713) 서산서원으로 사액되었는데, 대원군 시절 훼철되었다가 1984년에 복원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유일한 생육신 서원이다. 근처에 조려가 머물던 채미정(採薇亭)과 도유형문화재 제159호로 지정된 조려의 생가가 있다. ⓒ함안군

둘째로 백성을 살리자면 만물을 아껴야 한다. 물아일체(物我一體)의 '애물론(愛物論)'이었다. 먼저 옛 성인이 아무 때나 날카로운 도끼를 숲에 들이지 못하게 하고, 너무 촘촘한 그물을 웅덩이에 던지지 못하게 한 의미를 살폈다. 숲을 보존하고 작은 물고기를 키워야 종국에 백성을 살릴 수 있다는 원려(遠慮)라는 것이다. 그런데 순임금은 산천에 불을 질러 사람에게 위협이 되는 맹수나 해충을 쫓았다. 왜 그랬을까? 백성이 경작하고 천렵을 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오늘날 임금은 궁궐을 사랑하고 보물을 좋아하지 백성 살리기에는 뜻이 없다. 백성이 인색한 정사와 가혹한 세금을 맹수와 해충보다 더 무서워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마구간에 불이 난 것을 안 공자가 '사람이 다쳤는가?' 할 뿐 말은 어찌되었는가를 묻지 않았던 정신이 더욱 소중하고 더욱 그리운 것도 이 때문이다.

셋째, 김시습은 애민과 애물의 당위성을 국가 재정 즉 국부 증진 차원에서도 살폈다. 먼저 『대학』에서 말한 '생재(生財)'의 의미를 들추었다. 이렇게 되어 있다. "재물을 만드는 대도(大道)가 있으니 생산자는 많게 하고 소비자를 적게 하며, 생산은 빠르게 하고 지출을 서서히 하게 하면 재물은 항상 넉넉하다."

김시습이 풀었다. "임금이 어진 마음이 있어야 일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놀고먹는 사람을 줄어들며 임금이 의로운 마음으로 백성의 재물을 아껴야 관리도 임금을 따라 양입이출(量入而出) 즉 거둘 것을 헤아려 신중히 지출한다." 임금의 인의가 국부 창출의 관건이라는 것이다. 이에 머물지 않았다. 임금이 민부의 증식을 지지하고 성원할 것을 주장하였다.

사람이라면 누가 재물을 늘리고 싶지 않겠는가? 이러한 마음으로 백성에 다가가면 백성 역시 그런 마음으로 윗사람을 받든다. 사람이라면 누군들 이익을 구하지 않겠는가? 이런 마음을 백성에게 옮기면 백성 역시 이런 마음으로 윗사람을 이롭게 할 것이다. 임금이 이를 진실로 살필 수 있다면 재물을 만드는 방도는 저절로 갖추어진다. 「생재설」

즉, 누구에게나 있는 부자가 되고 이익을 바라는 마음을 인정하고 이를 지지하였을 때, 임금의 재물은 물론이고 나라의 재정도 풍족해진다는 것이다. 하물며 나라가 백성과 재물을 다투어서야 되겠는가, 하는 듯하다. 당시 상황은 왕실 재정을 담당하는 내수사(內需司)는 토지를 늘리며 양민을 노비로 만드는 데 열중이었다. 이런 뜻도 있는 것 같다. 자신이 부자 되고 싶은 마음으로 남도 부자로 만들자, 그러면 백성도 재물을 아끼지 않고 나라에 세금으로 바칠 것 아닌가! 그렇다면 희망의 청부(淸富)사회와 부강국가를 설계하고 있었던 것으로 읽힌다.

역사의 풍경

임금이 백성의 삶을 먼저 생각하고 나라의 앞날을 미리 걱정하면 한시라도 편할 수 없었다. 안일은 백성의 몫이었다. 옛날의 성군이 그랬다. 그럼에도 홀로 다스릴 수 없었기에 현량한 신하를 찾았다. 요임금은 후직(后稷)을 얻었고, 순임금은 고요(臯陶)를 찾았으며, 하(夏)의 우(禹)임금은 익(益)을 만나 물을 다스리고 직(稷)이 있어 농사와 교역을 일으켰으며 기(虁)를 찾아 예악을 다듬었다. 또한 은나라 탕(湯)과 주나라 무왕이 걸(桀)과 주(紂)와 같은 폭군을 무찌르고 창업할 수 있었음도 이윤(伊尹)·부열(傅說)·강태공(姜太公) 같은 어진 신하가 있었기 때문이다.

성군은 빼어난 목수라면 쓸 만한 나무를 단번에 알아볼 뿐만 아니라 나무 한 조각도 버리지 않는 것과 같이 숨어 있는 인재를 찾아내고 또한 제대로 대우하였다. 이윤은 농사짓는 노인이었고, 부열은 감옥의 죄수였으며, 강태공은 낚시꾼으로 살아가는 은사였다.

옛날의 임금과 신하는 백성을 위하여 흔쾌히 만나고 의기투합하였다. 임금이 자신을 낮추고 비웠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주역』의 「겸괘(謙卦)」를 인용하였다. "겸손은 높고도 빛나며 낮아도 넘지 못하니 군자의 마침이 여기에 있다." 가장 낮은 곳에 머물러야 찬연히 빛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옛 임금이라고 한결같게 훌륭한 것은 아니었다. 『시경』「대아(大雅)」가 증언한다.

하늘이 낸 뭇 백성이 그 명을 믿지 않네 天生蒸民 其命匪諶
처음은 착하였으나 끝까지 그런 임금 드물었다네 靡不有初 鮮克有終


임금의 정치가 처음과 끝이 달라 백성이 등을 돌렸다는 것이다. 이상의 시대로 숭앙되는 삼대에도 그러하였으니, 패도(覇道)와 전제(專制)의 시대는 더 말할 것이 없었다. 이러한 시대의 임금들은 때도 없이 백성을 부리고 재물을 빼앗아 궁궐이나 크게 지으면 임금의 권위가 높아지는 줄 알았다. 또한 인정을 베푼다 하면서 '구차하고 쓸데없이 조그마한 착한 일[小善]에 매달려 책망과 비방을 자초하였다.' 나라를 망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적었다.

나라의 화는 위태함에 있지 않고 편안함에 있으며, 나라의 복은 경사스러움에 있지 않고 근심함에 있다. 제왕이 근심하고 걱정하면 발흥하지만 편함과 즐거움에 머물면 결국은 망하고 만다. 「고금제왕국가흥망론(古今帝王國家興亡論)」

즉 왕업의 성패와 국가의 흥망이 임금의 마음에서 판가름 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역사는 실패를 반복하는가? 처음에는 잘하다가 얼마 있지 않으면 다시 교만과 사치, 안일에 빠졌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항상 '하(夏)·은(殷)·주(周) 삼대의 정치를 무조건 본받자' 외친다. 한심하였다. 「정치는 삼대를 본받아야 한다(爲治必法三代論)」에 적었다.

정치를 말하며 반드시 삼대를 칭찬하는 것은 그 예악과 교화와 헌장의 법도에 대한 것이니 그 정치를 본받는다고 하는 것도 본받을 것을 추려 본받는 것이지 삼대가 모두 아름다우니 본받아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즉, 삼대에도 임금 내쫓는 일, 백성의 원망을 일으킨 일이 있었으니, 이러한 일은 본받지 말고 백성을 위한 진심과 문명을 향한 창조 정신을 따르라고 한 것이다. 삼대를 무조건 찬양하면서 그 뒤에 숨어서 배신과 음모를 자행하며, 이기적 들척거림에 들떠 있는 세상에 대한 질타였다. 연작 「역사를 보면 마음이 아프다」에서는 더욱 절박하게 들춰냈다.

요와 순이 공경하며 왕위를 양보한 일 너무 오래라서 揖讓唐虞已遠而
인심이 이리도 잔인하고 사나워졌나 人心殘暴更何其
임금 죽이고 나라를 뺏고는 탕과 무를 들먹이고 弑君取國言湯武
주인 배반한 간신들은 이윤과 강태공을 입에 담네 叛主依姦道呂伊


왕위를 빼앗고 요순의 선위에 빗대고, 나라를 무너뜨리고 탕왕과 무왕의 혁명을 구실로 삼으며 또한 배반의 신하가 넌지시 이윤과 강태공을 자처한다는 것이다. 김시습의 눈에 비친 역사의 풍경은 이처럼 민망하고 슬펐다. 어쩐지 세조의 찬탈과 훈구공신의 변명에 대한 비판으로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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