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종 2년(1471) 봄 김시습은 서울로 왔다. 누군가의 충고가 있었다고 한다. 원각사 낙성식에 다녀온 지 6년, 어느 덧 삼십대 후반이 되었다. 처음에는 서울과 근교를 옮겨 다니며 살다가 수락산에 폭천정사(瀑泉精舍)를 마련하였다. 역시 작은 밭을 일구었다.
이 시기 김시습은 많은 사람과 만났다. 옛 성균관 동료와 어린 시절 동네 친구들도 상봉하였고 족형 손순효(孫舜孝)와도 끊겼던 소식을 이었다. 서거정·김수온(金守溫) 등 당대 명사와도 서로 찾았다. 벼슬할 생각이 없지 않았지만 바로 뜻을 접었다.
김시습에게 배우러 오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전부 받아주지 않았다. 어떤 때는 '목석으로 내리치고 활을 겨누어 쏘는 시늉을 하였으며 비단옷 입은 고관의 자제에게도 논밭에 나가 일을 시켰다'고 한다. 그러다 마음이 맞으면 생각을 풀었다.『매월당집』에 수록된 잡저(雜著)와 논(論)·설(說)·변(辨)·의(義) 등은 이때의 작품이다.
김시습의 문장은 생동감과 박진감이 넘쳐났다. 유불선(儒佛仙)을 넘나들며 흔쾌하며 명랑하고 도도하게 우주와 인간, 운명과 천명, 성인과 임금, 신하와 선비의 길을 자유자재로 풀었다. 대체로 객이 묻고 자신이 답을 하는 대화체로 엮었다.
문장은 기탄이 없었다. 어떤 사람이 하늘이 추락하지 않는 이유를 물었을 때였다. 김시습은 바로 면박을 주었다. "한심하다. 그대는 어찌 그리 꽉 막혔는가!" 그리고 이어갔다.
하늘은 위가 없고 끝도 없이 온통 기운[氣]으로 차서 둥글게 돌아갈 뿐이다. 해와 달과 별은 깃발 같은 줄로 꿰맨 것이 아니라 밝은 빛[光明]으로 이어져 있어 굳건하고 그침이 없는 것이다. 「천형(天形)」
하늘은 무형(無形) 무애(無涯)의 기체(氣體)인데 어찌 무너지며 일월성신(日月星辰)은 광명으로 이어져 있는데 어찌 떨어질 수 있는가, 한 것이다. 광명이 하늘의 바탕 즉 본체였다. 조금도 어김없는 천시(天時)도 광명 때문이었다.
하늘의 움직임은 끝이 없고 변화무상하지만 일순간이라도 망동하지 않는 바탕에는 바로 광명(光明)이 있다. 그러므로 절기가 나뉘고 더위와 추위가 반복되니 이것이 바로 천시(天時)다. 「북신(北辰)」
옛 성인은 바로 천시를 살펴 '사람의 때[人時]'와 '사람의 일[人事]'을 정할 수 있었기 때문에 농사와 의약, 예악과 같은 문명을 창조할 수 있었다. '사람의 길[人道]'도 다른 것이 아니었다. "하늘의 운행(運行)에 따른 절기를 지키며 생업을 근실히 해서 임금과 부모를 섬기고 처자를 잘 기르면 되는 것이다."
운명과 천명
하늘은 인간에게 어쩔 수 없는 무엇을 내렸다. 하늘의 운수(運數)에 맺힌 운명이었다. 누군가 재앙을 막는 길을 물으며 '사람의 팔자(八字)가 모두 다른데, 전쟁이 나고 배가 전복되어 한 날에 죽은 것은 무엇인가' 한 적이 있었다. 운명이 다른데도 동시에 재앙과 죽음을 겪게 된 까닭을 물은 것이다. 쉽게 답할 수 없는 문제인데도 가볍게 풀었다.
무릇 운수에는 대기(大期)가 있고 소기(小期)가 있으니, 대기란 음양이 열리고 닫히는 것이며 소기는 한 시[一時], 한 날[一日], 한 달[一月], 한 해[一年], 한 세대[一代]로 나뉜다. 한 시의 운수가 기후이며 하루의 운수가 밤낮이며 한 달의 운수가 그믐과 초하루이며 일 년의 운수가 추위와 더위이며 일대의 운수가 인간 세상이다. 사람과 물건이 함께 죽는 것은 대개 운수가 다하여 피할 수 없이 끝에 다다랐기 때문이다. 「미재(弭災)」
인간과 만물의 하나하나의 운명은 하늘의 움직임이 연출하는 장단(長短), 대소(大小), 완급(緩急)의 운수에 엉켜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마음대로 할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는 것이 운명 내지는 숙명이라는 설명이었다.
이렇듯 하늘은 인간에게 하늘의 운수가 빚어낸 어쩔 수 없는 운명을 내렸다. 그런데 하늘은 인간에게 또 다른 명을 내렸다. 하늘의 길[天道], 하늘의 이치[天理]를 따라서 살아야 한다는 명, 즉 천명(天命)이었다. 따라서 인간이라면 천명에 따라 인간다운 길을 가려고 하여야지, 어쩔 수 없는 운명을 거역하며 개인적 복이나 구하려는 요행을 바라서는 아니 된다. 즉 인간의 진정한 운명은 하늘에 대한 무한 경배, 즉 천명의 받아들임이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길 즉 인도(人道)였다.
김시습은 천명과 인도의 본질을 『중용』 첫 장 '하늘이 내린 천명(天命)을 성(性)이라 하고, 성을 따르는 솔성(率性)을 도(道)라 한다'는 명제로 풀었다. 즉 하늘은 만물을 낳고 기르고 거두며 감추는 생장수장(生長收藏) 즉 원형이정(元亨利貞)에 해당하는 인의예지의 본성을 인간에게 부여하였으니, 인간의 인성 구현의 길은 하늘의 명령이라는 것이다. 이른바 '천부인성론(天賦人性論)'이었다.
인간의 본성은 만유보편으로 누가 독점하는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본성을 따르는 솔성(率性)의 도 역시 누가 준다고 얻을 수 있거나, 누가 방해하여 빼앗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일찍이 공자가 '도(道)는 길[路]과 같다'고 한 말의 뜻도 여기에 있었다. 인간이라면 '함께 가야 하는 길'이 바로 도(道)였다. 김시습도 '도는 천하의 공물(公物)이다'고 하였다. 도를 모든 인간 만유의 보편가치로 본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도의 주인이 될 수는 없었다. 인간의 의지가 어디에 있는가가 문제였다.
도(道)에 뜻이 있으면 의리(義理)가 주인 되어 물욕(物欲)이 옮겨오지 않고 사리(私利)에 뜻을 두면 물욕이 주인 되어 의리가 들어올 수 없다. 「복기(服氣)」
도에 뜻을 두면 하늘이 사람을 낸 마땅한 의리를 구현할 수 있고, 그렇지 못하면 물욕의 화신이 된다는 것이다. 같은 인간이지만 성인과 범인의 차이도 여기에 있었다.
성인은 하늘을 믿고 낙관하였다. 『주역』과 『논어』에 나오는 공자의 어록으로 풀었다.
공자는 '천하에서 무엇을 생각하며 무엇을 근심하랴' 하며 천도(天道)를 의심하지 않으셨고, 또한 '사시(四時)가 운행하고 백물(百物)이 생겨나니, 하늘이 무슨 말을 하랴'고 하며 쉼이 없고 더할 수도 없는 태극의 성(誠)을 말씀하셨다. 「태극설(太極說)」
즉, 제 욕심을 버리면 하늘에 어긋나지 않고 하늘에 떳떳한 마음과 생각이 절로 자라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길을 찾는 수양법이 이른바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르는 일이었다. 맹자의 가르침이었다. 「복기(服氣)」에서 풀었다.
"우주에 가득한 호연한 기운을 제 몸에 채우면 봄바람이 사지에 퍼지듯 하여 마음이 모두 녹아나니 하늘을 올려다보나 땅을 내려다보나 부끄러운 모습이 없고 인색하거나 교만한 몸짓이 없게 된다."
우주적 사고, 자연과의 대화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다짐이었다.
기학적 예론:「신귀설(神鬼說)」
김시습은 제 몸을 위하여 안절부절못하는 이기적 군상이 횡행하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한 쪽에서는 '용호비결(龍虎秘訣)'로 제 몸을 부시고, 한 쪽에서는 복기(服氣)를 외치고 있으니, 하늘을 어긋나보겠다는 '위천(違天)'과 다름이 없었다. 어떻게 용을 부리고, 호랑이를 낚아채는 정기를 모아 납과 수은[鉛汞]을 아홉 번 바꾸면 불로장생의 단약(丹藥)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인지? 또한 오랫동안 서지 않고, 가지 않고, 앉지 않고, 눕지 않고, 보지 않고, 듣지 않으면 우수(憂愁)와 경공(驚恐), 증애(憎愛)와 분한(忿恨)을 없앤다고 하지만, 이것은 진화하지 못한 애벌레나 할 짓이지 이목구비와 오장육부를 가진 사람이라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김시습은 하늘에 제사를 지낸다는 푸닥거리[淫祀]도 운명을 거부하는 용호나 복기와 다름없이 부질없다고 규정하였다. 일찍이 공자도 병이 들었을 때 제자들이 빌자고 건의하자 조용히 타일렀다. "기도는 하늘에 죄를 얻는 것이다."
또한 김시습이 보기에는 일체의 허례허식도 하늘 공경과 거리가 멀기는 매한가지였다. 특히 치상(治喪)과 제례에서 풍수에 의탁하여 묘지를 찾고 석물로 장식하며, 심지어 망자의 혼을 위로한다고 굿을 하고 있으니 참으로 어처구니없었다.
부모가 은애로 기르고 정직으로 가르쳤을 것인데 요란하고 망령되게 추모하는 것은 자식의 도리를 잃어버리는 것이며, 복택(卜宅)을 한다면서 멀고 먼 곳 산중에 정하여 찾아갈 수도 없이 하는 것은 조상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제 복을 구하는 소치에 지나지 않는다. 「상장(喪葬)」
즉, 정성과 진실이 없는 상례와 제례는 제 복이나 얻자면서 조상숭배를 빙자하는 얄팍한 술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김시습은 '하늘과 땅 사이에는 하나의 기[一氣]가 풀무질 할 따름이다'로 시작하는 「신귀설(神鬼說)」에서 오래 살고자 하는 허무한 시도나 허례허식에 대한 비판적 입장의 철학적 근거를 밝혔다. 먼저 '신귀'를 정의하였다.
천지간 하나의 기운이 펴지면 차고, 굽히면 비며, 차면 나가고, 비면 돌아가는데, 차고 나오게 하는 펴짐[伸]을 신(神)이라 하고, 굽히고 비어 돌아감[歸]을 귀(鬼)라 하니 이치는 하나지만 나뉨에 다름이 있다는 것이다. 「신귀설」
즉, 신(神)은 기운의 펴짐(伸)이며 귀(鬼)는 기운의 돌아감(歸)으로 '신귀'는 태극이라는 하나의 이치에서 파생하는 여러 갈래의 운동 현상 즉 리일분수(理一分殊)로서 인간의 이성으로 충분히 헤아릴 수 있는 우주자연의 원리였다. 신(神)과 신(伸), 귀(鬼)와 귀(歸)는 음도 같다.
그런데 지금 세상 사람들은 '귀신이라는 물건'이 따로 있어 화를 내리거나 복도 주는 줄로 알고 굿을 하고 있으니 무지의 소치가 아닌가! 관혼상제의 겉치레도 우주와 생명의 본질을 모르는 철부지나 하는 짓이었다.
11세기 기학(氣學)의 관점에서 우주론을 제창한 장재(張載)도 '귀신이란 음양 두 기운의 고유한 양능(良能)이다'고 한 바 있는데 김시습은 이런 흐름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러나 이에 머물지 않고 한 단계 나간 논리를 개발하였다. "사람이 알아야 할 귀신은 있지만 빌어야 할 귀신은 없다." 음사나 제천 그리고 허례허식을 비판할 근거를 귀신에서 찾은 셈이다.
이런 점에서 「신귀설」은 자연현상과 인간행동을 음양 두 기운의 운동으로 정리한 우리나라 최초의 기학 논문이자, 제사나 의례는 하늘에 대한 공경이지 개인의 복을 구하는 이기적인 행위가 될 수 없다는 논리를 제시한 최초의 예론이었다. 우주론의 관점에서 세도(世道)에 아무런 보탬이 되지 못한 이기주의를 비판하는 실천철학이었다.
이렇듯 김시습이 우주의 섭리와 인간의 마음, 도덕과 실천의 문제 등을 풀어내면 찾아온 사람은 감탄하였다. 그 광경을 적었다.
객이 조용히 자리를 피하며 "아름답다 그대의 말이여! 처음 들을 때는 한참 미친 사람 같았는데 끝에 가니 황홀하기가 첩첩 겹친 구름을 헤쳐 내고 밝은 해를 보는 것 같구나. 원컨대 그대 말을 다시 듣고자 하노라" 하였다. 「성리(性理)」
어느덧 대화는 복을 구하는 구차한 행동과 의식에 대한 폭로와 비판에서 왕도의 진실, 군자의 사명 등으로 옮겨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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