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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과 노래

[이종범의 사림열전] 남효온: 방랑, 기억을 향한 투쟁 ②

한강의 밤

남효온은 뜻있는 젊은 선비 사이에서 '실로 말하기 어려운 금기를 드러낸 강개한 인사'로 이름을 알렸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광동(狂童)', '광생(狂生)'으로 낙인이 찍혔다. 성균관의 사유(師儒)를 '자격이 없다'고 신랄하게 비판하였으니 그곳 출입도 생각하기 어려웠다.

남효온은 도성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 한동안 전장(田莊)이 있는 행주로 들어가 나루터에서 낚시로 소일하고 술을 찾았다. 그러다 모친의 간곡한 부탁으로 다시 과거 공부를 시작하였다. 행주의 어느 사찰을 찾고 집에는 '경심재(敬心齋)'라는 액자를 걸고 마음을 잡았다. 「경심재명(敬心齋銘)」이 있다. "해와 달이 머리 위로 환히 비치고 귀신은 좌우에서 살피며 내려다보네."

성종 11년(1480) 진사시에도 합격하였다. 그러나 대과는 포기하였다. 일화가 전한다. 어느 날 꿈에 증조모를 보았다고 한다.

내가 '급제하겠습니까' 물었더니 처음에 대답이 없어 다시 물으니 증조모가 '급제하기는 어렵겠다' 하시다가, 이윽고 '금년 5월에는 급제하겠는데 작문은 여러 선비의 으뜸이겠으나 원수가 시관이 되면 반드시 뽑기는 하되 하등으로 삼을 것이니 네가 급제하기 어려운 까닭이다' 하였다. 내가 '천지가 있고, 귀신이 바로 잡을 것인데 원수라 해도 어찌 사사로운 생각으로 그렇게 하겠습니까?' 하니, '네 말은 옳다' 하였다. 『추강냉화』

아찔하였다. '대과는 어렵겠구나' 하였을 것이다. 그래도 실력이 없다는 평판을 듣기는 내키지 않았던지 공부는 계속하였다. 그리고 3년쯤 되었을 때였다. 이번에는 평생 시우(詩友)를 기약하였으나 26세에 요절한 안응세(安應世)가 친구 고순(高淳)의 꿈에 나타나 안부를 물으며 시를 주더라는 것이다. 다음은 고순이 전한 안응세의 시다.

문장과 부귀는 모두 뜬구름 같은 것 文章富貴惣如雲
어찌 수고스럽게 독서에 애를 쓰는가 何須勞苦讀書勤
돈이 생기거든 술이나 사시게 但當得錢沽酒飮
세상 인간사가 그대 뜻대로 되지 않을 것이니 世間人事不須云


술과 시를 좋아하며 맑고 깨끗하게 살았던 안응세가 오죽하였으면 꿈에 나타났을까? 그래, 과거가 무슨 소용인가? 그때 감회를 「고순이 꿈에 안응세를 본 이야기에 적다」에 풀었다. 마지막 부분이다.

내 장차 번뇌를 버리고 吾將棄煩惱
이제 돌아가 낚싯줄을 손질하며 歸去理釣絲
한강 물가에서 어슬렁거리며 逍遙大江濱
그대 의심일랑 사지 말아야지 勿受吾侯疑


남효온은 한강을 오가며 낚시나 하며 살기로 작정하였다. 행주나루와 양화진 사이 압도(鴨島)에 갈대 집까지 지었다. 억센 갈대가 많아 나라가 관리하였는데, 마찰은 없었는지 모르겠다. 거룻배도 한 척 장만하였다. 띠 풀로 다락을 얹어 먹고 잘 수 있도록 꾸민 타루(柁樓)였다.

남효온은 여의도와 서강과 동작, 마포를 오가며 지냈다. 배가 지나가면 친구들이 술을 가지고 찾아왔다. 밤을 새며 그믐달을 보다가 닭 울음을 듣는 나날이었다. 그러다 압도로 들어가곤 하였다.

양화진에서 서호주인(西湖主人)을 자처하며 고깃배를 움직이던 이총과 왕래가 잦았다. 언젠가 친구들을 태우고 압도로 건너왔던 모양이다.「이총이 배 타고 압도의 초가를 찾다(百源乘舟訪余于鴨島蘆間)」다섯 수에 그날의 정경을 담았는데, 네 번째다.

잘 드는 칼로 가늘게 회 치니 은빛 나고 雄劍斫魚銀膾細
술 데우는 풍로 숯불 연기 푸른데 風爐煮酒炭烟靑
강과 들에서 부리는 종들까지 문 앞에서 신곡을 부르니 江奴野婢門新曲
다시 술잔 돌아 흠뻑 취하는구나 更與傳杯醉酩酊


고기를 잡아 회를 뜨고 술을 마셨는데 노비들이 이총이 새로 지은 노래를 따라 불렀다. 거문고에서는 당대 제일이었던 이총은 슬픈 노래를 많이 지었는데, 이 날은 부르기 쉽고 경쾌한 곡이었던 모양이다. 이총은 태종의 증손으로 나중에 남효온의 둘째 사위가 되었다.
▲ 난지도가 된 압도(鴨島), '소릉복위상소'를 올린 남효온이 한동안 갈대 집을 짓고 거룻배를 마련하고 살았던 압도. 1970년대 후반 쓰레기매립장으로 사용하면서 난지도(蘭芝島)로 이름을 바꾸었고 지금은 하늘공원이 조성되었다. 한양의 오부학당의 하나인 남학(南學)을 거쳐 성균관에 진학한 남효온은 경학은 물론 의술·지리·복서 등에 밝은 은진 출신 유생 강응정(姜應貞)이 주도한 '소학계(小學契)'에 참여하여 정례적으로 『소학』을 강론하고 실천하였다. 강응정이 효자로 이름이 있었기 때문에 일각에서는 '효자계(孝子契)'라고도 하였다. 박연(朴演), 신종호(申從濩), 손효조(孫孝祖), 강백진(康伯珍) 등이 함께 하였는데, 이들은 강응정을 공자, 박연을 안연(顔淵)으로 치켜세웠다고 한다. '성인 배우기'를 위하여 결속을 다지며 하는 농담이었을 것이다. 요사이 진취적 이념과 실천을 내세우는 대학생들의 동아리와 같았다. 남효온의 『추강냉화』에 전한다. ⓒ최승훈

한강은 사람과 물산이 무수히 지나는 물류와 소통의 길이었다. 뜻을 펴기 위하여 왔다가 뜻을 잃고 떠나는 만남과 헤어짐의 여러 길목이 있었다. 또한 기다림의 길이었다. 혹여 조정을 떠났다가 다시 들어가고자 할 때 한강보다 빠른 길은 없었다. 도성과 경기의 권세 있는 가문이 한강변에 전장(田莊)을 열었던 연유가 여기에 있다.

한강은 공부하기에 좋은 문화 공간이기도 하였다. 장래가 촉망되는 유능한 관리에게 휴가를 주어 책을 읽게 하는 독서당을 호당(湖堂)이라고 하는 것도 한강이 훤히 보이는 풍광 좋은 곳에 두었기 때문이다. 이것만이 아니다. 독서당의 엘리트 관료를 유인하며 조정과 도성의 권위를 가볍게 비웃을 수 있었다. 한강은 시위와 저항의 공간이었던 것이다. 그러다 한강은 풍류의 광장으로 변한다. 넓은 강바람을 타고 멀리 인왕산이 멀리 보이는 곳에서 즐기는 뱃놀이는 더할 나위 없었다. 그 사이 내일을 위한 격려와 위로를 주고받을 수 있으면 순간 연대와 모색의 공간으로 탈바꿈한다. 바로 남효온의 한강이었다.

남산의 봄

남효온은 도성에 들어가면 홍유손·이종준·권경유·이정은(李貞恩)·신영희(辛永禧)·우선언(禹善言)·이분(李坋)·조자지(趙自知)·이달선(李達善)·강흔(姜訢) 등과 자주 어울렸다. 달 밝은 밤이면 꽃을 보고 술을 마시며 밤거리를 활보하였으며, 날 고운 봄에는 남산에 올라 시를 지으며 또 마셨다.

어느 날 밤이었다. 비파를 걸쳐 멘 이정은과 함께 이종준의 집을 찾았다. 이정은은 태종의 손자가 되는 종친이었는데 음율의 달인이었다. 특히 슬픈 노래를 잘 연주하여 지나가던 행인도 멈춰서 눈물을 훔칠 정도였다. 이종준 역시 시와 그림에 일가를 이루었으니, 더할 나위 없는 조합이었다.

세 사람은 살구꽃이 활짝 핀 이종준의 뜰에서 이정은의 비파소리에 취하여 술을 마시고 시를 읊었다. 한 구절씩 이어가는 연구(聯句) 「이정은과 같이 달빛 타고 비파 들고 이종준의 문을 두드리다」가 있다.

우뢰 같은 비파소리 봄을 재촉하는데 琵琶撥雷催晩春 (이종준)
꽃 아래 사람다운 사람이 모였구나 花下相逢皆可人 (남효온)
청담이 끝나니 술 항아리가 엎어졌네 淸談未了󰜃欲臥 (이정은)
맛있는 산나물 안주를 배불리도 먹었구려 山肴喫盡羞澗蘋 (이종준)
좌중에서 이 추강이 늙어 미쳤다 한다지 座中秋江老狂發 (남효온)
다시 한 잔 비우면 원통함을 씻으려나 更把一杯心欲雪 (이정은)


이종준은 이정은의 비파 소리가 좋고, 이정은은 자신의 노래가 끝나자 술이 없는 것이 아쉬웠다. 남효온이 이 자리에 만난 사람은 좋지만 자신이 이렇게 미쳐 늙어가는 것이 아닌가 하자, 이정은이 한 잔 술을 권하며 위안하고 있다. 세 사람은 한껏 취하여 밤거리를 쏘다니다가 새벽에 권경유를 찾아가 놀라게 하였다. 『추강냉화』에 나온다. 이종준은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함경도로 유배를 가다 나라를 원망하는 시를 지었다고 모함을 받고 결국 맞아 죽었고, 권경유 역시 사초에서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불멸의 작품으로 찬양하였다는 이유로 참형을 당하였다.

성종 13년(1482) 봄날 조자지의 집에 갔을 때였다. 홍유손이 제안하였다. "현재 세상이 벼슬하기에는 마땅치 않으니 우리는 죽림칠현(竹林七賢)이 되어 호탕한 놀이나 할 뿐이다." 3세기 후반 중국 삼국시대 죽림 아래에서 술을 마시며 청정무위(淸淨無爲)와 공리공담(空理空談)을 일삼았던 일곱 선비들처럼 당분간 세상을 멀리하자는 모임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남효온·홍유손·조자지를 비롯하여 이정은·이총·우선언·한경기(韓景琦)가 중국의 청담파가 즐겨 썼던 '소요건(逍遼巾)'을 준비하고 술과 안주를 가지고 흥인문 밖 대밭에 모였다. '죽림우사(竹林羽士)'의 결성이었다. 이현손(李賢孫)·노섭(盧燮)·유방(柳房) 등은 뒤늦게 합석하였다. 일행은 날이 저물 때까지 화타(華陀)의 비방(秘方)으로 빗는다는 '도소주(屠蘇酒)'를 돌리며 한껏 노래하며 춤추다 헤어졌다. 한경기는 한명회의 손자, 노섭과 유방은 각각 노수신, 유자광의 아들이었다.

남효온은 술로 인하여 실수가 많아 장안의 놀림감이 된 적도 있었다. 모친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금주를 단행하였다. 그때 「지주부(止酒賦)」를 지었는데 남아 있지 않고 「주잠(酒箴)」이 남아 있다. 중간 부분이 이러하다.

석 잔이면 말이 잘 나오다가 三盃言始暢
법도를 잃은 줄도 모르고 失度自不知
열 잔이 되면 점차 언성이 높아가다 十盃聲漸高
그러다 의견이 벌어진다네 論議愈參差
이어서 항상 노래 부르고 춤추니 繼而恒歌舞
근육이 수고로운지도 깨닫지 못한다 不覺勞筋肌
연회가 파하면 동과 서로 치닫다가 筵罷馳東西
옷은 모두 황토물을 들였네 衣裳盡黃泥


사실 술 마시는 사람은 논쟁하다 틀어지고, 화해하다 어지럽게 마감한다. 겪어보지 않는 사람은 모른다. 그러나 남효온은 이후로도 술을 끊지 못하였고 술을 마시면 거리낌 없는 언사를 퍼붓곤 하였다.

언젠가 신영희·이달선 등과 남산으로 꽃구경을 간 모양이다. 「남산에 올라」라는 제목으로 각자 한 수를 읊었는데 남효온이 시작하였다.

지난해 이 산에 오르니 去年此山頭
사람들이 서로 봄꽃 구경하더라 春花人共看
남들은 가는데 나 홀로 왔으니 人去我獨來
이마에 땀이 보송보송 나더라 我顙誠有汗


이렇게 절반을 마쳤을 때였다. 신영희가 대뜸 "나 홀로 왔다는 구절에 무슨 곡절이 있으렷다?" 하며 수염을 비틀며 놀렸다. 다음은 후반이다.

어느덧 해 떨어져가니 斜日射三竿
봄날 강 물빛이 더욱 반짝인다 春江照爛漫
술병 열어 큰 잔 들이키니 開罇乃大嚼
뻐꾸기는 바위에 올라 조잘댄다 布穀啼巖畔


그러자 이달선이 "술은 왜 혼자 마신다고 하는가?" 하며, "이제는 수염을 통째 뽑히겠군" 하였다. 남효온이 말하였다.

아니다. 이 몸이 그대들과 오늘 놀지만 내일은 그대들보다 더 어진 사람과 놀아도 그대들은 꺼리지 않고 오히려 칭찬할 것 같다. 『추강냉화』

내일은 오늘보다 나은 날이 되고, 좋은 만남이 있었으면 한다는 것이다. 이제 남산을 벗어날까, 일탈을 생각하였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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