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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소와 선동

[이종범의 사림열전] 김시습: 머리를 깎았다고 못 가르칠 것은 없다 ⑤

노자 비판

김시습은 임금이 성인 같은 시대가 드물고, 임금이 군자를 찾지 않았던 역사가 아쉽고 두려웠다. 착한 선비가 시대를 만나지 못하고 뜻을 펴지 못할 때에 벼슬을 하지 않는 것은 어쩌면 마땅하였다. 공자도 말하였다. "나라에 도가 없으면 벼슬을 하지 않는다."

김시습은 간절하였다. 좋은 선비가 세상에 뜻을 펼 수 없어 숨더라도 살 만한 나라, 좋은 임금을 바라는 뜻은 버리지 않았으면 하였다.

착한 선비는 몸을 산림에 던졌다고 하여도 임금과 나라를 마음에 품고 크게 보좌할 뜻을 간직하여야 하니, 몸은 비록 갔지만 마음은 높은 대궐에 걸어두어야 하며, 종적은 비록 숨겼지만 뜻은 대신(臺臣)의 반열에 놓아야 하니, 이것이 바로 사군자의 마음 세움이다. 「삼청(三請)」

임금과 조정이 자신을 찾지 않더라도, 아니 찾아도 나설 수 없다고 하여도 나라를 향한 마음은 열어놓고 세상과 호흡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마음을 스승 삼아야 한다." 마음은 성인의 마음이었다.

성인은 노심초사(勞心焦思)와 공구계신(恐懼戒愼)하는 마음을 한시도 떠나지 않았다. 세상과 백성을 구제하기 위하여 항상 마음 졸이며 어쩔 줄 몰라 하고, 한 치 소홀함이라도 두려워하며 경계하였던 것이다.

공자도 말하였다. 자공(子貢)이 '인(仁)은 널리 베풀어 뭇사람을 구제하는 박시제중(博施濟衆)입니까?' 묻자, '어찌 인을 일삼았다고만 하겠는가, 반드시 성(聖)이니, 요순도 그러하지 못함을 아파하였다' 한 것이다. 백성을 향한 아파하는 마음이 바로 성인의 마음이었다.

이런 점에서 '두루 통달하였다'는 실달(悉達) 즉 싯다르타도 성인이었다. 모든 것을 기꺼이 버렸을 뿐만 아니라, 중생을 향한 안타까움 즉 희사와 자비의 마음을 한시도 놓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마음으로 정진하였기에 '뭇 생명은 망상에 빠져 모두 각자가 갖추고 있는 참된 본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진리를 깨우쳤다.

그런데 김시습이 보기에 노자는 '성(聖)'과 거리가 멀었다. '도는 항상 무위(無爲)이며 유위(有爲)가 없다' 혹은 '도는 숨어 있어 이름이 없다(道隱無名)'고 하였을 뿐으로 세상구제, 백성사랑의 마음이 처음부터 없었다는 것이다.
누군가 김시습에게 '도가의 작위하지 않음으로 그윽함을 지킨다는 무위수현(無爲守玄)이라는 근본 취지는 성리학과 다르지 않지 않는가?' 물었을 때였다. 노자가 교만과 허례 그리고 가식(假飾)이 활개를 치는 세태를 비판하였기에 태고를 사모하고 순박한 풍속을 숭상하며 자연을 따르는 자애와 소박한 삶을 염원하였다는 주장을 곁들인 질문이었다.

김시습은 단호하였다. 한유를 인용하여 '도가의 도는 저들의 도일 따름이지 우리가 말하는 성인의 도가 아니다' 하였다. 그리고 풀었다.

노자는 가장 높은 덕을 말할 뿐 덕으로서 백성을 가르치지 않았고, 또한 인의를 몸소 실행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어지러움의 으뜸이다. 「성리」

세상과 백성을 아우르지 않으면 그 도덕이 아무리 심오하고 아무리 커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사실 노자는 이렇게 주장한 바 있다.

도를 잘 행하는 옛사람은 백성을 개명시킨 것이 아니라 장차 어리석도록 만들었다. 백성을 다스리기가 어려운 것은 그들에게 지혜가 많기 때문이니, 지혜로 나라를 다스리면 나라의 적(賊)이 되고, 지혜로 다스리려고 하지 않아야 나라에 복(福)을 가져온다. 『도덕경』 65장

노자는 무지의 정치와 원시의 백성을 찬양한 것이다. 기존의 제도와 질서가 파괴되던 춘추전국시대에 기교와 계략, 제도와 인습에 대한 비판으로 들으면 그만이지만, 후폭풍은 그렇지 않았다. 지혜가 필요 없는 정치는 무단을 낳고, 아둔한 백성을 다스리는 길은 형벌밖에 없었다. 사실이었다. 전제군주가 좋아하는 학설이었다. 세상을 회피하는 선비도 받아들이면서 예악과 명분을 부정하고 자유방종으로 흘렀다.

변화를 읽으며 근본가치를 추구하라

노자가 성인이 될 수 없는 것은 어지러운 세상, 위태로운 시절을 핑계하며 '변통 없이 자연을 좇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현묘함에 빠져 세상에 대한 책임을 다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 무량사 극락전, 충남 부여군 외산면 만수리 만수산 아래에 있다. 김시습이 생애를 마친 곳이다. 이때 김시습은 다비(茶毘)를 사양하였는데 그래서 스님들이 3년 동안 매장하였다가 화장을 하니 사리 한 점이 나와서 부도를 세우고 안치하였다고 한다. 사리는 지금 부여박물관에 있다. 김시습 시비는 극락전으로 향하기 전 왼쪽에 있으며 극락전을 오른쪽으로 돌아 뒤쪽으로 가면 호젓하게 나무숲에 싸여 있는 산신각이 나오는데 김시습의 초상화는 본래 이곳에 있었다. ⓒ공주시

이에 비하여 성인은 한 곳에 머물거나 멈추는 법이 없었다. 시세의 변화와 사물의 이치에 통달하지 못하면 백성을 구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성리」에 적었다. "무릇 성(聖)이란 사변(事變)에 형통하고 물리(物理)에 통달하는 것이다." 『역경』 즉 '변화의 책(book of change)'을 해설하면서도 밝혔다.

변화하며 새로워지는 변역(變易)은 천지가 정한 법인데, 성인의 능숙한 사업도 여기에 있다. 「역설(易說)」

성인의 중생구제도 변화를 살펴서 새로움을 이룩한 결과였다. 따라서 성인을 배우려는 군자라면 마땅히 『역경』을 배우고 변화를 살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변화를 추구한다고 하여 사리사욕을 채우려고 한다든지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있어서는 아니 된다. 바로 '중용'의 길이었다.

중용은 적막과 정지 상태의 성취물이 아니었다. 시의에 따른 의리의 구현이었던 것이다. 공자가 때를 맞춘 '시중(時中)의 성인'이 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그러나 공자는 변화에 대처하면서도 하나의 가치는 결코 놓치지 않았다. 「상변설(常變說)」에 밝혔다.

변화든 불변이든 사람에 있지 도에 있지 않고, 평생토록 처신하는 한 마디의 말을 충서(忠恕)가 아니겠는가. 충서로 처신하면 변화든 불변이든 모두 막힘이 없이 통하게 되어 있다.

어떠한 시대, 어떠한 상황에서 변화의 길을 가는 것은 사람인데, 이때 평생 실천하여야 할 하나의 가치가 있다면 '충서(忠恕)'라는 것이다. 공자가 '사람이 길(道)을 넓히는 것이지 길이 사람을 넓히는 것은 아니다' 하고, 증자가 '선생님의 도는 충서일 뿐이다'고 한 어록을 조합한 것이다. 『논어』의 「위령공(衛靈公)」과 「이인(里仁)」에 나온다.

'충(忠)'은 임금에 대한 충성을 넘어 남을 위하여 자신을 전부 바치는 진기(盡己)와 진심(盡心)이며, '서(恕)'는 소극적 차원의 용서가 아니라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바를 남에게 시키지 않는' 바의 자아와 타인의 소통을 위한 적극적 의미의 관용이며 배려였다. 즉 충서는 바로 인(仁)이었다. 따라서 인은 '나 홀로' 덕목이 아니었다. 공자는 말한다. "무릇 어진 사람은 자기가 자립하고 싶은 욕망으로 남을 자립하게 하고, 자기가 앞서고 드러나고 싶은 욕망으로 남도 그렇게 되도록 하니, 자신에 미루어 남을 유추하여 생각하는 것이 인의 방법이다." 『논어』「옹야(雍也)」에 나온다. 사람과 사람이 이해하고 공존의 가치가 인이었던 것이다. 인의예지 중에서 인을 으뜸 삼는 연유도 여기에 있다.

김시습은 논설 도처에서 공자의 '인' 사상을 옮겨놓았다. 김시습 나름의 성인의 발견이며 마음에서의 경전 읽기였다. 그러면서 경전을 읽고 베끼면서 이기적 목표에 골몰하는 공부현실을 비판하였다.

지금 무엇을 할 것인가

김시습은 우울하였다. 성인을 배웠다는 신하가 임금을 제대로 보필하여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정치를 하지 못하는 것인가? 「고금충신의사총론(古今忠臣義士總論)」에 풀었다. "세도가 추락하여 교묘한 말로 임금의 뜻에 영합하며 벼슬을 잃지 않고 부귀를 구하는 데 골몰하는 신하가 많은 세상이 되었다." 임금 곁은 이기적 욕심이 가득한 신하들의 차지라는 것이다. 이것만이 아니었다.

김시습은 거짓 은자도 많은 세상이 싫었다. '군자의 숨고 나섬에 대한 고찰' 정도로 번역되는 글에 적었다.

이익을 탐하면서도 관작을 사양하는 척하며 임금의 마음을 끄는 교묘한 재주를 가진 신하, 명성을 낚으려고 은둔을 핑계로 외딴 땅을 찾아나서는 거짓 선비, 재덕이 없어 세상에 버림받고 궁촌에 살며 숨 가쁘게 꾸짖는 일을 일삼는 용렬한 사람들이 '나 역시 은자이다'라고 하고 있으니 못생긴 모모(嫫母)가 미인 서시(西施)를 흉내 내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고금군자은현론(古今君子隱顯論)」

즉, 이록(利祿)과 명예를 낚을 요량으로 은둔을 자처하고, 학문을 닦지 않아 버림받은 인생들이 세상을 비웃으며 은자를 자처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이비 은자여, 더 이상 세상을 속이지 말라! 하는 듯하다.

김시습이 보기에 사이비 은자는 나태하고 안일한 생활에 젖어 공부가 착실하지 않고 뜻도 확립되어 있지 않았다. 다만 세속을 벗어난 척 산림을 자처할 뿐이라는 것이다. 김시습은 분노했다.

옛사람은 산 속에서 먹고 마시고 살아도 규모와 원칙이 있었기 때문에 일단 세상에 나오면 일대의 스승이 되었는데, 지금은 산에 살면서 저토록 안일하고 나태하니 배고파서 목숨이나 버리고 궁상맞고 핍박받으며 제 삶이 가루로 부셔져 버린다고 하여도 마땅하다. 「산림(山林)」

세상에서 도를 펼 수 없다는 핑계로 무위자연(無爲自然), 무사무려(無思無慮)를 자처하며 안일과 나태에 젖어 있는 거짓 은자에 대한 미움이 철철 넘쳐난다.

김시습은 근래 불가의 안일한 수행 풍토도 못마땅하였다. 참선을 편안하고 한가로이 아무 일을 하지 않는 안한(安閑)과 무사무위(無事無爲)라고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청정과욕(淸淨寡慾)이란 종지만 내세울 줄 알았지 싯다르타가 그토록 염원하던 중생구제를 망각한 소치였다. 이렇게 단언하였다. '참선은 부단히 생각하고 면밀하게 염려하는 정진이다.'

김시습은 충심의 신하, 양심의 신하를 보고 싶었다. 그러자면 벼슬과 재물을 버릴 뿐 아니라 목숨까지 바치며 임금의 잘못을 고칠 수 있어야 하였다. 어떻게 하면 이러한 신하가 많이 출현할 수 있을까? '고금의 역사책에 충신과 의사의 열전을 수록한 까닭'을 설명하며 밝혔다.

역사에 화려한 필체로 절의를 드러내야 비분강개하는 선비가 다투어 의리로 나서서 즐거이 목숨을 바칠 것이 아닌가! 또한 뒤로 머뭇거리지 않고 선뜻 팔뚝을 걷고 손바닥에 침을 뱉고 나서는 용사가 있지 않겠나! 「고금충신의사총론」

역사에서 충의사적을 드러내는 것은 옛날의 충신 의사를 위로하는 것을 넘어 오늘의 건강하고 의로운 분발을 위하여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읽힌다. '역사에 절의의 선비, 용기의 선비로 이름을 남기려거든 분발하라.' 그리고 덧붙였다. "군자의 의리와 신하의 본분에 통달한 사람이라면 '나의 직분이 어찌 옛사람을 본받은 뒤에 그렇게 하겠는가!' 할 터인데, 이런 사람을 만나볼 수 없으니 탄식할 따름이다." 이 역시 '이 땅의 올바른 선비들이여, 지금 강건히 일어서지 않으면 달관(達觀)의 선비가 아니다!' 로 읽힌다.

여기에 더하여 세조의 즉위와 사육신의 죽음을 떠올리면, '우리 역사의 충절을 분명히 기억하고 기록하자' 하는 듯하다. 역사에 대한 나아가 역사를 향한 호소였다. 그리고 분명 선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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