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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세월

[이종범의 사림열전] 김시습: 머리를 깎았다고 못 가르칠 것은 없다 ①

연보

본관 강릉. 자 열경(悅卿). 호 동봉(東峯)·매월당(梅月堂)·청한자(淸寒子)·청은(淸隱) 등.

1435년 (세종 17) 성균관 근처 반촌에서 출생.
1449년 (세종 31) 15세, 모친 장씨 별세로 강릉에서 시묘
1453년 (단종 1) 봄 사마시 응시 실패, 초겨울 계유정난
1455년 (단종 3) 6월 세조 즉위, 방랑 시작.
1456년 (세조 2) 사육신의 '상왕복위운동' 실패
1458년 (세조 4) 봄 동학사에서 단종 초혼제, 관서를 시작으로 관동·호서·호남 유랑
1462년 (세조 8) 겨울 경주 금오산 용장사 안착
1463년 (세조 9) 가을 내불당에 설치된 간경도감의 역경사업 참여
1465년 (세조 11) 봄 금오산실 건축, 원각사 낙성법회 참석
1471년 (성종 2) 봄 상경
1472년 (성종 3) 가을 수락산 폭천정사(瀑泉精舍)에 머물음
1481년 (성종 12) 환속, 안씨와 재혼
1483년 (성종 14) 관동으로 떠남, 양양·강릉·설악산·춘천 등지에서 삶.
1490년 (성종 21) 가을 삼각산 중흥사에 머물음
1491년 (성종 22) 봄 다시 관동으로 감.
1493년 (성종 24) 봄 부여 무량사에서 운명.

프롤로그

스무 살에 방랑의 삶을 시작한 김시습은 스스로 뿌리 뽑혔기에 강건할 수 있었지만 외로운 가슴앓이는 한없이 애절하고 삶은 더없이 위태로웠다. 그를 지탱한 힘은 하늘에의 강렬한 믿음, 쉼 없는 평민과의 호흡, 나아가 패자에 대한 아름다운 기억이었다. 우리가 김시습을 만나면 미묘한 정염(情炎)에 휩싸이다가도 가벼운 통한의 한숨을 쓸어 담는 연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누구도 '김시습과 같이 살라' 하지 못한다. 무서운 무소유, 지독한 유랑, 그리고 철저한 버림을 누구도 감당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는 김시습 사상의 폭과 깊이, 문장의 자유분방함과 언행의 기상천외함에 경탄할 뿐, 진정으로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 요란한 찬사가 오히려 그를 옭아매며 차단하고 도리어 감춘 것은 아니었을까?

김시습은 시대의 어둠과 외롭게 맞섰던 고달픈 행동가였다. 그러나 그만의 것이 아니었다. 당대 젊은 사림의 기억운동과 철학적 성찰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 글이 그가 수락산에 살 때 묶었던 논설과 논문을 자세히 들추면서, 남효온·김일손과 같은 선봉 사림과의 인연을 새삼 복원한 연유가 여기에 있다.

1. 바람의 세월

*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김시습은 '생후 8개월 만에 말을 알아듣고 세 돌에 글을 엮었다'고 할 만큼 신동으로 이름을 날렸다. 정승 허조(許稠)가 찾아와 살폈고 세종도 궁궐로 불러 비단까지 내릴 정도였다. 윤상(尹詳)·김반(金泮)·이계전(李季甸) 같은 당대 학자에게도 배웠다. 그러나 단종 원년(1453) 봄의 사마시에는 실패하였다. 모친을 잃고 자신을 거두어준 외할머니까지 세상을 등지자 한동안 방황하며 순천 송광사로 가서 설준(雪峻)에게 불문을 엿듣는 등 학업에 소홀한 탓이었다.

김시습은 수양대군의 정변 후에도 공부를 계속하였다. '경술(經術)로 임금을 보필하리라'는 뜻은 여전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단종이 양위하였다는 소식에는 참을 수 없었다. 주나라 무왕(武王)의 후사인 어린 조카임금을 도와 성세를 열었던 주공(周公)이 되리라 한 다짐이 엊그제인데 정녕 거짓이었단 말인가! 이런 세상에 학문으로 출세하겠다는 나는 무엇인가? 책을 불사르고 삼각산 중흥사를 나와 떠돌았다.

세조 2년(1456) 상왕복위운동이 일어났을 때는 잠시 도성으로 들어와 고문과 사형의 현장을 엿보았다. 눈길조차 주지 못할 너부러진 시신들을 수습하여 노량에 묻었다. 그리고 1년.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쫓겨난 상왕이 세상을 버렸다는 소식은 실로 비참했다. 이에 그치지 않았다. 노산군의 생모라는 이유만으로 문종의 배위인 현덕왕후(顯德王后)의 신주를 종묘에서 꺼내고 문종과 함께 묻힌 관곽을 파헤친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현덕왕후의 첫 능침이 소릉(昭陵)이라서 '소릉폐치사건'이라 한다. 아찔한 세상이었다.
▲ 초혼각(招魂閣) 터의 숙모전(肅慕殿), 충남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 동학사 경내. 성덕왕 23년(724) 창건된 동학사에서는 일찍이 영해 박씨(寧海 朴氏)에서 신라 충신 박제상(朴堤上)을 위하여 초혼제를 올렸다고 알려져 있다. 김시습이 철원으로 찾아간 박도(朴鍍) 일가가 바로 영해 박씨였다. 길재도 동학사에서 정몽주를 위한 초혼제를 지냈는데, 이로서 이색(李穡) 길재(吉再)를 함께 추모하는 삼은각(三隱閣)이 생겼다. 세조 4년(1458) 삼은각 옆에 단종을 비롯하여 안평대군, 금성대군, 황보인, 김종서 등 280여 인의 위패를 모신 초혼각이 생기면서 초혼제가 허용하였다고 한다. 심경호 교수는 『김시습평전』에서 '세조가 초혼제를 허락한 것은 단종의 추모집회가 동시다발로 여러 곳에서 진행되는 것을 차단하려는 의도였다'고 한다. 실로 그렇다. 영조(英祖) 4년(1728) 화재로 타버린 것을 고종(高宗) 원년(1864)에 만화(萬化) 스님이 지금의 모습으로 재건하였는데 1924년에 숙모전(肅慕殿)이라 이름을 바꾸었다. ⓒ공주시

김시습은 여러 곳을 떠돌면서 세상을 등진 사람들을 만났다. 한동안 금화에도 머물렀다. 전 병조판서 박계손(朴季孫)이 부친 박도(朴鍍)를 모시고 일가와 함께 숨었던 곳이다. 오늘날 철원군 근남면 잠곡리 복계산 기슭 초막동이다. 고향 영천으로 낙향한 집현전 직제학 조상치(曺尙治)까지 합류하였다. 조상치는 상왕의 최후를 증언하였다.

세조 4년(1458) 봄 김시습은 계룡산 동학사에서 조상치, 박계손 등과 같이 상왕의 초혼제(招魂祭)를 지냈다. 이때 성삼문(成三問)의 육촌동생 성담수(成聃壽), 함안의 진사 조려(趙旅), 그리고 김종서의 당여로 몰려 교살당한 우의정 정분(鄭苯)의 아들 정지산(鄭之産)등도 모였다. 제사를 마친 일행은 각자 제 갈 길을 갔다.

김시습은 관서지방으로 길을 잡았다. 승려의 행색이었다. 그때의 심경을「관서를 호탕하게 유람한 뒤에 적다(宕遊關西錄後志)」에 풀었다.

남아가 세상에 나서 도를 행할 만한데도 제 몸만 깨끗이 하며 인륜을 어지럽힌다면 부끄러운 일이겠지만 어차피 도를 행할 수 없는 세상이라면 독선기신(獨善其身)이라도 하여야 옳지 않겠는가!

독선기신(獨善其身)! 『맹자』「진심장(盡心章)」에 나온다. "옛사람은 뜻을 얻지 못하면 제 몸이나마 홀로 착하게 하였다."

* 절속(絶俗)

김시습은 고양과 파주를 지나고 임진강을 건너 개성에 닿았다. 옛 도읍의 쓸쓸한 풍광이 생소하였다. 나라 구실을 못하여 이렇게 되었는가 하였다. 평양에서 단군묘와 기자묘를 참배하였을 때에는 뭉클하였다.

우리 으뜸 조상 단군왕검 檀君民鼻祖
태백산에 신령한 자취 드러냈네 太白有靈蹤


하다가,

홍범을 펴심이여 바람과 불이 도왔으며 訪陳範兮助風燄
우리 땅을 나눔이여 하늘이 내린 참호로세 分茅我土兮天塹


하였다. 단군과 기자의 위업을 찬양한 것이다. 그리고 기자조선의 멸망을 두고는,

슬프다 사직 뒤집힌 날 堪嗟顚社日
신하하지 않겠다는 마음이 잔인하구나 可忍不臣心


하였다. 기준(箕準)에게 의탁하였던 연나라의 위만(衛滿)이 나라를 가로챈 것이 안타까웠던 것이다.

김시습은 청천강을 넘어 묘향산에 올랐으며 깊은 산중 고을 희천(熙川)과 어천(魚川)을 지났다. 기이한 새와 짐승, 하늘에 솟는 소나무와 참나무를 보며, 밝은 달의 짝이 되어 바위굴에서 지새다가, 오두막을 찾아 잠을 청하는 날들이었다. 어느새 분잡한 생각이 사라지고 세간에 연연하는 티끌을 떨쳐냈다. 버림의 길! 「세속을 끊다」에서 이렇게 적었다.

나그네 취급도 못 받아도 성나지 않네 我不客至嗔
산중에 세속 사람이 한 사람도 없으니 山中無俗人
외로운 구름 밝은 달과 함께 孤雲與明月
오래도록 신선 동네의 손님이 되리니 長作洞天賓


명리와 생업, 그리고 가족은 물론이고 제 마음의 울분과 아픔과 미련까지 버리는 유랑이었다.

이제 가을이었다. 다시 청천강을 마주하였다. 고구려 을지문덕이 수나라 대군을 격파한 살수였다. 안주(安州)의 옛 성에도 올랐다. 잠깐 혼동이 있었다. 안주의 옛 성을 요동에 있는 안시성(安市城)으로 알았다. '아아, 이 곳에서 당 태종이 양만춘의 화살에 맞고 군대를 되돌렸겠구나' 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제목이 「안시성에서 가을을 보다」이다. 나라의 흥망, 영웅의 부침에 자신의 신세를 비추었다.

안시성 위에 낙엽이 쌓이니 安市城頭葉正黃
나그네의 가을 생각 그야말로 아득하다 客中秋思正茫茫
백 번 흥망이 바뀌어도 산은 예와 같으나 興亡百變山依舊
구름처럼 물처럼 떠돌다보니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되었구나 雲水千里事已荒
해 떨어지고 물결치는 강에서 기러기는 길을 잃고 日落江波迷去鴈
메마른 풀에 바람 스치니 쓰르라미 흐느끼네 風吹枯草咽啼螿
살수(薩水)는 넘실넘실 소리마저 다급하니 蕩蕩薩水灘聲急
슬픈 가을에 애간장이 끊어진다 함이 이런 것 아닌가 不是悲秋卽斷腸


김시습의 안시성은 더 이상 나라의 흥망을 갈랐던 영웅의 공간이 아니었다. 정처 없이 떠도는 자신이 길 잃은 기러기가 아닌가 싶고, 가냘픈 울음을 쓰르라미가 대신하여 주는 것 같았다. 애간장이 탔다.

그러나 슬픔은 정녕 자신의 몫이 아니었다. 도처에서 뿌리 뽑힌 삶을 목도한 것이다. 대동강에 갔을 때 섬을 떠돌다 돌아와 장사하는 일가를 만났을 때였다. 「어부」 중 일부이다.

지난해에는 관에서 어세를 토색하여 去歲官家漁稅討
가솔을 이끌고 파란 바다 저 멀리 섬으로 들어갔는데 挈家遠入碧海島
금년은 마을 서리가 와서 세금을 재촉하니 今年里胥來催科
집 팔고 배를 사서 찬 바다에서 해초나 캐고 있다네 賣家買艇依寒藻


민초와의 만남! 저들의 고달픔은 어디에서 연유하는가? 사연은 다르지만 유랑은 같았다. 그런데 자신은 성균관에서 만난 동료나 한 동네에 살던 벗을 만나면 환대를 받고, 개성 유수나 평양 부윤과 같은 지체 높은 관료들도 홀대는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의 유랑은 고행이 아니라 호탕한 유람[宕遊]이며 깨끗한 놀이[淸翫]가 아닌가.

* 유성처럼 떠돌다

첫해 겨울을 개성에서 보낸 김시습은 봄이 되자 파주를 거쳐 한강을 거슬러 반포까지 왔다가 다시 동북으로 길을 잡았다. 포천·영평·금화를 지나 금강산에 접어들었다. 내금강이었다. 시원한 여름이었다. 풍광에 도취되어 이상한 마음이 들었다. "이제 죽어도 좋겠다." 가을은 한양 근교의 도봉산·소요산·수락산 등을 배회하다가 회암사에서 겨울을 났다.

세조 6년(1460) 봄에는 관동으로 떠났다. 양평·여주·원주를 지나 여름을 오대산 월정사에서 보내고 대관령을 넘어 강릉을 찾았다. 관동의 아름답고 시원하고 맑고 깊은 산수가 좋았다. "비루하고 옹색한 가슴이 씻겨 내리는 듯하였다." 고성의 삼일포를 지나 해금강을 보고 싶었는데 여의치 않았다. 한때 강원도 금화에 숨었던 박계손 일가가 옮겨갔다는 함경도 문천을 찾으려던 마음도 접어야 했다. 이해 가을 강릉을 떠나 영월을 거쳐 괴산에 닿았다. 어디로 가는가? 청주로 길을 잡았다.

어느덧 호남대로. 금강을 넘어 강경포구에 닿았다. 은진 관촉사의 미륵불이 반가웠다. 웅장함이기 전에 따스한 미소였다. 「관촉사의 대불(大佛)을 알현하다」의 앞 구절이 그러하다.

노상에서 멀리 바라보니 웃음마저 새로워라 路上遙觀一笑新
위인이 천 길이나 되어 금강까지 솟았어라 偉人千尺聳江濱
지친 발로 깊은 산길을 힘겹게 오름은 不辭捲脚深山逕
이 몸 깨끗하게 하고 부처에 예 올리려 함이네 欲却淸齋禮梵身


김시습은 지평선이 아스라한 광활하고 누런 들판에 몸을 맡겼다가 논산 개태사, 김제 금산사 등의 사찰을 찾아들었다. 이해 겨울은 노령산맥 아래 천원역에서 났다. 한동안 운신조차 못할 만큼 아팠다.

이듬해에도 호남을 떠돌았다. 전주의 도회와 강경의 포구를 구경하고 부안 능가산(愣加山)에 올랐으며 변산의 내소사(來蘇寺)와 청림사(靑林寺)에 몸을 맡기다가 남도로 넘어왔다. 누가 찾지 않아도 발길은 분주하였다. 여러 산에도 올랐다. 「무등산에 올라」이다.

우거진 산 푸른 빛 아지랑이에 잠기니 藹藹山光滴翠嵐
높고 낮게 돌이 쌓인 샛길은 능수버들로 어둑하구나 高低石逕暗檉楠
신사와 불당에는 교목도 많고 神祠佛宇多喬木
하늘의 별들은 손에 닿을 듯 가까워라 千近星辰手可探


세조 7년(1461) 겨울을 노승 신행(信行)의 초청으로 장성 진원(珍原)의 인월정사(引月精舍)에서 보낸 김시습은 이듬해 봄에도 호남의 남과 북을 오락가락하다가 여름에는 순천 송광사를 찾았다. 불문과의 첫 인연을 맺게 한 설준 스님과 여러 날 같이 지냈다. 그리고 남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광한루에 오르니 피리소리 들리다」가 있다.

수레와 말이 뜸하여 객관은 쓸쓸한데 客館蕭條車馬稀
작은 다락은 휘황한 석양빛에 짓눌려있네 小樓高壓夕陽輝
길게 울리는 한 가락 피리는 구슬 같은 사람이 불겠구나 一聲長笛人如玉
혹여 달님 선녀가 지어낸 우의곡은 아닐는지 恰是姮娥奏羽衣


오랜만의 한적함에 어쩌면 여인이 그리웠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머묾은 없었다. 팔랑치를 넘어 지리산을 바라보며 함양에 들어섰다. 가을이 가고 있었다. 가야산의 해인사를 지난 김시습은 경주 금오산 즉 오늘의 남산에 지금은 없어지고 터만 남은 용장사(茸長寺)에 여장을 풀었다. 세조 8년(1462)은 이렇게 저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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