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습은 하늘이 만물을 낸 어찌할 수 없는 어진 마음으로 서로 묶여야 한다는 간절한 염원이 있었다. 이름이 '인(仁)'이었던 자주 찾아온 시승(詩僧)에게 적어준 「계인설(契仁說)」에 담았다. 사람들의 하늘을 향한 가장 귀한 약속이 '인'이라는 한 글자 있음을 밝힌 것이다. 성종 11년(1480)이었다.
이듬해 김시습은 머리를 기르고 환속하여 조부와 부친의 제사를 지냈다. 그리고 안씨(安氏)와 재혼하였다. 그런데 첫째 부인 남씨도 소식조차 끊긴 상태에서 사별하였다고 하는데, 재취 부인도 얼마 후에 세상을 떴다.
성종 14년(1483) 봄 김시습은 홀연히 관동으로 떠났다. 사약을 받은 폐비 윤씨가 낳은 원자가 세자가 되는 등 왕실과 조정이 어수선하던 참이었다. 머리는 깎지 않았지만 가사(袈裟)를 걸쳤으니 머리 긴 행각(行脚)스님, 두타승(頭陀僧)이었다. 이번에는 무작정 방랑이 아니었다. 수레에는 경전과 역사책까지 가득 실었으며 기장[黍]이라도 심을 땅을 구해서 살려는 계획이 있었다.
김시습은 북한강을 따라 화천에 머물다 춘천에서 살았다. 인제로 가서 진부령을 지나 강릉과 양양을 오고 갔다. 날씨가 풀리면 산중으로 들어가 밭에 보리와 조를 심고 거두었고, 추워지면 바닷가로 나왔을 것이다. 메밀밥으로 끼니를 때우는 곤궁한 생활이었다.
한때 양양부사 유자한(柳自漢)과 무척 친밀하게 지냈다. 가끔 술과 곡식도 받았고 대신 아들과 조카를 잠시 가르쳤다. 유자한은 경주 금오산 시절 경주부 통판으로서 교유가 있었던 유자빈(柳自濱)의 아우였다. 그러나 이 뿐이었다.
어느덧 오십을 넘었다. 지난 행로가 기막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봉육가(東峯六歌)」「번뇌를 풀다」등에 감회를 담았다. 특히 후자에서 자신의 행로와 희망을 숨김없이 담았다.
김시습은 어린 시절 신동으로 이름을 날리면서 청운의 꿈이 있었다.
내가 벼슬하는 날 期余就仕日
경술로 밝은 임금을 보좌하리라 經術佐明君
그러나 아니었다. 모친을 잃고 외할머니마저 세상을 떠나자 집안 살림도 어렵게 되면서 자신도 변하고 세상도 달라졌다. 그래서 떠돌았다.
비녀 꽂고 홀을 잡는 고관 되려는 생각이 없어지며 簪笏纓情少
구름과 수풀에 뜻을 두고 雲林着意多
세상일을 잊으려 할 뿐 唯思忘世事
산하 아무 데나 눕고 말았네 恣意臥山河
산수 간에 의탁하며 살았지만 그래도 공부를 쉬지 않은 덕분에 칭찬도 받았는데 재물을 받았지만 삶은 돌이킬 수 없었다.
남들의 칭찬에 많이 부끄러워하며 多慚譽我者
주는 것도 받았지만 가난은 면할 수 없었네 遺贈長吾貧
이렇듯 부서지고 어긋났지만 한 가지 꿈은 있었다. 마지막에 적었다.
조종 제사가 뒤집힌 것이 한스럽고 可恨顚宗祀
지난 기대 저버린 것이 마음에 걸리는데 關心負素期
강은 언제 맑아지는지 기다린 지 오래인데 河淸俟望久
학이 전하는 조칙은 더디기만 하네 鶴詔下來遲
즉, 종묘의 제사가 뒤집힌 역사가 지금이라도 바로 잡혔으면 하였다. 세조의 즉위가 가져온 어두운 과거를 잊지 않음이며, 비록 노산군으로 강등된 상왕의 복위를 기다림이었다. 자신의 인생은 어쩔 수 없게 되었지만 지난 세월의 아픔만은 씻겼으면 한 것이다. 그러나 세월은 여전히 한심하였다. 조소라도 해야 하는가. 「실소(失笑)」의 전반부다.
옛적과 오늘을 자세히 살펴보니 細窮古今事
문득 깔깔 웃지 않을 수 없네 失笑屢呵呵
나라를 그르쳐놓고 말마다 협력하자고 하고 誤國言言協
제 몸을 위한 일만 하고도 화합하자고 한다네 謀身事事和
사사로운 개인적 이익을 위하여 나라를 잘못 이끌어놓고 화합과 협력을 운위하는 위정집단에 대한 냉소. 증오보다 더 무서운 냉소였다…
중흥사 회합
한편의 미움은 다른 한편의 그리움을 키우는 것일까. 만년의 관동 시절 그리움을 담은 시가 부쩍 많아졌는데, 특히 남효온이 보고 싶었다. 「산중에서 친구를 생각하다」후반부이다.
내 남은 목숨 늙고 파리하여 餘生成潦倒
부평초 같던 삶을 너절하게 탄식할 뿐 浮世歎龍鍾
어느 날 장안에 가서 何日長安去
품은 정을 백공에게 말할 수 있을까 情懷話伯恭
백공(伯恭)은 남효온의 자(字)다. 당시 자가 호명(呼名)이었다면 호(號)는 존칭이었는데 서울에서 김시습은 열아홉 살 연하의 남효온을 항상 '추강'이란 호(號)로 불렀다. 젊은 나이에 '소릉복위'를 주장한 기개와 마음에 대한 존중이었으리라. 그런데 이번에는 자를 불렀다. 은밀한 친밀함이 밀려들었을 게다. 언제 만날까, 아니 이제 한번 찾아가야지, 한 것이다.
성종 21년(1490) 가을, 김시습은 삼각산 중흥사에 불쑥 나타났다. 수락산을 떠난 지 7년 만이었다. 세조 즉위의 소식을 듣고 책을 불사르고 떠났던 곳이다. 남효온이 김일손과 함께 찾아왔다. 그때 정황이 김일손의 일기를 바탕으로 조카인 김대유(金大有)가 꾸민 『탁영선생연보(濯纓先生年譜)』에 나온다.
세 사람은 밤새 담소하고 함께 백운대에 등정하고 도봉에 이르렀는데 무려 닷새 동안을 같이 보내고 헤어졌다. 그때의 담론이 모두 없어져서 전하지 않는데 혹여 기휘(忌諱)하는 바가 있어 그러한 것인지 알 수 없다. 『탁영선생연보』성종 21년 9월 경신
세 사람은 닷새를 같이 보내며 백운대에 오르고 도봉까지 갔는데 김일손은 그때 나눈 대화나 사연을 별반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비록 일기라 하더라도 왕실과 국가에 관한 금기사항이라 적어두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렇듯 역사는 기록으로 빛을 내기보다는 묵색(墨色)의 침묵에 잠겨있을 때가 더 많다. 그러나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세 사람은 얼마 전 남효온이 마감하고 김일손이 교정을 본 『육신전(六臣傳)』이나 이 해 봄 경연에서 '노산군의 후사를 정하여 제사를 지내자'는 김일손의 건의에 이야기가 미쳤을 것이다. 서로 흔쾌하나 즐거울 수 없는 눈빛이 오갔음에 틀림없다.
슬픈 기억의 노래
김시습은 상왕이 영월로 쫓겨 갔을 때의 「자규사(子規詞)」를 부르니 조상치가 먼저 따르고 박도와 자신이 이어갔다는 사실을 전해주었다. 김일손의「조상치의 자규사를 따르다」의 세주(細註)에 나온다. "조상치를 따라 김시습과 박도가 화답하였는데, 김시습이 나를 위하여 외운 것을 전해주었다."
다음은 김시습이 전하는 상왕의 「자규사」이다.
달 밝은 밤 귀촉도 울면 月白夜蜀魂啾
시름 못 잊어 다락에 기대었네 含愁情倚樓頭
네 울음 슬퍼 내 듣기 괴롭구나 爾啼悲我聞苦
네 소리 없으면 내 시름없을 것을 無爾聲無我愁
이 세상 괴로운 사람에게 말을 전하노니 寄語世上苦勞人
춘삼월에는 자규루에 부디 오르지 마소 愼莫登春三月子規樓
세조가 즉위하자 고향인 영천으로 낙향하였다가 영월을 찾았던 조상치가 듣고 따라 불렀다. 다음은 후반부이다.
그 얼굴 외롭고 모습도 초췌하여라 形單影孤貌憔悴
우러르고 높이기는커녕 뉘라서 돌아보리 不肯尊崇誰爾顧
슬프다 인간 원한 그 어찌 너뿐이리오 嗚呼人間寃恨豈獨爾
충신의사 강개 불평은 義士忠臣增慷慨激不平
손꼽아 세지 못할 것을 屈指難盡數
다음은 김시습이 따라 부른 노래인데, 역시 후반이다.
깃 떨어진 채 쓸쓸히 돌아갈 곳이 없구나 落羽蕭蕭無處歸
뭇 새들도 우러르지 않고 하늘도 돌보지 않으니 衆鳥不尊天不顧
어디를 보고 한밤중에 목매어 불평 쏟아낼까 故向中宵幽咽激不平
공연히 임금 잃은 신하 적막한데 空使孤臣寂寞
깊은 산에 남은 세월 얼마나 세어보았나 窮山殘更數
박도의 노래는 생략한다. 김일손은 사무쳤다. 즉석에서 읊었으니 뒷부분만 옮긴다.
지지배배 온갖 새들 서로 봄을 다투는데 啾啾百鳥共爭春
너만 홀로 슬피 울며 사방을 돌아보니 爾獨哀呼頻四顧
이미 별 기울고 달도 지니 그 울음 더욱 처량하여라 已而參橫月落聲轉悲
아름다운 사람 생각하니 눈은 아득하고 숨만 가빠 懷佳人兮目渺渺氣激激
외로운 신하 홀로 된 아낙의 곡성을 헤아릴 길 없네 孤臣寡婦哭無數
이때 김시습은 단종의 칠언율시 「자규」까지 외워서 전했다.
원통한 새 한 마리 궁중을 나오니 一自寃禽出帝宮
외로운 몸 그림자마저 짝 잃고 푸른 산을 헤매네 孤身隻影碧山中
밤은 오는데 잠들 수가 없고 假眠夜夜眠無假
해가 바뀌어도 한은 끝없어라 窮恨年年恨不窮
새벽 산에 울음소리 끊어지고 달이 흰 빛을 잃어가면 聲斷曉岑殘月白
피 흐르는 봄 골짜기에 떨어진 꽃만 붉겠구나 血流春谷洛花紅
하늘은 귀먹어 하소연을 듣지 못하는데 天聾尙未聞哀訴
서러운 이 몸의 귀만 어찌 이리 밝아지는고 胡乃愁人耳獨聰
후세 사람이 지어낸 것이 아니었다. 김시습이 그런 일을 할 사람도 아니다. 김일손이 시를 지었으니 「노릉어제(魯陵御製)의 자규시를 따르다」이다. 노산군을 임금으로 생각한 것이다.
금수의 미산 아래 옛 궁궐을 생각하니 錦水眉山憶舊宮
자규새 울음소리 나무 사이에 퍼지네 一聲聲在亂樹中
아름다운 여인은 수놓기를 그치며 봄이 지나감에 놀라고 佳人停繡驚春暮
외로운 나그네는 등잔불 아래에서 밤을 밝히네 孤客桃燈坐夜窮
만 리나 떠나온 시름이 예쁜 풀에 초록빛을 더하나 萬里愁添芳草綠
천 년 눈물이 떨어져 지는 꽃을 더욱 붉게 하는가 千年淚洒落花紅
돌아가리 하여도 돌아갈 곳이 어디메뇨 不如歸去歸何處
대궐 앞에서 외쳐 봐도 임금 귀에 들어갈 길이 없네 叫閤無由達帝聰
어찌하여도 비통은 가시지 않았고, 어찌하여도 감회는 풀리지 않았다.
마지막 외출
김시습은 이듬해(1491) 봄까지 삼각산에 머물렀다. 그동안 김일손은 진하사(進賀使) 서장관으로 북경을 다녀왔고, 남효온은 병든 몸이 더욱 쇠약해졌다. 두 사람이 김시습을 전송하였다. 김일손의 「남효온과 같이 설악으로 돌아가는 김시습을 전송하다」가 있다.
삼월 양화진에 꽃피고 맑은 강물이 굽이치는데 三月楊花洌水灣
조각구름 타고 외로운 학이 되어 가는 당신을 보냅니다 片雲孤鶴送君還
지란의 향기가 바람에 날려 추강의 집에 들어갔다가 芝蘭風入秋江室
이제 봄 고사리 나는 설악산으로 가는지요 薇蕨春生雪嶽山
오세 신동의 절개가 바로 정절공이군요 五歲神童猶靖節
백 년만의 맑은 선비가 완고함을 바르게 하였으니 百年淸士可廉頑
언젠가 두 사람이 지팡이 잇고 금강산에 가면서 聯筇他日金剛去
봉황 사는 산의 물나오는 곳에서 석관을 두드리이다 鳳頂源頭叩石關
아마 김시습이 남효온이 사는 집에 갔다가 양화진에서 배를 탔고 김일손은 이곳에서 배웅을 마쳤던 모양이다. 김일손이 보기에 김시습은 동진 시절 나라의 멸망을 슬퍼하며 숨었던 정절공(靖節公) 도잠(陶潛)이었다.
남효온은 흥인문 밖까지 나갔다. 「춘천 옛 집으로 돌아가는 동봉선생을 전송하다」두 수가 남아 있는데 다음은 첫 번째다.
우리 군자 보내려고 병든 몸을 일으켜서 爲送吾君起病身
흥인문 밖에서 뜨거운 먼지 뒤집어쓰고 있소 興仁門外觸炎塵
오늘 밤 헤어지면 하늘 끝으로 가십니까 天涯離別自今夕
메밀밭 꽃 앞에서 눈물을 쏟아낼 뿐 蕎麥花前忍淚人
남효온은 병이 깊어 무척 힘겨워하였다. 김시습은 아마 '우리 추강이 얼마 남지 않았구나' 하였을 것이다. 아쉬움이었다. 그래도 풍채 좋고 강건하며 재덕이 넘치는 김일손을 만나며, '이 사람이 우리의 뜻을 이어갈 사람이다' 하였는지 모른다. 김일손은 김시습보다 29살 아래였다.
관동으로 돌아간 김시습은 얼마 후 충청도 무량사(無量寺)로 향하였다. 무량사에서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을 판각 간행하고서 발문을 부탁하여 찾아간 것이다. 무량사는 부여를 지나 대천의 바닷가로 가는 돌이 좋은 만수산 골짜기에 있다. 아마 중간에 공주의 동학사에서 며칠을 보냈는지 모른다.
성종 24년(1493) 봄 김시습은 무량사에서 세상을 떠났다. 「무량사에서 병으로 눕다」가 있다. 평생의 마지막 시였을지 모른다.
봄비 오락가락 하는 이삼월인데 春雨浪浪三二月
급작스런 병을 겨우 견디며 선방에서 일어나 扶持暴病起禪房
누군가에게 서쪽에서 전해온 법을 물으려 하여도 向生欲問西來意
다른 스님 칭찬하고 높일까 두려울 따름이라 却恐他僧作擧揚
절에 왔으니 불법을 토론하고 싶었지만 이제 기력도 없고, 다른 스님 앞에 나설 뜻도 없었다. 그렇게 조용히 떠났다.
산하를 채색하다
홍유손(洪裕孫)이 제문을 보냈다. 홍유손은 원각사 상량법회가 있던 날 김시습을 처음 만났는데 그 때 감회를 「원각사 동편 스님 방에서」네 수에 담았는데, 다음은 첫 번째이다.
수고롭게 녹봉 구하지 않아도 굳세고 어질고 착하니 與勞非穀强賢臧
흡사 칼을 잘 숨기는 정도의 숨김일세 爭似丁刀更善藏
눈 속에서 풀잎 옷 입는데도 살갗은 더욱 부드럽고 雪裏草衣肥益軟
한낮 식사를 나무 열매로 때워도 오히려 배부르다 하며 日中木食腹猶望
청산녹수를 나의 집 경계로 삼고 있으니 靑山綠水吾家境
누가 청풍명월을 주장할 수 있을까 明月淸風孰主張
벼랑 끝을 떠돌고 물길에 맡기며 살면서도 如寄生涯宜放浪
오히려 명교를 세우려는 뜻은 하늘과 더불어 장구하구나 還思名敎共天長
2행의 정도(丁刀)는 칼을 휘둘러 기막히게 소를 잡는 솜씨는 정녕 칼을 감춘다는 『장자(莊子)』「양생주(養生主)」의 우화에 나온다. 김시습이 진정한 문장과 경술을 숨기고 있다는 것, 또한 청산녹수를 집으로 삼아 떠돌지만 진정한 부자이며 자연의 주인으로 존중한 것이다.
홍유손이 김시습에 시를 건넸을 때 서거정·김수온·홍윤성 등이 함께 있었다. 그렇다면 홍유손은 당대의 문장이며 당대의 실세들 앞에서 이들을 김시습 아래로 내렸던 것이다. 이렇듯 당대의 고관대작을 무시하였으니 언제까지 무사할 수 있을까? 결국 학술과 문장이 있어 향역(鄕役)을 면제받았던 홍유손은 '세상을 가볍게 보고 소리 높여 청담을 말한다'는 미움을 받고 본향인 남양에서 다시 향리로 복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양은 무량사와 가까워 남보다 소식이 빨랐을 것이나 홍유손은 향역에 묶인 몸인지라 직접 올 수 없었던지 서둘러 제문만 보냈다. 남효온이 이미 세상을 떠났으니 달리 제문을 지을 사람도 없었다. 특이한 육언고시(六言古詩)인데 후반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우리 동방이 당신 눈엔 텅 빈 곳 眼扶桑其盡空
짙푸른 하늘의 구름까지 모조리 걷어냈지요 怳雲掃乎紺天
저 명산과 대천은 彼名山與大川
공의 자취가 있어 얽혀 드러났고 惟公迹之編著
기암괴석과 수려한 물길도 奇巖怪石勝水
공이 감상을 기다려 색깔을 더하였더이다 待公賞而增色
마지막 증색(增色), 색을 더하였다는 것은 '색을 덧입혔다'는 뜻이다. 요사이 말로 채색(彩色)이다. 산하가 색깔을 더하였다는 것, 그래서 이 강산의 바위와 냇가가 비로소 색깔을 띠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기량과 재주를 펼 수 없었던 세상의 산하을 무소유의 붓끝으로. '색은 빛의 모방이 아니라 빛의 창조'라 함이 이를 두고 함이 아닐까?
당신은 산하에 색을 칠하고 빛을 뿌리고 갔다. 그리고 5년 후 엄청난 후폭풍을 일으켰다. 당신의 기억과 생각을 가까이서 엿보았던 김일손의 사초로 인하여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그럼에도 김시습은 거론조차 되지 않았다. 목숨을 빼앗을 자식도 없고 빼앗길 재산도 없고, 나아가 스스로를 스승으로 높이지도 않았던 철저한 자아희생의 귀결일 것이다.
역사가 계보그리기, 경계치기가 아니라고 한다면 지금쯤 김시습이 사림의 역사에서 어떠한 위상에 있는가 한 번쯤 생각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아니다. 김시습은 바라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백성을 살리지 못하고, 누구를 선양하며 자기를 도모하는가, 그러니 나를 팔지 말라, 깔깔 웃을지 모른다. 그래도 세상의 밝음과 인간의 착함을 위하여 아쉬움이 많은 분들은 김시습을 올바르고 폭넓게 기억하고자 발버둥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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