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 의령(宜寧), 자 백공(伯恭), 호 추강(秋江).
1454년(단종 2) 한양 출생
1478년(성종 9) '소릉복위상소' 올림
1480년(성종 11) 진사 급제
1482년(성종 13) 죽림우사 결성
1483년(성종 14) 「귀신론(鬼神論)」초고
1485년(성종 16) 4월 금강산 유람. 9월 송도 여행. 「성론(性論)」집필
1486년(성종 17) 충청도 기행
1487년(성종 18) 호남 유랑과 지리산과 해운대 유람
1488년(성종 19) 가을, 김일손 등과 청도의 운문사 유람
1489년(성종 20) 관서 유랑. 의령(宜寧)에 머묾. 『육신전』지음
1491년(성종 22) 호서와 호남 방문
1492년(성종 23) 39세, 10월 별세
1504년(연산 10) 부관참시
* 프롤로그
남효온(南孝溫)의 삶은 아낌없는 버림과 거침없는 언설의 연속이었다. 술과 노래는 분노이며 일탈이었으며 고독과 실의에서 시작한 방랑은 차라리 순례였다. 그러나 내일을 향한 교류와 소통에는 무척 열성이었다. 그때 남긴 글은 소망과 해원의 발산, 역사와 국토의 발견이었다. 최후 몇 년은 병마와 가난, 가족을 향한 통한으로 점철되었다. 이 시절 생명의 마지막 불꽃을 사르겠다는 각오로 만들어낸 『육신전』은 어두운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면 밝은 미래가 오지 않는다는 진실규명과 미래 화해를 위한 역사운동의 깃발이었다. 오늘날 '용서하되 잊지 말자' 하고 '진실을 밝히되 화해를 해치지 말자', 한다. 그러나 그의 뜻을 조금만 엿본다면 진실이 밝혀져야 용서하며, 속죄와 반성이 있어야 화해가 비로소 가능하다, 할 것이다.
우리는 지금 남효온을 비분강개를 주체하지 못한 '청담파' 선비로만 기억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의 삶과 노래를 세조를 향한 부국강병 찬가 속에 묻어버렸다. 오늘날에도 근대화행진곡을 구가하며 군사쿠데타와 독재가 빚어낸 상흔을 가볍게 잊으려고 함과 다르지 않다.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남효온의 「귀신론(鬼神論)」「성론(性論)」「심론(心論)」「명론(命論)」등의 논문이 조선시대 학술논쟁의 서막을 열었던 성리학의 귀중한 성과임을 간과하였다. 또한 가을 강가에서 들으면 더욱 시원한 『추강냉화(秋江冷話)』와 선비 54인의 언행을 증언한 『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이 침묵과 망각에 묻힐 뻔했던 지성사회, 사상문예의 흐름을 알려주는 인간과 정치, 학술과 문예의 생생한 기록이었음을 가볍게 취급하였다. 왜 이러한가? 남효온의 일생에 가로놓인 '과정의 미학(美學)'에 눈길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1. 전선의 형성
* 세조의 공신은 물러나야 한다
성종 9년(1478) 새해부터 흙비[土雨]가 무섭게 내렸다. 극심한 황사(黃沙)였다. 그리고 지진이 있고, 내내 비가 내리지 않았다. 연전부터 산이 무너지는 홍수와 태풍, 엄청난 가뭄, 들판을 휩쓴 메뚜기 떼, 그리고 복숭아와 자두나무에서 가을에 꽃이 피는 이상기후가 계속되었다.
사람이 잘못하면 천재지변과 기상이변이 나타난다고 생각하던 시대, 훈구공신들은 초조하였다. 국왕을 잘못 보필하고 국정을 엉망으로 운영하여 하늘의 화를 불러들였다는 책망을 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친정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는 성종도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성종은 어떻게 하면 좋은가? 의견을 구하였다. 국정 전반에 대한 반성과 대안을 요청하는 구언교(求言敎)를 내린 것이다.
이심원(李深源)이 상소를 올렸다. 먼저 수령의 탐학과 향리의 간사함, 그리고 권문의 재물 욕심으로 백성이 살 수 없는 지경에 있음을 폭로하였다. 그런데도 권문은 '사채를 금지하면 가난한 자가 의뢰할 곳이 없어 굶주리게 될 것이므로 그대로 두는 것이 낫다'고 하며 고리대를 정당화하면서 재산 늘리기에만 골몰하는 안일하고 이기적인 모습을 폭로하였다. 그러면서 당대 집권자가 누구인가를 물었다.
전하께서는 지금 집정자(執政者)를 모두 어질다고 여기십니까? 어진 이와 어질지 못한 이가 섞였다고 여기십니까? 비록 어질지 못한 이가 많지만 어진 이를 얻지 못하였으니 자리를 비울 수 없어 등용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조종(祖宗)께서 전하께 넘기셨으니 어질고 어리석음을 따지지 않고 받아들여야 조종의 뜻을 저버리는 것이 아니라고 그러시는 것입니까? 『성종실록』 9년 4월 8일
세조 치세부터 지금까지 정부를 요리하는 집권층이 어질지 못하다는 사실을 적시한 것이다. 그들의 능수능란한 처신과 이중적 행실에 임금이 속고 있음까지 들췄다. "지금 뜻을 펴고 있는 자들은 단정하고 공손하며 또한 응대함에 능숙하고 말을 잘 꾸밀 따름이다." 따라서 세조의 훈구공신은 물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심원은 효령대군의 증손 즉 태종의 현손이었다. 정치에 참여할 수 없는 종친의 입장이었기 때문에 신랄할 수 있었지만, 경학과 시문이 뛰어나고 행실이 가지런하였기에 이만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이튿날 성종을 친견하는 자리에서도 이심원은 주장하였다. "지금 훈구를 임용하지 않아야 그들을 공신으로 보호할 수 있고 세조의 은혜에 상처를 입히지 않을 것입니다." 비록 원상제가 폐지되고 최항(崔恒)과 신숙주(申叔舟) 등 거물이 타계하여 예전과 같지 않다고 하지만 여전히 막강한 훈구공신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도승지 임사홍이 반격하였다. "이심원은 다만 옛 글을 읽었을 뿐, 시의(時宜)에 맞추어 조처함을 알지 못하니 진실로 어리석고 망령된 사람이다." 임사홍은 이심원의 조부인 보성군(寶城君) 이합(李峇)의 사위로 이심원에게는 고모부가 되었다.
* 현덕왕후를 복위하자
이레 후, 또 한 편의 상소가 올라왔다. 이렇게 시작한다.
"초야의 백성으로 몇 해 전부터 개나 말이 자기 주인을 사랑하는 정성으로 배운 바를 말하고자 하는 강개한 마음이 있었다."
상소는 '사치풍조를 잡아야 혼인을 제때 시킬 수 있다'는 점을 비롯하여 '수령을 제대로 가려 뽑자' '인재의 취사선택을 신중히 하자' '고리대를 일삼고 백성과 토지를 두고 소송하는 내수사를 없애자' '유가의 이단인 무당과 불교를 배척하자' '삼강오륜을 밝혀 풍속을 바르게 하자' 등의 주장을 폈다. 여기까지는 자못 평범하였다.
그러다 별안간이다 싶게, 근래의 여러 천재지변은 현덕왕후를 폐위시킨 때문이라고 하였다.
사람의 마음과 기운에 순응하면 천심(天心)과 천기(天氣)에 순응하는 것이요, 사람의 마음과 기운에 순응하지 않으면 천심과 천기가 순응하지 않는 것입니다. 신의 어리석고 망령된 생각에 인심이 소릉(昭陵)의 폐치(廢置)에 순응하지 않으니 천심도 불순하여 재앙을 내리는 것입니다. 『성종실록』 9년 4월 15일
오늘날 인심이 소릉의 폐출을 억울해하므로 천재지변과 이상기후가 빈발한다는 것이었다. 소릉은 노산군을 낳은 현덕왕후가 문종의 현릉에 합장되기 전의 능침이다. 즉 현덕왕후를 복위시켜 인심을 편안하게 하여야 하늘의 재앙을 마감할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상소는 세조가 예종에게 내렸다는 훈시까지 공개하였다. "나는 어려움을 당하였으나 너는 태평하여야 할 것이니, 만약 나의 행적에 국한되어 변통을 알지 못하면 나의 뜻을 따르는 바가 아니다." 즉 세조가 치세 중의 불미스러운 처사를 예종이 바로잡아주기를 원하였으므로 현덕왕후를 복위시켜도 세조의 유지(遺志)에도 어긋나지 않다는 것이다.
이 상소가 바로 '소릉복위상소'로 알려져 있는 남효온의 「성종대왕에 올리는 상서(上書)」였다. 당시로서는 국가적 금기사항으로 되어 있던 세조 치세의 어두운 상흔을 공개적으로 들춰낸 최초의 언론이었다. 이때 나이 25세, 성균관 유생 시절이었다.
먼저 성균관이 발칵 뒤집혔다. 사유(師儒)들이 '내가 저 사람에게 도를 배우려고 하나 저 사람은 도가 없고, 내가 저 사람에게 학업을 물으려고 하나 저 사람은 학업이 없다'고 한 구절에 발끈한 것이다. 서거정까지 나섰다. "이런 부박한 풍조를 두고 볼 수 없으니 국문하자."
그러나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도승지 임사홍이 '신하로서 감히 입 밖에 낼 수 없는 소릉복위'를 거론하였음을 부각시키며 이심원과 기맥을 통한 붕당 행위의 소산이라고 규탄하였다.
최고공신 한명회도 좌시하지 않았다. "소릉복위와 공신배척은 세조를 비난하고 헐뜯은 것이므로 남효온과 이심원을 처벌하지 않으면 공신을 믿지 못하는 것이다." 공신인가 젊은 선비인가, 양자택일을 요구하는 노회한 술법이었다.
조정에서 남효온과 이심원을 구원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다만 성삼문의 재종제로서 성담수(成聃壽)의 친동생인 성담년(成聃年)과 노사신(盧思愼)이 소수의견을 냈을 뿐이다. "말이 맞지 않는 미친 아이를 추국할 수 없다." 광동(狂童)이니 불문에 부쳐야 한다는 논리였다.
자칫 참화가 일어날 뻔하였다. 그러나 두 사람은 무사하였다. 성종의 '구언으로 인한 언론을 처벌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는 뜻이 확고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한명회에게 '저들의 망언을 믿지 않고 있다'는 전지를 내려 보냈다. 훈구공신의 위세는 여전히 막강하였던 것이다.
* 그대를 보내고
이심원과 남효온의 상소의 파장이 일단락되자 이번에는 사헌부와 사간원의 신진관료들이 '시절의 운수가 마침 이러한 것이므로 재이(災異)는 걱정할 것이 없다'고 한 임사홍의 발언을 문제 삼았다. 하늘과 사람은 서로 간섭하지 않는다는 '천문우연설(天文偶然說)'로 임금을 현혹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지난 해 임사홍과 유자광이 공모하여 현석규를 궁지에 몰아넣었던 진상까지 고발하였다. 결국 임사홍과 유자광은 '붕당을 지었다'는 죄를 받고 유배를 갔다. 이렇게 마무리되는 듯하였다. 그러나 이심원도 무사하지 못하였다. 내막이 조금은 복잡하다.
태종의 넷째 왕자로 어린 시절 세상을 떠난 성녕대군(誠寧大君)의 제사를 받들던 원천군(原川君)이 적자가 없이 세상을 떠나자, 왕실의 최고 어른인 효령대군이 원천군의 서장자(庶長子)로 후사를 삼았다. 그런데 후사를 탐냈던 이심원의 조부 보성군이 사돈인 임원준(任元濬)과 공모하여 서출(庶出)을 후사를 삼을 수 없다는 여론을 일으켰다. 임원준은 임사홍의 부친으로 세조의 정변과 즉위를 도운 공신이었다. 후사가 되면 재산을 승계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임사홍의 몫도 자연히 생길 것이었다.
임원준이 이심원을 충동하였다. 학문과 문장을 갖춘 터에 효령대군의 신망이 두텁다는 것을 이용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단호하였다. "증조부이신 효령대군의 뜻이 그렇지 않으셨는데, 조부께서 제사를 받들어야 하겠습니까?" 이심원이 찬물을 끼얹은 것이다. 그런데 이심원의 상소 때문에 사위까지 유배를 떠났던 것이다.
보성군은 이심원이 괘씸하였다. 아니 증오하였다. 그러던 차에 일가의 회합에서 이심원을 심하게 꾸짖었는데, 그만 '강력하게 반발하고 말았다.' 겉만 보면 불효이며 패륜이었다. 보성군이 고발하였다. "이심원이 여러 번 광패(狂悖)한 말을 하였을 뿐 아니라, 이제 고모부 임사홍을 헐뜯었으므로 인정과 천리가 이럴 수 없다." 조부가 손자의 처벌을 주창한 것이다. 성종 9년(1478) 9월이었다.
정창손·한명회·노사신·심회(沈澮) 등 훈구대신은 '조부에게 방자하고 도리를 잃었다'며 처벌에 동조하였다. 예전 같으면 아무런 반대가 없이 그대로 시행될 것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비공신계 신진관료가 이심원을 옹호하고 나섰다. "이심원을 손자로 보지 않고 해칠 생각을 한 보성군이 잘못이며, 이심원을 시켜 종실의 양자 문제를 충동질한 임원준의 잘못이 우선이다." 이형원(李亨元)·김흔(金訢)·민사건(閔師騫)·성담년·유호인 등이었다. 이렇게도 주장하였다. "이심원은 어릴 적부터 학문에 뜻을 두고 뜻이 맞는 성균관 유생들과 '소학의 도'를 깊이 연구하였다." 『소학』을 통한 수기(修己)와 일가주의(一家主義)의 이기(利己)를 대비시킨 것이다.
훈구공신에 대한 신진관료의 집단적 반론!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광경이 펼쳐진 것이다. 전선의 형성이었다. 성종도 처음에는 신진관료를 따랐다. "이심원의 말은 공적(公的)인 것이지 사적(私的)인 것이 아니다." 그러나 훈구공신의 처벌 주장이 워낙 거셌다. 성종도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이심원은 '조부에게 행패를 부렸다'는 죄목을 뒤집어쓰고 장단(長湍), 이천(利川) 등지로 쫓겨나서 한동안 도성에 들어올 수 없었다.
남효온은 아쉬웠다. 언젠가 꿈에 보았던 모양이다. 「꿈에 성광(醒狂)을 보다」중 일부다. 성광(醒狂)은 이심원의 호로서 '깨어 있는 미치광이'란 뜻인데, 다른 호로 묵재(黙齋), 태평진일(太平眞逸)이 있다.
아아 우리 어진 선생이여 因嗟子夫子
전에는 백관의 반열에 있어 往者在鵷行
일언으로 국사를 부지하려다 一言扶國事
지금에 이르러 한바탕 꿈이 되었네 到今成黃粱
남효온과 동갑이었던 이심원은 성리학에 밝았다. 언젠가 이심원과 안우(安遇)가 이런 대화를 나눴다. 『추강냉화』에 나온다.
안 우 : 기(氣)에 리(理)가 있음이 마치 계란에 노른자가 있는 것과 같다.
이심원 : 그렇지 않다. 계란의 노른자는 본래 리와 기를 함께 가지고 있고, 흰자도 리와 기를 함께 가지고 있다. 형상이 있으면 기요, 보이지 않는 것은 리다. 리와 기는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다.
안우가 리는 기에 있다 즉 형상이 있어야 리도 있다고 한 반면에 이심원은 리는 형상을 떠나 있는 만유의 원리라고 본 것이다. 바로 주희를 따르는 입장이었다. 그랬음인지 남효온은 「백연(伯淵)을 이천의 유배지로 보내며(送別伯淵謫伊川)」에서 "천 년 넘게 이름 전할 주자처럼, 그대의 뱃속은 오경을 담는 상자라네" 하였다. 백연은 이심원의 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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