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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전쟁

[이종범의 사림열전] 김종직: 경계인을 위한 변명ㆍ⑥

임금 곁으로

김종직은 성종 13년(1482) 7월 홍문관 응교로 복귀하였다. 십여 년만이었다. 왕실은 뒤숭숭하였다. 지난 해 쫓겨난 폐비 윤씨가 사약을 받았고, 그 소생인 원자가 세자가 되었다. 생모의 죽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세자는 도무지 공부를 싫어하였다. 김종직이 문제를 제기하였다.

"덕성의 함양은 학문이 아니면 될 수 없고, 학문은 반드시 어릴 때부터 습관을 이루어야만 자립할 수 있다."

그러나 '세자의 나이 어리므로 매일 서연을 열 필요가 없다'는 발언에 묻히고 말았다.

김종직은 유향소 복설문제를 제안하였다. 유향소를 통하여 지방의 토호와 향리의 불법을 검속하며, 『소학』을 보급하고 향음례(鄕飮禮), 향사례(鄕射禮) 및 양로연(養老宴) 등을 원활하게 실시해보자는 것이었다. 지방 사족의 참여와 협력을 이끌어내지 못하면 민생의 보호와 민풍의 개선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지방관 경험을 통하여 절감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훈구대신은 한결같이 '세조가 유향소를 폐지한 것은 향리를 규찰하는 과정에서 폐단이 많았기 때문이다' 하였다. 훈구대신의 벽은 두껍고 높았다. 임금도 동조하지 않았다. "수령을 찾기도 힘든 실정인데 향리를 검속하고 규찰할 사람이 시골에 있겠는가?"

이러한 상황임에도 김종직은 점차 조정의 한복판, 아니 임금 곁으로 성큼 성큼 다가섰다. 문장의 힘이었다. 성종 14년(1483) 온양의 온천으로 요양을 갔다가 세상을 떠난 세조비를 위한 추도문 「정희왕후애책문(貞熹王后哀冊文)」이나 같은 해 보수공사를 마친 창경궁의 상량문 등을 지었다. 임금에 대한 은근한 영합도 한몫을 하였다. 창경궁 상량문에는 이런 문구를 넣었다. "빨리 짓지 말라고 하여도 백성이 다투어 와서 일을 하였다." 성종이 정색하였다. "이것은 문왕(文王)의 일이니 내가 어찌 감히 감당하겠는가? 고치도록 하라." 그러나 내심 싫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런 일화도 전한다. 정희왕후 상중에 성종과 월산대군이 시를 주고받은 것을 두고 홍문관이 문제를 삼았을 때였다. 성종이 "정말 잘못인가?" 하며 의중을 묻자 김종직은 대답하였다. "시문은 음악과 다르니 무엇이 해롭겠습니까?"

김종직은 승정원에서 동부승지와 좌부승지를 맡다가 '우승지·좌승지를 거치지 않고' 바로 도승지가 되었다. 파격이었다. 그리고 이조참판으로 영전하였다. 도승지도 그렇지만 훈구공신 출신이나 왕실의 지친이 아니면 쉽게 맡을 수 없는 요직이었다.

학문권력을 향하여

김종직이 도승지가 되기 한 달 전인 성종 15년(1484) 7월, 창경궁 북쪽에 새로 들어선 환취정(環翠亭)의 기문을 지었는데 이렇게 되어 있다.

화창한 봄날 초목이 활짝 피면 천지가 만물을 내는 인(仁)을 느끼시어 '노쇠한 병자나 홀아비와 과부들을 어떻게 하면 굶주리지 않게 할까' 하시고, 훈풍이 남쪽에서 불어오고 뜨거운 햇볕이 창공을 불태울 적에는 '맑은 그늘을 어떻게 하면 골고루 베풀어줄까' 하시며, 가을이 되어 단풍이 들고 오곡이 무르익을 때에는 '우리 백성이 십일세(什一稅) 넘게 세금을 내면 아니 된다' 하시고, 눈이 하얗게 내리고 엄한 추위가 갖옷을 엄습할 때에는 '우리 백성의 트고 얼룩진 살결을 더 이상 수고롭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하신다.

「환취정기」

자연의 춘하추동의 절기와 질서를 인간의 본성인 인의예지와 결부시키고, 임금은 휴식하면서도 백성 생각을 멈추지 않아야 한다는 뜻을 사계절의 무늬와 빛깔에 어울리게 퍽이나 아름답고 부드럽게 풀었다.

당시 일화가 전한다. 성종이 기문을 여러 문신에게 맡겼는데 모두 낙제였고, 서거정만 겨우 '삼하(三下)'였다. 그래서 김종직에게 맡긴 것인데 한 글자도 수정하지 않고 줄줄 써내려갔다는 것이다.

예종 원년(1469)부터 예문관 대제학과 성균관 지사를 지내며 『동문선(東文選)』『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동국통감(東國通鑑)』등 국가문헌 편찬사업을 주도한 서거정으로서는 일생일대의 굽힘이었다. 물론 이미 예순다섯으로 노쇠하기도 하였지만 시큰둥하니 지었을 수도 있다.
▲ 서거정선생묘지석(徐居正先生墓誌石),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36호. 성종 19년(1488) 서거정이 세상을 떠난 성종 19년(1488)에 만들어진 서거정의 묘지석이다. 백자로 되어 있는데 모두 19매이었지만 현재 16매만 남아 있다. 서거정의 일대기와 공적을 적은 묘지석은 처음에는 서울시 강동구 방이동에 있던 묘역에 있었지만 도시계획으로 이장하면서 발견되어 지금은 경기도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현재의 서거정의 묘는 화성시 봉담읍 왕림리에 있다. ⓒ문화재청

사실 서거정은 자부심이 무척 강하여 후배와 같이 글을 짓는 자체를 싫어하였는데 어쩔 수 없을 때면 불평이 대단하였다.

"30여 년 사문(斯文) 맹주로서 젖비린내 나는 소생(小生)과 재주를 겨루게 되니 여기서 조정은 체통을 잃었다."

『성종실록』 19년(1488) 12월 24일 서거정 졸기에 있다.

서거정의 위상은 크게 흔들렸다. 성종 15년(1484) 11월 『동국통감』을 일차 마무리하여 올렸을 때였다. 성종은 못마땅하였다. "이 책은 만세에 남길 만한데 왜 김부식(金富軾)과 권근(權近)의 사론밖에 없는가?" 사론을 보충하라는 전교나 다름없었다. 서거정이 "김부식과 권근 외에도 이첨(李詹)과 이제현(李齊賢)의 사론이 있다"고 변명하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새로운 역사책이라면 새로운 사론이 있어야 함을 모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이듬해 7월 『신편동국통감』이 마무리되었는데, 여기에 새로 추가된 사론 200여 편을 집필한 최부(崔溥)와 표연말(表沿沫) 등은 모두 김종직의 제자들이었다. 『신편동국통감』이 훈구공신의 역사관의 비판이요, 극복임과 동시에 사림파의 역할이 강화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고 평가되는 연유가 여기에 있다.

고지 앞에서

서거정이 국왕의 힐난을 받고 『신편동국통감』 편찬에 종사할 때 김종직에게는 『동국여지승람』을 수정 증보하는 임무가 주어졌다. 이 역시 서거정이 편찬한 우리나라 인문지리서였다. 처음에는 성간(成侃)·채수(蔡壽)·이창신(李昌臣)·김맹성(金孟性) 등과 함께 하였지만 한발로 중단하고, 한 해를 넘기고 완성하였다. 성종 17년(1486) 여름이었다. 역시 제자들인 신종호·최부·유호인·이의무(李宜茂) 등이 큰 몫을 하였다.

김종직은 각 고장의 고적(古跡)과 성씨(姓氏) 나아가 봉수(烽燧) 등을 새로 추가한 신증판(新增版)에 자못 만족하여 이렇게 적었다.

우리나라는 지방마다 도지(圖誌)가 있는 중국과 달라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를 그대로 본받을 수는 없지만, 속언(俗諺)을 얻고 견문을 널리 수집하였으며 각 지방의 고금 사적을 자세히 실었으니 한 번 열어보면 이 모든 것이 일목요연하여 실로 부끄러움이 없다.

「여지승람발(輿地勝覽跋)」

우리 국토와 역사에 스며든 문화의 힘, 지방의 역사와 인물을 들춰냈음에 대한 자부심을 숨기지 않은 것이다.
이 시기 김종직은 『동문선』에 빠진 시문을 수집하여 『동문수(東文粹)』와 『청구풍아(靑丘風雅)』에 엮었다. 흔히 관각문학(館閣文學) 즉 국가의 문장, 조정의 문학의 대표자인 서거정이 정리한 우리나라 시문학총서에 대한 비판과 보완의 의미가 있었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이든지 정치에서 학술과 문장이 차지하는 비중이 있는 것이고, 이때 누구의 학술과 누구의 문장이 국가적으로 공인되는가 하는 점을 생각하면 김종직에 의한 국가적 학문 편찬사업은 중대한 변화였다. 즉 서거정으로 대표되는 훈구공신의 학문권력이 김종직과 문인집단으로 이동하는 징표였던 것이다.

그러나 김종직은 정녕 예문관 대제학에 오르지 못하였다. 국가의 학술의 권위를 세우고 문장의 표준을 제시하는 문형(文衡)을 맡지 못한 것이다. 서거정이 자리를 놓지 않았을 뿐 아니라 후임으로 천거하지도 않았다. 서거정의 조카가 '문형을 너무 오래 한다'는 세간의 비난을 전하자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그만두면 김종직을 후임으로 삼아야 하는데 그렇게는 못하니 머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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