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효온은 세상과 단절하다시피 살았다. 깊은 고독도 이제 익숙하였다. 그런 중에도 어슴푸레 기쁨이 있었다. 성종 17년(1486) 세 살 아래 이달선과 열 살 아래 김일손이 당당하게 문과에 합격하였을 때였다. 자신은 과거를 포기하고 살지만 후배들이 제 몫을 하고 있어서 무척 좋았다. 단번에 연작 「이달선과 김일손의 급제를 축하하다」를 지어 세 수씩 주었다.
남효온은 '착함을 기뻐하는 성품'이 좋아 이달선과 자주 어울렸는데, 더구나 그의 부친 이형원은 최고공신 한명회의 권력 남용을 거리낌 없이 탄핵하는 등 비공신계 신진사림에게 신망이 두터웠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형원은 성종 10년(1479) 통신사로 갔다가 대마도주(對馬島主)의 방해 책동으로 일본 본토에 상륙하지도 못하고 귀국하던 중에 화병을 얻어 거제도에서 세상을 떠났다. 선조 23년(1490) 황윤길과 김성일을 파견할 때까지 통신사를 보내지 않게 된 것도 그런 영향이 없지 않았다.
남효온이 이달선 몫으로 준 첫째 수에서 '지하의 선공도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시리라'는 구절은 이러한 사연이 있었다. 다음은 두 번째다.
햇빛 받아 오색구름 찬연히 퍼지는 날은 日下五雲爛未收
광한전 깊은 궁궐에 계수나무 꽃피는 가을이었다네 廣寒深殿桂花秋
농사짓던 부열은 황금 솥에서 조리를 잘하였으니 秪隨傅說調金鼎
이게 바로 동황이 팔폐를 구한 뜻이리라 正是東皇八狴求
3행 부열(傅說)은 은나라에서 농사짓다가 발탁된 명상이며, 황금 솥은 좋은 정치를 의미한다. 그런데 4행 춘신(春神)을 뜻하는 '동황(東皇)'과 여덟 마리 개 즉 '팔폐(八狴)'는 무엇인가? 내력이 있다.
어느 날 이달선의 꿈에 누가 나타나 이런 시를 읊어주고 홀연히 사라지더라는 것이다.
세상이 붉은 먼지로 가득하니 世上紅塵滿
하늘 누각의 자주빛 보석은 차가워지더라 天樓紫玉寒
동황이 팔폐를 구하니 東皇求八狴
마침내 고향을 그리워하지도 못하겠네 終不憶家山
이달선은 불길하여 '저승에서 부르는구나' 하였다. 팔폐를 무덤 앞의 석물 정도로 생각한 것이다. 다른 사람도 '얼마 살지 못하겠다' 걱정하였다. '세상이 어지럽고 하늘도 무심한 시절에 봄이 오면 고향집에 가지 못할 것이다'라고 풀었던 것이다. 과거에 따른 강박감이 없지 않던 터에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꿈에 그렇게 나타난 것이리라. 그런데 과거에 들고 보니, '동황이 팔폐를 구함'은 '임금이 훌륭한 신하를 찾음'이 되었다. 흉몽이 아니라 길몽이었다. 『추강냉화』에 나온다. 남효온은 "이달선! 그대는 임금이 찾는 꿈까지 꾸었으니 부열과 같은 명재상이 되어 세상의 티끌을 씻고 하늘에 보답하시게"라고 당부한 것이다.
남효온은 일찍부터 김일손의 영민함과 당찬 기개가 좋았다. 두 사람은 함께 원호(元昊)를 배알하기도 하였다. 계유정난 이후 원주에 숨어살며 단종의 죽음을 가까이에서 겪었던 원로였다. 또한 자신은 배우지 않았지만 평소 '옛사람의 풍모를 보았다'고 하며 마음의 스승으로 삼았던 김종직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는 사실도 듬직하였다. 그러던 차에 약관에 급제하니 한껏 좋을 수밖에. "우리 스승도 누가 그대 같으랴 높였으니, 명성은 일월만큼 높고 문장은 이부시랑(吏部侍郞)이로세." 이부시랑은 당나라 한유(韓愈)인데,「원도(原道)」등을 통하여 상고의 문명과 유학의 정신을 발견한 대학자요, 고문(古文)의 가치를 살린 문장가로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으뜸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당부하였다.
그대 문채가 이미 오봉을 보고 닦았으니 文藻已看修五鳳
이제 마음을 가다듬고 여남전을 배워야지 心齊須識呂藍田
여남전(呂藍田)은 북송 시절 섬서성(陝西省)의 남전(藍田)에서 교육 진흥과 풍속 교화, 상부상조를 위하여 향약을 처음 실시한 여대균(呂大鈞)을 말한다. 문장은 이미 훌륭하니, 백성을 살리는 경세제민에 매진하라고 충고한 것이다.
김일손은 조정의 국사가 바쁠 터인데도 틈을 내어 행주를 찾아왔다. 같이 파주로 가서 성삼문의 재종제로 숨어살던 성담수를 배알하고, 김일손의 고향 청도의 운문산을 같이 오르기도 하였다. 남효온에게 김일손은 큰 위안이었다.
남효온은 후배들의 합격을 축하할 수 있음이 다행이었지만 자신은 자꾸 왜소해지는 것만 같았다. "세상의 웃음거리가 되고 있는 것이 부끄럽다." 분명 '그대들은 조정에서 바쁠 터인데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하며 깊은 자조에 젖어들었을 것이다. 그러면서 다시 떠돌았다.
사모의 길
남효온은 평소 존경하던 김종직이 성종 16년(1485) 정월 문관의 인사권을 행사하는 이조참판이 되자 무척 좋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얼마 후에 첨지중추부사로 물러앉자 무척 서운하여 「나를 읊는다」제7수에서
점필재 선생이 뜻을 얻었다지만 佔畢先生雖得志
참판에서 첨지중추부사로 물러앉았네 自從參判到僉知
하며, 아쉬움을 삭인 적도 있었다. 그러나 만나지는 못하였다.
남효온은 전라감사로 나간 김종직이 나주를 순시할 때 그를 처음 만났다. 성종 18년(1487) 섣달이었다. 김종직의 서(庶)처남으로 역관이지만 견문과 식견이 높고 문장이 뛰어나 당대의 선비와 교류가 잦은 조신(曺伸)이 소개하였다. 조신이 당대 인물과 사건을 기록한 『소문쇄록(謏聞鎖錄)』에 나온다.
다음은 남효온과 헤어지고 전주로 돌아간 김종직의 「추강에게 보낸다」다.
금성관에서 섣달 그믐밤을 지새며 守歲錦官城
가느다란 버들가지 강가에 천막을 쳐놓고 시도 읊었지 吟詩細柳營
그대와는 회포가 서로 통하여 同君襟抱暢
날을 이어가며 맑은 담소를 나누었지 連日笑談淸
그러다가 새해가 열리자 언뜻 이별을 하여 滄海悠然別
어느덧 봄이 왔으나 꽃피는 경치에도 마음은 텅 빈 듯 韶華空復情
완산에 꿀맛 나는 술이 남았는지라 完山餘臘味
예형(禰衡)과 함께 기울이고 싶네 思與禰衡傾
사람들은 해마다 소망하는 바, 특히 부모에게 효도하고 임금에게 충성하고 싶지만 그렇지 못하고 섣달 그믐날이 되면 '오늘 밤이 없으면 아쉬운 한 해가 가지 않겠지' 하며 제야(除夜)라 하고, 혹은 '올해가 가지 않았으면' 하여 수세(守歲)라 한다. 두 사람은 나주의 객사 금성관(錦城館)에서 섣달 그믐밤을 함께 보냈던 것이다. 무슨 말을 나누었을까?
이때 김종직은 남효온에게서 '불사(拂士)' 즉 임금을 보필할 만한 어진 선비라는 인상을 받고 후한의 공융(孔融)이 20여 세나 아래인 예형(禰衡)을 어린 벗으로 삼은 것처럼 그렇게 대우한다는 뜻을 전했다. 이 시의 세주(細註)에 나오는데 무척이나 다정하다. 그러면서 '술이 있으니 전주의 감영으로 찾아오라'고 초대한 것이다.
남효온은 해남의 두륜산에 있었으므로 바로 갈 수 없었다. 그때 「감사 점필재 선생께 받들다」두 수에 고마움과 미안함을 담아 보냈는데, 이런 구절이 있다.
팥배나무 꽃 온 성에 가득하듯 棠梨花滿城
온 백성이 감사 어른 칭송합니다 萬口頌行營
절로 덕이 우러나와 충직하고 근실하심이 크더이다 德自忠勤大
마음은 비어 있고 희고 맑더이다 心因虛白淸
전라도 민심을 전하며 김종직의 허심탄회한 도덕심을 존경한다는 뜻을 전한 것이다. 해남은 팥배[棠梨]가 많아 당성(棠城)이라고도 불린다.
남효온은 김종직을 찾아 밀양까지 갔다. 해운대를 갔다 오는 길이었을 것이다. 영남루를 함께 올랐던 듯하다. 「밀양 영남루에서 점필재를 뵙다」가 전한다.
시루봉 사시는 도사께서 푸른 소를 타고 오시니 甑峰道士下靑牛
하늘나라 신선이 걸치는 관대와 패옥이 즐비하다 紫府仙曹冠佩稠
점필재공이 천 년에 한 번 나올까 으뜸이시라면 千載一人金佔畢
영남루는 백 년을 이어온 멋진 절경이더라 百年勝地嶺南樓
영남루와 김종직을 극묘하게 대비시켰다. 겉치레로 들리지 않는다. 남효온은 그럴 수 있는 재주가 없었다.
경상남도 밀양시 내일동 소재. 보물 제147호. 본래 절이 있었는데 고려 공민왕대에 이곳에 처음 지었다. 진주 촉석루, 평양 부벽루와 함께 가장 유명한 누정의 하나이다. 주변의 경관과 비스름한 조화가 빼어나다. 신숙주가 영남루 보수 확장 공사를 기념하여 지은 「영남루기」에 "옛날은 다만 강산의 경치를 드러냈는데, 오늘은 강산으로 하여금 드넓고 탁 트인 모습의 아름다움을 독차지하지 못하게 하였다" 함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김종직은 자주 영남루를 찾았는데, 언젠가 「영남루 아래에 배를 띄우다(嶺南樓下泛舟)」를 남겼는데 "난간 밖의 맑은 강 만 이랑의 구름 아래/ 그림 같은 배가 물결을 넘어서니 주름살 무늬 생기는구나" 하였다. ⓒ최승훈 |
아름다워 차라리 눈이 시리다
남효온은 유랑 중에 수령이나 인근 사족과 사귀며 호의 어린 대접을 받곤 하였다. 어떤 때는 기문을 부탁받았다. 전라도 여산에서 조그만 개천가에 정자를 지은 주인이 작명과 기문을 부탁하자 이렇게 적었다
물은 천하에 가장 낮은 곳에 있으면서도 다른 것과 다투지 않으며, 또한 온갖 사물을 잘 비추어 아름답고 못생긴 모습을 절로 드러낸다. 그래서 견문이 높고 기꺼이 물러설 줄 아는 선비들은 물을 좋아한다. 「감정기(鑑亭記)」
마음은 명경지수(明鏡止水)와 같다는 평소 생각을 풀었던 것이다. 그리고 물을 보며 세상을 살펴야 한다는 뜻으로 정자를 '감정(鑑亭)'이라고 하였다. 작은 개천은 감계(鑑溪)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옛사람의 자연과 하나가 되며 풍광에 이름을 보태는 것이 이러하였다.
장흥 객사의 별관에 한참 머물며 천관산을 찾고 나루터를 기웃거리며 이리저리 노닐었을 때였다. 전 사복시 판관(司僕寺 判官) 윤구(尹遘), 전 함열 현감 이침(李琛) 같은 연로한 사족과 장흥 부사의 젊은 자제들과 어울려 가지산에서 발원하는 수령천변(遂寧川邊)에서 낚시를 하며 술을 마시기도 하였다. 그들이 고기를 낚던 바위를 조대(釣臺)라 이름 짓고 글을 부탁하자, '건곤이 정해지며 만물이 나왔으니 우리가 그 혜택을 입었다' 하면서 적었다. 요약하면 이렇다.
지금 비록 강호에서 낚시를 하며 세월을 보내지만, 하늘이 만물을 낳고 기르며 거두고 감추는 생장수장(生長收藏)이나 용행사장(用行舍藏)의 의리는 피할 수 없는 만큼 항상 임금을 생각하고 나라를 근심하여야 한다. 훗날 천은(天恩)이 내리면 그때는 짚신 벗고 낚싯줄을 감고 조정에 나가서 임금을 제대로 보필하여야 한다. 「조대기((釣臺記)」
정녕 자신은 세상과 나라를 잊은 듯 살지만 강호의 벗들은 조정에 나가 임금을 제대로 보필하는 자세와 마음을 키웠으면 하였다. 도성을 벗어난 풍광에 마음의 앙금이 씻겨감인가?
성종 18년(1487) 11월 해운대에 들린 적이 있었다. 모친의 당부로 선대가 물려준 전장을 살피고 아픈 몸도 요양할 겸 의령에 있을 때에 현감이 극진히 대우하며 마련한 연회에 초대를 받은 것이다. 창원 월영대(月影臺), 양산 임경대(臨鏡臺), 지리산 청학동, 가야산 해인사 등에 숨었던 최치원이 한때를 머물며 '해운대'라고 이름 붙인 사실을 알고 있던 터여서 반갑고 고마운 마음으로 따라나섰다. 한껏 풍류를 즐기며 시문을 주고받고 한 권 시첩으로 묶었는데, 서문은 남효온 차지였다. 시대의 불운을 잊고자 자신을 숨겼던 최치원의 서사에 빨려 들어갔다.
검은 파도가 하늘에 닿으니 경계가 눈에 들어오지 않구나. 해 뜨는 곳이 좌우로 흔들리다 잠기면, 물고기 거북이 상어 고래 앞뒤로 뛰어오르니 황홀하구나. 마침내 혼탁한 세상 티끌을 씻은 듯, 매미가 껍질을 벗고 나오듯 하다. 「해운대유람기서문」
해운대의 풍광에 감격한 것이다. 그러나 자신은 정녕 최치원처럼 될 수 없었다. '모친이 나를 믿고 사시고 처자가 나를 쳐다보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것만이 아니었다. '세도가 쇠퇴하면 강산이라도 마음을 다스리는 데 도움이 될 수 없다.' 바다에 피는 구름을 타고 어지러운 세상을 벗어나고 싶지만 그리할 수 없음에 따른 스스로의 위안이면서, 아름다운 강산을 진정 사랑하고 즐거워하는 세상을 만나고 싶다는 비원이 솟구쳤을 것이다. 그래도 해운대는 그동안 찌든 때가 절로 씻기는 듯 시원한 공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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