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의 道'가 도학정치의 큰 뜻을 펴다 비운의 죽음을 맞이한 정암 조광조의 삶을 소설로 재구성한 것이라면, 새 연재 '사림열전'은 조광조의 선배에 해당되는 김종직, 김시습, 남효온, 정여창, 김일손, 김굉필 등 조선 초기 사림들의 삶과 사상과 행적을 역사학자의 시선으로 정직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이 연재는 매주 3회(월, 수, 금요일: 단 이번 주는 수, 목, 금요일) 게재됩니다. <편집자>
연재를 시작하며
우리는 조광조와 기묘사림의 혁신정치, 서경덕과 이언적 이황과 조식, 그리고 이이 등이 찾아낸 정치이론과 철학사상을 자부하며 16세기를 '사림의 시대' 혹은 '조선의 르네상스'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나 16세기에 활짝 핀 학문과 정치가 15세기 후반 등장한 전기 사림파의 치열한 삶과 진지한 성찰이 없었다면 결코 가능하지 않았다는 분명한 사실을 간과해 왔다. 전기 사림파의 사상 문화적 성취를 세조의 부국강병책 추진과 성종의 제도문물의 완비, 그리고 연산군의 폭압정치에 가두어 놓고 전기 사림을 16세기 사림의 전사(前史) 수준으로 가볍게 취급하여 왔던 것이다. 그러나 16세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척박하였던 15세기 후반의 역사현실을 살피면 전기 사림의 자취를 결코 16세기 사림의 시대의 밑그림으로만 여길 수는 없다.
우선 사림파가 상대한 훈구파라고 통칭되는 기득권 세력의 성격이 달랐다. 15세기 후반 훈구파의 권력은 세조의 정변과 찬탈을 끌어낸 만큼 그 장벽은 높고도 두터웠다. 그러나 16세기 기성 권력은 신진세력과 경쟁해야 할 정도로 권위와 역량을 상실하기 시작하였다. 궁중정치의 음모와 배신이 기승을 부린 것도 이 때문이었다. 또한 당시 정치의 주요 영역인 언론과 기록, 학술과 문장이 처한 여건이 너무 달랐다. 결코 공개적으로 건드릴 수 없는 세조 찬탈이라는 금기의 족쇄에 감긴 15세기 후반이야 말로 억압과 쇠락의 시대로서 말과 글이 비장할 수밖에 없었고 또한 희망을 향한 교류와 소통은 먹빛으로 남았다. 이에 비하여 죽음과 맞바꾼 도전의 불꽃을 등대삼아 길을 살핀 16세기는 여러 면에서 해빙과 확산의 세월이었다.
이러한 역사현실의 차이야말로 16세기적 채색이 아니라 15세기라는 화폭에 선구적 사림의 삶과 생각을 담아야 하는 당위성인 것이다. 김종직의 '외로운 풍자와 교학활동', 김시습의 '버림의 세월과 철학적 포효(咆哮)'의 진의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 남효온의 '유랑과 과거청산의 외침', 김일손의 '진실기록과 개혁구상'의 목표는 무엇일까? 정여창의 '낮은 곳에서 찾아낸 신민(新民)의 길'과 김굉필의 '침묵과 함께 한 소통의 꿈'은 어디를 향하고 있었는가? 이들의 문장은 진실을 바탕으로 화해를 모색하는 역사투쟁 혹은 기억운동이었다. 또한 이들의 공부는 세상과 함께 착하고 싶었던 철학적 성찰이었다.
더구나 15세기 후반 양심의 시야는 미래를 향하여 곧추 열려있었다. 왕도정치에의 소망은 컸고 문명의 나라를 향한 열정은 뜨거웠던 것이다. 그만큼 고뇌와 침묵은 무겁고 깊었다. 그러나 이러한 풍경은 먹빛 침묵으로 남아 있어 아련할 따름이다. 그동안 이들의 삶과 생각에 감춰진 깊은 뜻과 의미를 살피지 못한 까닭이 여기에 있었다.
오늘날 이재(理財)와 기교(技巧)로 이름을 남긴 사람들은 말한다. '용서하되 잊지는 말고, 진실을 밝히되 화해를 해쳐서는 안 된다.' 그러나 용서와 화해는 진실이 밝혀지고, 속죄와 반성이 있은 다음에야 비로소 가능하다. 진실규명은 과거를 향한 것이 아닌 것이다. 오늘날 15세기 후반 세조의 찬탈의 어두운 역사에 대한 노래와 기록의 정신이 소중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민주화와 산업화를 구가할 줄만 알고, 지난 세기 분단과 전쟁 그리고 독재의 무거운 세월 속에서 자기희생의 길을 밟아온 양심의 궤적이 잊고 있음은 아닌지? 21세기 선진화와 세계화가 한껏 허울뿐인 구호가 아니라면 지난 세기 먹빛 같은 밑그림에 감춰진 희생과 상흔, 그리고 침묵의 사연까지 기억하며 소중하게 생각하였으면 하는 간절한 소망을 담아 글을 시작한다. <필자>
김종직(金宗直), 경계인을 위한 변명
연보
자 효관(孝盥)·계온(季昷). 호 점필재(佔畢齋) 본관 선산(善山)
1431년(세종 13) 밀양 출생
1446년(세종 28) 16세 소과 실패
1453년(단종 1) 23세 진사
1456년(세조 2) 정월 문과 낙방. 3월 부친 별세
1457년(세조 3) 27세,「조의제문」 지음
1459년(세조 5) 29세, 문과급제, 승문원 부정자
1464년(세조 10) 잡학 반대로 투옥, 장형(杖刑)
1465년(세조 11) 경상도 병마평사로 복직. 『경상도지도지』편찬
1470년(성종 1) 40세, 함양군수
1471년(성종 2) 유자광 현판 사건
1476년(성종 7) 46세 선산부사
1479년(성종 10) 10월 모친 박씨 별세
1482년(성종 13) 52세, 부인상. 홍문관 응교로 복직
1484년(성종 15) 좌부승지와 도승지
1485년(성종 16) 55세, 이조참판. 문씨 재취
1486년(성종 17) 예문관 제학. 『동국여지승람』수정 보완.
1487년(성종 18) 5월 전라도관찰사
1488년(성종 19) 홍문관 제학(5월). 한성부 좌윤(10월)
1489년(성종 20) 59세, 형조판서(2월) 및 지중추부사(8월). 밀양 귀향
1492년(성종 23) 62세, 4월 타계
프롤로그
김종직은 단종의 죽음을 은유적으로 노래한 「조의제문」으로 한 세상을 격동시켰고, 유향소 복설과 같은 정책을 통하여 지방의 안정과 발전을 추구하였으며, 『동국여지승람』의 수정보완 등을 통하여 국가적 학술편찬사업의 궤도를 일정하게 바꾸어놓았다. 그래서 '사림파의 종장'이라고 한다. 이러한 칭호는 연산군에 의하여 희생된 제자집단의 학문적, 정치적 후예가 훗날 사림정치의 주역이 되었다는 사실까지 감안하면 무리가 아니다. 그러나 예전에는 아니었다. 16세기 사림의 거두인 이황과 조식조차도 그를 '도학보다는 문장에 치우친 학자'로 규정했었다.
이 글은 '김종직론'의 변천을 추적하려는 것이 아니다. 훗날의 평가가 어떠한가가 아니라, 김종직이 권력집단과 어떻게 관계를 설정하였고, 자신의 몫을 어디에서 찾았으며, 내일을 위하여 어떤 구실을 자임하였는지를 살피고 싶다. 그러자면 시문에 담긴 희망과 번민, 개인적 성취와 좌절을 '15세기 후반의 백지'에 명암 처리하듯 소묘(素描)해야 될 것 같다. 당대 시문은 일상의 기록이며, 타인과의 소통이며 대화였던 것이다. 동시에 타인과 나누고 싶지 않고 세상과 드러낼 수 없는 독백이기도 하였다.
김종직에 다가서고자 함에 있어서 '문인인가, 도학자인가' 혹은 '사장학인가 성리학인가' 등의 경계 긋기로 집착하면 실로 견디기 힘든 미묘한 성가심만 더해진다. 그의 삶과 문장은 쉽게 읽을 수 없고 한마디로 규정할 수 없는 복잡한 면이 있었던 것이다. 그만큼 기량과 처신은 독특하였다. 그래도 한마디를 보탠다면 김종직은 자신이 의도하였건 아니건, 공포와 쇠락의 시대에 대항하는 풍자문학의 전형을 보여주었고, 한 시대의 학문권력을 흔들어 놓았으며, 어두운 역사의 상흔을 치유하려는 의식전환의 현장에 귀중한 씨앗을 뿌렸다는 사실이다.
1. 무엇을 노래하지 못하랴
* 그림이 있는 시
김종직은 이천 수가 넘는 시를 남긴 대문호였다. 조선후기 뛰어난 문인으로 문예비평의 신경지를 열었던 신흠(申欽)과 홍만종(洪萬宗)이 이구동성으로 '우리나라의 시인의 으뜸에 김종직이 있다는 것은 결코 과장이나 헛말이 아니다' 하였다. 또한 '「조의제문」을 지었으면 세조 치세에 벼슬에 나가지 않았어야 한다'고 단정한 허균(許筠)조차도 시문의 경지만은 높이 평가하였다. "남은 시편의 향내를 엎드려 쫓아가도, 주옥같은 솜씨를 어찌 계승할 수 있겠는가." 허균은「호민론(豪民論)」등에 세상변화의 열망을 담았기도 하였지만, 허난설헌(許蘭雪軒)의 아우답게 빼어난 시인이며 격조 높은 시평을 남긴 평론가였다.
김종직의 문명(文名)은 일찍부터 알려졌다. 세종 28년(1446) 소과에 실패하고 한강을 건너며 지은 시가 「점필재연보」에 전한다.
눈 속의 찬 매화와 비 온 뒤의 산 경치 雪裏寒梅雨後山
구경하긴 쉬우나 그림으로 그리긴 어렵다오 看時容易畫時難
일찍이 세상사람 눈에 들지 않을 줄 알았으니 早知不入時人眼
차라리 연지 가져다 모란을 그려야겠네 寧把臙脂寫牧丹
도학적 취향의 상징인 설산(雪山)의 차가운 매화나 비 개인 다음의 청량함을 힘들게 표현하려 들지 않고, 사람들이 좋아하는 부귀를 상징하는 모란이나 예쁘게 그려야 하겠다, 한 것이다. 언뜻 세상이 좋아하는 문장이 무엇인지 눈치 챘다는 듯 읽히지만 문장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였음을 보여준다. 16세 때였다.
김종직은 정경 묘사가 탁월한 시를 많이 남겼다. 다음은 「국화 핀 뜰의 가을날」 전반부다.
이슬 내려 시리도록 깨끗한 하늘에 뜬구름도 없는데 瑤空露洗浮雲滅
휘영청 하얀 달이 뜰 안을 비추네 滉瀁中庭流晧月
옷을 벗고 그림자 보며 금빛 꽃을 따노라니 褰衣對影掇金英
문득 맑은 향내 살갗에 스며 뼛속에 닿는구나 便覺淸香差肌骨
가을 달빛이 비추는 뜰에서 술을 담으려고 국화를 따는구나,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선산부사 때였을 것이다. 고을을 가로질러 낙동강을 만나는 보천탄(寶泉灘)에 나갔다가 머리는 희고 청자 빛깔 털이 고운 가마우지를 보았던 모양이다. 즉흥으로 「보천탄을 노래하다」에 감회를 풀었는데 첫 번째다.
복사꽃 흘러가는 강물 몇 자나 높아졌는지 桃花浪高幾尺許
멋대로 생긴 바위 머리가 어디에 있는지 狠石沒頂不知處
짝지어 놀던 가마우지도 옛 터전을 잃어버렸나 兩兩鸕鶿失舊磯
입에는 물고기 문 채 왕골 숲으로 들어가네 御魚却入芙蒲去
고기를 잡은 가마우지가 복사꽃에 취하여 보금자리를 잃었다는 것이다. 한 폭의 풍경화나 다름없다. 그래서 당대에 이미 '시 속에 그림이 있다[詩中如畵]' 혹은 '그림같이 풍경을 그린다[卽景如畵]'는 평가가 있었다. 그러나 매양 이와 같지 않았다.
* 서사(敍寫)에 감춘 격정
『선산지도(善山地圖)』에 적은 시에 보천탄을 다룬 작품이 있다.
보천탄에 장사하는 배가 모여드니 寶泉灘上集商帆
고을 사람은 온통 소금밥만 먹고 있나 千室人人食有鹽
누가 살찐 부자한테 십일세만 거두라 할 수 있을까 誰要脂膏營什一
옛날에도 호장과 향리는 청렴한 사람 드물었지 古來長吏罕能廉
여기에서 보천탄은 한가로운 서정의 공간이 아니라 이익을 뺏고 손해를 보는 삶의 현장이었다. 부자들의 보이지 않는 욕심까지 들추고 있다. 이를 본 선산의 토호와 향리는 화들짝 놀라 뜨끔하였을 것이다. 김종직 시문의 현장성(現場性)이었다.
이러한 특장은 민생의 묘사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경상도병마사의 부관 격인 평사로 부임하며 영남 내륙의 세곡을 남한강 뱃길을 통해 한양으로 보내는 현장을 찾았을 때였다. 이때 감상을 오언고시(五言古詩) 「가흥참(可興站)」에 담았는데,
북쪽 사람은 호화를 다투어 北人鬪豪華
남쪽 사람은 기름과 피가 빨려도 달게 받네 南人脂血甘
하다가, 세곡을 취급하는 아전의 질탕한 놀음을 풀었다.
아전들은 어찌 그리도 탐학한가 吏胥何婪婪
작은 시장에 모여 생선을 가늘게 회쳐서 小市魚欲縷
띳집 주막에 뜨물처럼 하얀 술 마련하여 놓고 茅店酒如泔
돈 거두어 창녀를 불러대는구나 醵錢喚遊女
부정으로 쉽게 벌어서 술과 여자에 아낌없이 퍼붓는 모습이 너무나 생생하다. 그리고 이렇게 맺었다. "남쪽 사람 얼굴을 찡그리는데, 북쪽 사람 중에서 누가 이를 알까." 탄식과 희열, 고통과 안일의 극명한 대비였다.
사백 리, 수십 고을을 휘돌아 내리는 낙동강의 나루터에도 고통은 즐비하였다.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민요풍 「낙동강 노래」일부다.
백성의 두레박은 이미 텅 비고 도토리도 없는데 甖已罄橡栗空
강가에서는 노래 부르며 살찐 소를 망치로 내리치누나 江干歌吹椎肥牛
유성처럼 오고 가는 벼슬아치들은 皇華使者如流星
길가에 죽은 해골이 누구인가도 묻지를 않네 道傍髑髏誰問名
무역과 조세징수 등으로 이익을 차지하는 상인과 벼슬아치 때문에 낙동강 나루터 곳곳이 죽어가는 난민으로 넘쳐난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기록보다 더 무서운 세밀한 들춤이었다. 그러나 온통 드러내지는 않았다.
* 산하를 온통 들추리라
김종직은 경상도 평사로서 경주에 들어가면서 당나라에 보내는 외교문서를 도맡아 짓고 삼국전쟁이 끝난 후에는 설총과 함께 태학에서 후진을 양성한 강수(强首)를 생각하며 읊은 적이 있었다. "강수의 사당 찾아 신령에 애걸하지 않고, 이 산하를 온통 나의 시가 노래하리라." 자신은 이미 지방으로 전출된 처지가 되어 강수와 같은 위업을 이루기가 어렵게 되었지만 그래도 산하를 드러내는 글만큼은 뒤지고 싶지 않다는 각오를 밝힌 것이다. 그만큼 김종직은 국토와 역사, 인물과 전설을 소재로 한 영사시(詠史詩)나 회고시(懷古詩)를 많이 남겼다.
경상도 평사로 가면서 경기도 성환역에서 제주도 공물 주인을 만나 물산과 풍속을 듣고 「탁라가(乇羅歌)」열네 수에 담았는데, 다음은 열한 번째다.
여염집 자제도 향교에 드나들며 閭閻子弟游庠序
학문을 익혀 인재가 많아지니 즐거운지고 絃誦而今樂有多
큰 바다로 어찌 지맥까지 끊겼으리요 滄海何曾斷地脈
지금은 빼어난 인재가 간혹 문과에도 오른다오 翹材往往擢巍科
먼 바다, 섬 지방에 문물과 예악이 있고 인재가 일어나니 반가웠던 것이다. 「동도악부(東都樂府)」는 신라의 설화와 민담을 노래하였는데, 다음은 열녀가 망부석이 된 현장 〈치술령(鵄述嶺)〉후반부다.
이별하고 소식 끊어진 지 너무 오래라 音耗斷長別離
죽은들 산들 어찌 서로 만날 날이 있으랴 死生寧有相見時
하늘에 부르짖다 차라리 망부석이 되었으니 呼天便化武昌石
천년 열녀의 기운이 하늘을 찌르는구려 烈氣千載干空碧
고구려로 잡혀간 왕제(王弟)를 데려온 박제상(朴堤上)이 다시 왜국의 인질로 간 왕자를 구하러 떠나자 그 아내는 시리도록 기나긴 기다림에 망부석이 되었다는 것이다. 민간의 전승을 듣고 『삼국유사』를 열심히 뒤적이며 지었을 것이다.
이렇듯 김종직은 민속과 민담, 전설과 구전을 듣고 보는 대로, 모르면 찾아 물어가며 틈이 나는 대로 노래하였다. 쉰일곱 살에 나간 전라감사 때에도 이러한 열정은 식지 않았다. 그래서 각처를 순방하다 늦가을 전주로 들어가면서, " 마을 사람들 관찰사가 괴이하겠지, 오로지 고을 풍속과 마을 노래를 묻고 있으니" 하였다. 차가운 바람 맞으면서도 풍속과 민요 등을 알고 싶고 듣고 싶어 하는 자신이 대견스러웠을 것이다.
전라감사 시절 김종직은 나주의 역사와 문화를 「금성곡(錦城曲)」 열세 수에 풀었는데, 다음은 네 번째이다.
비단 빨던 강가가 왕건의 국구 고장이라서 濯錦江邊舅氏鄕
흥룡사가 저토록 상서로운 빛을 품어내겠지 興龍寺裏藹祥光
지금도 부로들이 왕건의 뿌린 덕업을 사모하여 至今父老懷遺德
퉁소와 북 울려 추대왕을 즐겁게 하네 簫鼓歡娛皺大王
나주 지방에서 왕건의 삼한일통의 위업을 칭송하며 잊지 않고 있음을 노래한 것이다. 그러면서 나주 출신 장화왕후가 낳은 혜종을 얼굴이 얽은 '추대왕(皺大王)'이라 하였다. 왕건이 장화왕후가 지체 낮은 호족 출신이라서 첫 아들만을 보기 싫어 잠자리를 하다가 정액을 자리에 쏟았는데 왕후가 받아내 혜종의 얼굴에 자리 자국이 생겼다는 야담을 은근히 들춘 것이다. 혜종이 천연두에 걸려 얼굴이 얽었을 터이나 왕자가 많아 승계투쟁이 격렬한 상황에서 반대세력이 퍼트린 음해의 유언이 야담이 된 것이리라.
이렇듯 김종직은 역사와 문화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아낌없이 동원하며, 우리 산하에 스민 탄식과 소망, 사랑과 구원을 담았고 교훈을 찾았다. 이것은 정사(正史)에 지워진 기억의 기록이며 사연의 복원이었다.
필자 소개
이종범(李鍾範)은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사학과를 마치고 연세대학교 대학원 사학과에서 석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조선대학교 인문대학 사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대학의 박물관장을 겸임하고 있다.
그동안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사학과 파견교류교수, University of California, Los Angeles 객원교수를 지냈는데, 한동안 「한국근대 '면리자치(面里自治)'의 성장과 변질」「대한제국 말 일제의 조세수탈과 한국인의 저항」「1920년대 전남지방의 사회경제사정과 광주학생운동」「20세기 중반 농지개혁과 농촌사회변동-전남 구례군 사례 -」「5·18 항쟁 증언에 나타난 '기층민중'의 경험과 생활」등을 통하여 한국근현대 생활사를 탐구하였고, 근래에는 사상·문화사로 시야를 넓혀 「노촌(老村) 임상덕(林象德)의 학문과 시대인식」「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의 출처관과 정론」등을 발표하고, 최근에는 호남사림 8인의 일대기를 정리한 『사림열전1: 소쇄원의 바람소리』를 출간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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