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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학문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이종범의 사림열전] 김종직: 경계인을 위한 변명ㆍ⑦

실수와 비방

김종직은 학술과 문장에 관한 사업에는 열성을 보였지만 언론과 정책 등에는 그다지 나서지 않았다. 또한 결단하지 못하고 얼버무리기조차 하였다. 특히 인사문제를 다루는 이조참판이 힘들었다. 상급자의 의중을 고려하며 자신의 의중을 관철할 여지가 없음도 문제였지만, 능수능란한 편법을 그럴듯한 원칙을 내세워 포장할 줄을 알아야 하는데 김종직에게는 이런 능력이 없었다.

성종 16년(1485) 봄 공석 중인 동부승지를 추천할 때였다. 이조판서 이숭원(李崇元)이 세 사람을 적으면서 윤은로(尹殷老)를 맨 위에 올렸다. 김종직이 처음에는 반대의사를 전하였다. "중궁전의 인척으로 인망이 없는데 물의가 있을 것이다" 한 것이다. 이에 이숭원이 윤은로의 이름을 지우자, 이번에는 다시 말하였다. "이름을 이미 썼으니 다시 지울 것은 없는데, 영돈녕(領敦寧)이 들으면 나를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영돈녕은 폐비에 이어 중전에 오른 정현왕후(貞顯王后)의 생부 윤호(尹壕)를 말한다. 훈구파 계열의 사관이 김종직이 도승지로 발탁되던 날의 기사에 나중에 덧붙인 사평에 나온다. "김종직이 정론을 내고도 뜻이 확고하지 않아 권세에 아부하는 꼴이 되었으니 평소의 명망이 어디에 있는가?" 이 날의 사평에는 이런 구절도 있다.

김종직은 경상도 사람으로 널리 글을 보고 문장을 잘 지었으며 가르치기를 즐겼는데 그에게 수업한 자 중에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많아 조정에서 벼슬하는 경상도 선비들의 종장으로 추존을 받았는데 당시 사람들이 '경상선배당(慶尙先輩黨)'이라고 비평하였다.

『성종실록』 15년 8월 6일

김종직이 학문과 문장으로 후학을 끌어들여 '경상도선배당'을 결성하였다는 것이다. 악의적 비방이지만 김종직이 후진을 이끌려고 하였던 것은 사실인 만큼 전혀 근거는 없지 않다. 이 사론을 쓴 이승건(李承健)은 훗날 조광조(趙光祖) 등에 의하여 '착한 사람을 붕당으로 모함하였으니 관작을 삭탈하는 것은 물론 그 자손에게도 관직을 줄 수 없다'고 배척을 당했다. 실제 이승건은 김종직의 문인을 무고하여 억울하게 죽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무오사화 당시 함경도 관찰사로 재직하면서 이승건은 유배를 온 이종준(李宗準)이 지은 시 한 수를 보고 '시세에 대한 통분의 발로'라고 고발하여 이종준은 물론, 동행하던 종친 이총(李摠)의 일족까지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음모는 시작되었다

성종 16년(1485) 봄 조정은 유자광 복직문제로 일대 격론을 치렀다. 유자광은 '이시애의 난'으로 적개공신(敵愾功臣)이 되고 또 '남이의 옥사'로 익대공신(翊戴功臣)을 꿰차며 승승장구하다가 성종 9년(1478) 이후로 울분과 원망의 세월을 보내던 중이었다. 그럴 만하였다.

성종은 친정을 시작하면서 훈구대신의 힘을 다소나마 억제해보겠다며 연소기예(年少氣銳)한 왕실의 지친을 승정원에 배치하였다. 서원군(瑞原君)의 사위인 현석규(玄錫圭)와 보성군(寶城君)의 사위이며 아들 광재(光載)는 예종의 부마였던 임사홍(任士洪) 등이었다. 서원군과 보성군이 효령대군의 아들이었으니 두 사람은 효령대군의 손녀사위가 되고 사촌 동서(同壻)인 셈이다. 그런데도 사사건건 마찰하였는데 도승지인 현석규가 동부승지인 홍귀달(洪貴達)을 지나치게 욕설한 것을 빌미로 정면충돌하였다. 성종 8년(1477) 여름이었다. 이때 유자광이 임사홍을 편들면서 사간원까지 동원하여 현석규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처음에는 별탈이 없었다. 그러다가 이듬해 봄 종친 이심원(李深源)의 '세조 치세의 공신을 언제까지 등용할 수 없다'는 상소가 계기가 되어 유자광과 임사홍이 '붕당을 맺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후 두 사람은 오랜 동안 유배와 폐고를 당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때에 이르러 훈구대신들이 유자광의 복귀를 추진한 것이다. 무슨 생각이었을까? 틀림없이 세조의 '구(舊)'공신이 '신(新)'공신을 제압하려는 기미를 미리 헤아린 듯, 자신과 같이 '이시애 난'으로 부상한 '신(新)공신'인 남이(南怡)를 역모로 몰아세웠던 정도의 술수와 수완이라면 날이 갈수록 대립각을 세우며 세력을 키우는 신진사림을 제압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아니면 유자광의 심심치 않는 선물공세에 끌린 것인지…

언론 삼사에 포진한 대부분의 신진사림은 유자광을 반대하였다. 김종직은 난감하였다. 이조판서는 물론 참의(參議)까지 '공신을 종신토록 서용하지 않을 수 없다'고 의견을 모은 이상 반대만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김종직은 유자광 복직에 동의하는 대신 하나의 제안을 보탰다. "학문을 좋아하고 유자의 도(道)로 몸을 다스린 이심원이 조부를 능욕하였을 리가 없다." 이심원을 구제하고 싶었던 것이다.

당시 이심원은 '조부 능욕'의 오명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이심원의 조부가 바로 임사홍을 사위로 삼은 보성군이었다. 따라서 임사홍은 이심원의 고모부였다.

이심원은 일찍 세상을 떠난 태종의 넷째 아들 성녕대군(誠寧大君)의 봉사손이 되려고 한 조부의 뜻에 호응하지 않았고, 고모부의 간사함을 성종에게 알려 곤경에 빠뜨렸다는 이유로 조부는 물론 부친에게 심하게 질책을 당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반발하다가 '불효불목(不孝不睦)'의 죄목에 걸려들었던 것이다. 이후로 이심원은 오래 유배를 당하고 한동안 도성에도 들어오지 못하였으며 당연히 승계할 수 있는 종친직도 받지 못한 처지였던 것이다.

성종은 김종직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녹녹하지 않았다. 유자광의 서용(敍用)이라는 목적을 달성한 훈구대신은 사헌부 사간원에 재직하는 자파 언관을 동원하여 '이심원 불가'를 외치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성종도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다.

김종직은 실로 난처하였다. 유자광의 등장을 반대하지 않음으로써 훈구대신의 노회한 전술에 당한 꼴이 되었던 것이다.

제자의 비판

김종직은 이조참판이 되면서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를 겸직하였다. 동지경연사는 경전을 읽고 해석하는 직임을 넘어선, 언제든지 임금에게 주요 정책과 사안을 건의할 수 있는 특별한 권위가 부여되는 자리였다. 더구나 성종은 아침 경연만이 아니라 낮에도 참석하여 주기를 요청하였고, 황금으로 도색한 좋은 관대(冠帶)까지 하사하였다.

김종직은 이조참판을 떠나서도 동지경연사를 유지하였다. 성종이 그만큼 신뢰하여 맡긴 것이다. 그런데 김종직은 이 자리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였다. 학술 자문 등을 제외하면 정책 건의나 시국 진단 등의 언론을 펼치지 않았던 것이다. 김종직의 졸기에 나온다.

경연당상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좀처럼 건의하는 일이 없어 명망이 조금 감소되었다.
『성종실록』23년 8월 19일

함양 출신으로 일찍 제자가 된 표연말도 김종직을 위한 「행장」에서 인정하였다. "조정에서 큰 의론을 세우지 못하고 큰 정책을 진술하지 못하였다는 의견들이 있었다."

일부 제자들은 못마땅하였다. 스승이 시류에 안주하지 않는가, 의심을 품었고 일부는 직접 비판하였다. 특히 김종직이 모친 상중일 때 찾아와 배운 적이 있던 홍유손(洪裕孫)이 신랄하였다. "무엇 때문에 남의 벼슬과 녹을 헛되이 받고 계십니까. 지금 학자들은 불교나 노장학을 미워하지 않은 바 없으나 실행에 있어서 불노(佛老)를 벗어난 자는 하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행동을 둥글게 하고 모난 것을 싫어하는 것이 노자이며, 혼자만 행하고 남을 구휼하지 못하는 것이 불교인 때문입니다." 남효온의 『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에 전한다.

김종직은 넌더리를 쳤다. "홍유손은 속이는 자이다." 한때 밀양에 왔을 때 반가워 "이 사람은 안자(顔子)가 즐겨한 바를 일찍이 본 사람이다" 하였고, 떠나감에 아쉬워 "좋아한 것이 세속과 특별히 다르고, 근원을 찾았으니 깊은 조예 있겠네" 하였기에 배반감은 더욱 깊었을 것이다.

홍유손은 남양의 향리 출신이었지만, 학문이 높아 향역을 면제받자 김종직을 찾았고 또한 한동안 지리산에도 공부하였는데, 김시습을 자주 찾았다. 그러나 남효온 등과 같이 거침없이 세상을 비판하였다는 것 때문에 다시 향역에 복무해야 하는 처지로 떨어졌다.

홍유손이 직설적으로 비판하였다면 함양에서 처음 찾은 제자 김굉필은 은근하였다. 김종직도 얼버무리지 않을 수 없었다. "벼슬하는 것은 나의 뜻이 아니므로 건의하고 싶지 않다." 허균의 『성소복부고(惺所覆瓿藁)』 「김종직론」에 전하는데 상세한 사실은 김굉필 편에서 다룬다.

김종직은 왜 그토록 건의하는 바가 없이 묵묵하였을까? 이이가 전하는 일화가 있다.

김종직이 조용히 "성삼문은 충신입니다" 하였는데 임금의 얼굴빛이 변하였다. 김종직이 다시 간절하게 "만일 변이 있으면 마땅히 성삼문이 되겠습니다" 말하자 그때 비로소 풀어졌다.

『석담일기(石潭日記)』선조 9년 6월조

만약 김종직이 성삼문을 충신이라고 말하였다면 세조의 공신과 그 후예들이 온 나라를 움켜쥐고 있던 시절에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독대 수준에서나 가능하였을 발언이다. 만약 사실이라면 김종직은 '아아, 아직 때가 아니구나' 하며 더욱 몸을 사렸을 것인데, 이이가 어디에서 출처 삼았는가를 말하지 않았으니 아쉬울 뿐이다.

늦장가

김종직은 항상 곤혹스러웠다. 그래도 위안은 있었다. 쉰다섯에 새장가를 든 것이다. 신부는 합천 야로현에 상당한 전장(田莊)을 소유한 문씨가(文氏家)의 열여덟 살 규수였다. 그동안 자식도 없는 홀아비 생활이 힘들던 차에 다행이었다. "서울에 와서는 자못 외로워서, 환어(鰥魚)처럼 밤잠을 이루지 못하네" 하였다. 환어는 표정이 슬픈 물고기를 말한다. 남산 아래 집을 얻으면서 지은 「대구부사 임수창(林壽昌)의 집으로 이사하다」에 나온다. 여기에서 김종직은 자주 집을 옮겨 다니는 셋집 생활의 불편도 털어놓았다. 이렇게 되어 있다.

성중에 있는 몇몇 집들은 城中幾屋廬
다 내가 머물러 살았던 집인데 盡我居停人
때로는 몰아 내쫓김을 당하여 有時被驅逐
동서로 자주 떠돌아다녔네 東西漂轉頻


예나 지금이나 벼슬과 학식이 있고 또한 명망을 얻어도 집 없는 서러움은 별반 다르지 않는 모양이다. 그런데 새장가를 가니 이사를 다니지 않아도 좋았다. 문씨가는 명례방에 경저(京邸)를 갖추고 있었다.

창경궁에서 인수대비의 탄신 축하연이 열리던 날, 몸이 불편하여 집에 있을 때였다. 으레 나오는 술이 힘겨웠는지 모른다. 젊은 아내가 국화주를 조금 내어놓았다. 「중양절에 홀로 앉아 무료한데 처가 국화주 석 잔을 권하다」에 정감을 담았다. 후반부다.

아내는 참으로 아름다운 여사네 內子眞佳士
노란 꽃향기는 또한 나라에서 으뜸이구나 黃花亦國香
빙그레 한 번 미소 지으며 宛然成一笑
울타리 밑에서 석 잔 술을 따라놓네그려 蘺下罄三觴


젊은 신부는 운명인가 하며 시집은 왔지만 남편이 어렵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런데도 남과 같은 부정(夫情)이 그리워 살포시 다가서는 모습이 담장에 비친다. 그러다 뜻밖에 아들까지 얻었다. 「7월 22일 기쁨을 적다」에 감흥을 풀었다. "꽃을 보아도 흐릿하고 이빨까지 빠지는 나이에 이런 경사가 있는가." 다음은 후반이다.

대를 잇는 데에는 어미의 귀천을 따지지만 繼序唯論母貴賤
이름 떨치는 것은 자식이 똑똑한가 아닌가에 있지 揚名正系子賢愚
훗날 봉양하는 효도를 누구에게 책임을 지우랴 他年反哺將誰責
나보다 나은 아이 되었으면 하며 명주를 어루만질 뿐 且弄明珠獨自娛


'이제 나에게도 후사가 있다' 하는 안도감에 가슴을 쓸어내리는 느낌을 솔직히 적었다.

전라감사가 되어 처가의 본관인 남평(南平)을 지날 때였다. 문득 고려 무인정권에 대항하였던 명신 문극겸(文克謙)이 생각났다. 「문극겸」다섯 수를 읊었는데, 세 번째 후반이다.

빛나는 명성은 멀리 내려오는데 烈烈聲名遠
오래된 보첩은 어둡기만 하구나 悠悠譜諜昏
누가 맨 먼저 동으로 이사를 하여 何人首東徙
대야촌에 자리를 잡았을까 漂泊大耶村


문극겸의 명성은 지금까지 쟁쟁하지만 후손의 사적이 지금 희미한데, 처가는 언제 합천 가야산 아래 대야촌에 뿌리내렸을까 한 것이다. 객지를 순시하며 젊은 부인 생각이 간절하여 지었을 것이다.

유자광이 달려오다

『동국여지승람』의 증보사업을 마무리한 김종직은 전라감사로 나갔다. 예문관 대제학에 오르지 못한 이상 마땅한 직책이 없기도 하였지만, 판서가 되기 전에 한 번은 거쳐야 하는 자리였다. 처음에는 경기감사로 보임되었지만 사양하고 자원하다시피 전라도로 갔다. 훈구파의 견제와 배척은 물론이고, 일부 제자들의 서운한 비판을 피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전라도 생활 1년은 도피가 주는 활력의 시절이었다. 전라도의 산하와 역사, 낯선 풍광과 전설을 시로 남겼다. 구경하고 싶은 풍물도 많았다. 굴비 생산으로 유명한 법성포에서는 '해마다 3, 4월이 되면 여러 도의 상선이 이곳에 모여 조기를 잡아 햇볕에 말리는데 서봉 아래에서 봉우리까지 발 디딜 틈이 없다'는 말을 들었다. 조기는 법성포 앞 칠산 바다에서 나지만 여러 지방의 상인이 모여서 잡고 굴비로 가공한다는 것이다. 그런 장관이 어디 있겠나 싶어 "비단 같은 봄날 몽땅 꽃피는 날이 오면, 산을 덮는 굴비가 얼마나 많은지 보러 와야지" 하였다.
▲ 학사루(學士樓), 경남 함양군 함양읍 운림리 소재. 본래 학사루는 조선시대 객사(客舍) 자리인 지금 함양초등학교 안에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숙종 18년(1692)에 중건하였다가, 1979년 현 위치로 이전 복원하였다. 학사루는 통일신라시대 최치원이 함양태수로 있을 때 자주 올랐다 하여 유명하지만, 이곳에 걸린 유자광의 시판(詩板)을 김종직이 떼어낸 사건으로도 유명하다. ⓒ문화재청

옛적 신라에서 백제로 가는 언덕을 넘으면서는 성충을 만났다. 「고산 탄현에서 성충(成忠)을 생각하다」의 첫 번째이다.

대둔산 아래 세 겹의 고개가 있는데 大芚山下三重嶺
탄현이 중간에 서려 있어 적의 요충 이뤘으나 炭峴中蟠作敵衝
신라의 오만 군대가 용이하게 통과하니 五萬東兵容易過
부여의 왕업이 이내 헛일이 되어버렸네 扶餘王業旋成空


의자왕의 방종과 타락을 직간하다가 감옥에 갇힌 성충은 그래도 나라 생각에 바다를 타고 오는 당나라는 금강 하구에서 막고, 뭍으로 오는 신라는 탄현에서 차단하자 하였다가 그만 목숨까지 앗겼다. 결국 배수진을 펼칠 수 없는 너른 벌판 황산에서 맞섰던 계백의 산화와 더불어 백제도 멸망하였다.

그런데 불청객이 찾아왔다. 「장차 운봉을 가려고 하는데 유 무령(武靈)이 요천의 언덕에서 문후를 하다」란 시가 있는데 김종직이 남원에서 운봉으로 가는 길에 유자광이 마중을 나온 것이다. 무령은 유자광의 공신호이다.

그런데 이 시에 "한나절 동안 진솔하게 즐거운 놀이 하였으니, 훗날 한양에 가서라도 어찌 잊을까" 한 구절이 있는 것을 보면 유자광은 광한루에서 거나한 접대를 한 모양이다. 영광에서 태어난 유자광은 언제부턴가 남원 일대에 터를 잡았었다. 유자광의 묘가 지금도 남원에 있다.

얼마 후 유자광은 전주까지 찾아와서 밤늦게 술을 마시다 기별을 넣었다. 김종직은 「유무령이 밤에 취하여 정사성(鄭司成)댁으로 부르니 장난삼아 짓다」라는 답장으로 대신하며 가볍게 거절하였다.

전라감사가 끝나갈 즈음이었다. 이번에는 유자광이 요천(蓼川)에서 잡은 미꾸라지를 보냈다. 장수군 번암의 덕유산에서 발원하여 남원의 광한루 앞을 지나는 요천의 추어탕은 지금도 유명하다. 「유무령이 남원에서 미꾸라지 오십 마리를 보내니 주필(走筆)로 사례하다」가 있다. 주필은 생각할 틈도 없이 빠른 붓놀림이니 선물을 받고 바로 보낸 답장인 것이다.

희고 가는 고기는 요천에 있어야 진짜 맛이 나는데 銀刀風味蓼川中
천 리나 되는데 진미를 보내니 상공에 짐이 되었구려 千里分珍荷相公
이내 광한루에서 술 마신 때가 생각나오 仍憶廣寒樓上飮
금 쟁반에 젓가락 놓으매 뱃속 기름이 텅 비었네 金盤放筯腹腴空


김종직은 함양군수로 부임하여 학사루(學士樓)에 유자광의 시가 걸려 있자 '자광이 누구길래, 감히 현판을 걸었단 말이냐' 한 것을 잊었던 것일까? 아니면 이렇게 하여 잊고 싶었던 것일까? 그러나 유자광은 결코 잊을 사람이 아니었다. 더구나 김종직의 문인들의 배척에는 더욱 참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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