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과 선산에 있을 때 인근의 많은 후학이 김종직의 문장과 학술의 명성을 듣고 찾아왔다. 김종직 역시 가르치는 일이 좋았고, 열심이었다. 부친이 자신을 가르친 방식대로 『소학』을 기본으로 읽어야 할 책의 순서를 정해주고 철저히 독파할 것을 요구하였다.
선산시절에는 김굉필을 비롯하여 곽승화(郭承華)·이승언(李承彦)·이철균(李鐵均)·주윤창(周允昌)·원개(元槩) 등이 가을에 있을 과거를 준비하며 향교에 한동안을 같이 머물렀던 적도 있었다. 김종직이 흐뭇하여 풍성한 식단을 준비하였던 듯하다. 「제자들에게 돼지머리를 주다」가 있다.
태수 흉중에는 짧은 창과 칼이 없는데 太守胸中無寸鐵
언제 돼지가 제 머리를 잃었을까 烏將軍已喪其元
아침부터 와서 경전 공부하던 손님들에게 묻겠노라 朝來爲問窮經客
저녁까지 잘게 썰어 몇 조각이나 소금 넣어 먹었는지 幾把齏鹽到日昏
마치 '그동안 풀냄새 나는 반찬뿐이었지만 오늘은 실컷 드시게' 하면서 고기도 잘게 썰어 먹어야 맛있듯이 과거에 들자면 경전도 세밀하게 파고들어야 한다, 은근히 압박하는 듯하다. 사실이었다. 이들을 한양으로 떠나며 이렇게 전송하였다. "장차 누가 급제를 하는지 눈 씻고 찾아보겠네."
김종직이 제자들의 과거급제를 갈망하였다. 천둥번개가 치는 날 과거를 보러 떠나는 제자에게 적어준 「유호인이 과거를 보러 서울에 가다」에 잘 나타나 있다.
천둥과 번개가 봄추위를 깔보았으니 雷公電母傲春寒
문득 천기가 절로 불완전한 게 두렵긴 하나 却恐天機不自完
온갖 벌레 깨기도 전에 먼저 두렵게 하니 百蟄未驚先虩虩
응당 전후로 진흙 속의 용을 일으키리라 也應前後起泥蟠
김종직은 기상의 불온함까지도 '그대를 깨우치려는 하늘의 보살핌이다' 한 것이다. 그리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지 덧붙였다. "자신도 과거를 볼 때 날씨가 좋지 않았으니 오히려 좋은 징조일 것이다." 여기에서 힘을 얻었음인가? 유호인은 바로 대과에 들었다. 성종 5년(1474)이었다.
김종직은 문벌이 빈약한 지방의 사족이 효도하고 출세하는 유일한 길이 과거라고 생각하였다. 「조의제문」을 사초에 실은 김일손(金馹孫)의 두 형이 과거에 합격하고 부모를 뵈러 고향 청도로 갈 때 적어준 글(「送金直長駿孫騏孫兄弟榮親靑道序」)에 나온다.
"사군자가 부모를 기쁘게 하는 것은 하나로 통하는 바는 아니지만 과거급제가 으뜸이다. 당송(唐宋)이래 향곡(鄕曲)에서 일어나 조정에 모습을 뚜렷이 드러내고 후세까지 공명(功名)과 사업(事業)으로 이름을 드리운 것은 모두 이 길을 거친 것이다."
김종직은 가르치는 제자가 과거에 뜻이 없거나 포기하면 무척 서운해 하였다. 효행으로 이름이 있고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라 상례를 치러 칭송을 받았던 안우(安遇)는 '벼슬할 마음이 없다'는 것 때문에 눈 밖에 났다. 남효온(南孝溫)의 『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에 나온다.
김종직은 가족 중에 합격자가 나오면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였다. 성종 8년(1477) 누님 아들 강백진(康伯珍)이 합격하자,
우리 집 혈맥으로 참으로 부끄럼 없어라 吾家自出眞無忝
나라의 과거제도를 정말로 빛냈다네 王國賓興正如輝
하였다. 자신의 친가 자질(子姪)중에도 문과 합격자가 나왔으면 하였다. 일찍이 문과에 들었지만 세조 6년(1460) 38세로 세상을 떠난 백형의 아들 치(緻)에 거는 기대는 컸다.
우리 집은 벼슬로 공경이 된 선조는 전혀 없었는데 등과(登科)는 내 선군(先君)과 선군의 재종형 되는 종리(從理), 그리고 네 아버님과 나뿐이다. 오호라 백 년이나 되는 세월에 급제가 겨우 네 사람이니 슬프다.
「답치서(答緻書)」
공경(公卿)에 오른 선조도 없고 문과 합격도 쉽지 않았던 집안을 일으키자면 더욱 분발하라는 당부 중에 나온 탄식이었다. 이렇게 적었다.
"내가 이전에 너의 여러 종형제들의 이름을 지을 적에 모두 사(絲)를 좇은 것은 바로 우리 가업(家業)을 이어서 막힘이 없이 영구하게 전해지기를 기대하는 마음이었다."
실과 같이 삶도 길고 벼슬도 있었으면 하여 이름에 '사(絲)'를 넣었다는 것이다. 사실이었다. 조카의 이름은 치(緻)·연(縯)·회(繪)·수(綬)·굉(紘)이었으며, 세 아들은 억(繶)·곤(緄)·담(紞)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정녕 자신의 자식들은 일찍이 세상을 버렸다.
처가 선산이 공동묘지가 되었다
김종직은 성종 5년(1474) 한 해에 두 아들과 첫 딸을 잃었다. 봄에 한창 재롱부릴 다섯 살 막내아들이 먼저 떠났다. 「목아를 애도하노라」로 슬픔을 삼켰다.
사랑하는 아들아 어찌 이리 바삐 가느냐 忽辭恩愛去何忙
다섯 살 생애가 부싯돌 불빛 같구나 五歲生涯石火光
어머니는 손자를 부르고 아내는 아들을 부르니 慈母喚孫妻喚子
지금이야말로 천지가 끝없이 아득하구나 此時天地極茫茫
그런데 여름에는 딸이 죽고 가을에는 첫째아들마저 세상을 버렸다. 남들이 십 년, 이십 년에 한 번 겪을 슬픔을 한 해에 연거푸 당하는 참담함에 몸서리쳤다. 벼슬을 그만둘 생각까지 하였다. 강희맹에게 하소연하기도 하였다.
"보잘 것 없는 집안에 흠집이 많아 흉화가 거듭되고 있습니다. 몇 달 사이 금릉의 처가 선산에 묘지가 다닥다닥 생겨나 공동묘지와 같이 되었습니다."
강희맹은 김종직이 믿고 의지하던 훈구대신으로 그의 아들 강구손(姜龜孫)을 가르치기도 하고, 강희맹이 함양의 화장사(花長寺) 아래에 가지고 있던 별장에서 하룻밤을 같이 지낸 적도 있었다. 첫 인연은 한참 거슬러 올라간다. 김종직이 백형을 따라 어느 절에 갔다가, 형 강희안과 같이 과거를 준비하던 강희맹을 만난 것이다. 관례를 치르기 전이었다.
김종직에게는 이제 둘째 아들밖에 없었다. 다행히 자신의 평생지기인 김맹성(金孟性)의 딸을 배필로 맞이하고 아들까지 보았다. 그러나 열일곱 살에 세상을 버렸다. 성종 12년(1481) 모친 상중이었다. 눈물마저 말랐을까? 「시월 열하루 곤(緄)이 죽어 일현에 우선 매장하다」다섯 수에 아들의 삶과 꿈을 담담하게 적었다. 다음은 아들의 최후였다.
너 한창 크게 아파 네 아이 생각할 적에 汝方大病念汝兒
네 아내 홀로 오자 너는 길이 한숨 쉬었지 汝妻獨來汝長噫
너는 네 자식 잃고 나는 너를 잃었으니 汝失汝子我失汝
부자간의 지극한 정을 너는 알 수 있으리 父子至情汝得知
아들은 병치레 중에 젖먹이를 잃었고, 바로 뒤따라간 것이다. 김종직은 얼마나 경황이 없었던지 손자의 죽음은 까마득히 잊었다. 며느리가 왔는데, 응당 품에 안겨 있어야 할 젖먹이가 없자 그제야 생각이 미쳤다. 처참한 심정이었다. 「곤의 처가 밀양으로 왔는데 아내가 손자를 안아보려고 하다가 월초에 요절하였음을 알았다」에 풀었다.
늙은 할미가 사향 노루 섞어 약을 만들어놓고 調麝硏砂有老姑
마중 나가서 우리 구슬 같은 손자 보지 못하다니 迎門不見掌中珠
하늘의 후박은 참으로 알기가 어려워라 天公薄厚眞難曉
봄에 깐 병아리도 여덟아홉은 아니더냐 春卵鷄窠八九雛
이제 김종직에게는 아무도 없었다. 오직 늙어가는 아내가 있었을 뿐. 그런데 아들 손자 모두 잃고 모친상을 치르면서 제 몸을 이기지 못하였을까? 부인마저 저승 사람이 되었다. 성종 13년(1482) 봄 상복을 벗고 조정에 나서려던 참이었다. 피를 토하듯 「망처에 바치는 제문」을 적어 내렸다. 4언 146구, 584자의 장문이었다. 그 일부이다.
적막해라 서편 방 그대 있던 곳이었네 寂廖西閤 君其在玆
옷 이불 대야 빗자루 그대 물건 그대로 있네 衣衾盥櫛 象君平時
음식과 기물도 편의대로 따랐건만 飮食供具 亦且隨宜
자식 낳은 수고에도 아이 하나 없으니 君昔劬勞 終無一兒
상복 입을 사람 누구인가 아아 모두 그만이로세 執喪者誰 嗚呼已而
겉치레가 아니었다. 상복을 입을 자식 하나 없는 채로 죽은 아내가 정녕 비통스러웠던 것이다. 어찌하나, 어찌하나 하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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