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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오사화와 「조의제문」

[이종범의 사림열전] 김종직: 경계인을 위한 변명ㆍ⑧

죽음 뒤에 오는 것

성종 20년(1489) 봄 김종직은 형조판서에 올랐다. 비록 육조 중에서는 서열이 낮다고 하지만, 세조 공신의 후예나 성종 즉위에 공을 세웠다는 좌리공신(佐理功臣), 왕실의 친인척이 판서 이상 고위직을 거의 독차지하던 상황에서 쉽게 넘볼 수 없는 자리였다.

이때 정국은 가파르게 돌아갔다. 정책의결 및 집행을 담당하는 의정부와 육조의 대신세력과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등 삼사(三司) 중심의 언관 세력이 첨예하게 대립한 것이다. 훈구대신과 신진사림의 격돌이었다. 성종도 무척 걱정하였다. "두 호랑이가 싸우는 형국이니 실로 좋지 못하다."

김종직은 노쇠하기도 하였지만,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긴박감을 견딜 수 없었다. 결국 얼마 후 사임하고 밀양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고통은 이때부터였다.

제자 김일손의 '늙고 병든 김종직에게 가마와 인부를 보내자'는 제안부터 도마에 올랐다. 김종직에게는 '본래 재산이 많은데 청빈을 가장하였다'는 비방이 쏟아졌고, 김일손은 '사사로운 은혜를 나라의 재물로 갚았다'고 탄핵을 받았다. 향리에서 사직서를 제출하고도 녹봉을 받았다는 사실이 문제가 되었다. 녹봉을 주자고 주장한 이칙(李則)은 추국을 당하였고, 김종직은 '문묵(文墨)을 일삼았을 뿐이지 언행이 일치하지 않는 인물이다'는 비난을 받았다. 훈구파 계열의 공세였다. 마치 신진사림이 훈구대신을 탄핵한 데에 따른 분풀이를 김종직에 퍼붓는 것과 같았다. 실로 고단한 최후의 나날이었다.

김종직의 곤혹스러움은 죽음으로도 그치지 않았다. 정2품 이상 대신에게 내리는 시호(諡號)를 제자 이원(李黿)이 '문충(文忠)'이라고 올리자 훈구파는 일제히 들고 일어났다. "김종직은 글을 잘한 사람에 지나지 않고, 후진을 인도하였다고 하지만 시문을 가르친 일밖에 없는데, 이원이 장난하듯 성현에나 해당될 문충으로 올렸으니 국문하자." 결국 시호는 '문간(文簡)'으로 개정되었다. 널리 듣고 많이 보았다는 '박문다견(博文多見)'과 공경으로 덕성을 함양하고 행실이 간략하다는 '거경행간(居敬行簡)'을 취한 것이다.

이런 정도는 약과였다. 6년 후 김종직은 유자광이 「조의제문」을 들춰내면서 관을 부수고 시신을 가르는 부관참시(剖棺斬屍)의 참화를 당하게 되었다.

그 시절 그 노래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단종의 처참한 최후를 분노한 풍자의 서사로 이해하고 국가의 정사인 실록에 실었던 제자는 김일손이었다. 성종 21년(1490) 3월 '노산군의 후사를 정하여 제사를 지낼 것'을 주장하고 작성한 사초에 실었다고 하는데, 김일손이 국청에 잡혀온 이튿날 공술에 나온다.

노산군의 시체를 숲 속에 던져버리고 한 달이 지나도 염습(斂襲)하는 자가 없어 까마귀와 솔개가 날아와서 쪼았는데 한 동자가 밤에 와서 시체를 짊어지고 달아났으니, 물에 던졌는지 불에 던졌는지 알 수가 없다. 김종직이 과거를 하기 전에 꿈속에서 보고 느낀 것이 있어 「조의제문」을 지어 충분(忠憤)을 부쳤다.

『연산군일기』 4년 7월 13일

또한 김종직의 낙향이나 사망에 즈음한 기사의 사초에서 권경유(權景裕)는

김종직의 「조의제문」은 충의가 격렬하여 보는 자가 눈물을 흘리는데 그에게 있어서 문장은 여사(餘事)에 지나지 않는다.

『연산군일기』 4년 7월 17일

하였고, 권오복(權五福)은

김종직의 「조의제문」은 간곡하고 측은하며 침착하고 비통하여 남이 말할 수 없는 바를 말하였으므로 사림 사이에서 전해 외었으니 세교(世敎)에 관계되므로 썩지 않게 오래 남겨둘 만하다.

『연산군일기』 4년 7월 19일

하였다. 이들 제자들은 「조의제문」을 어두운 과거를 기억하게 하는 도의와 기록의 문장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조의제문」이 역사투쟁의 훌륭한 교재로서 훗날까지 온당하게 전달되어 빛이 났으면 한 것이다. 여기에는 '김종직은 문장에 능숙할 뿐 언행이 일치하지 않고 후학을 시문으로 인도하였을 따름이다'는 훈구파의 비난을 반박하는 증거로 「조의제문」을 적극 평가하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제자가 김일손 등과 같지 않았다.

김종직의 「행장」을 지었다는 이유로 국문을 받은 표연말은 '「조의제문」을 보았지만 글의 뜻을 해득(解得)하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구차한 변명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그만큼 「조의제문」은 속뜻을 가늠하기가 쉽지 않았다.

김종직의 처남이며 제자로 『점필재집』을 처음 꾸린 조위(曺偉)도 「조의제문」을 단종의 죽음을 망각에서 건져 올린 작품으로 보지 않았다. 김일손의 제안으로 「조의제문」을 문집 맨 앞에 실었다고 하지만, 그보다는 작품 연도에 따라 시문을 배열한다는 편찬 원칙 때문이었다. 수학기를 마친 김종직의 가장 이른 작품이 「조의제문」이었던 것이다. 만약 조위가 작품의 의도를 눈치 챘다면 성종에게 『점필재집』을 '자랑스럽게' 올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조위에게 「조의제문」은 파란만장하고 박진감 넘치는 역사의 한 장면을 노래한 회고(懷古)이며 영사(詠史)일 뿐이었다.

무서운 올가미

유자광과 함께 무오사화를 실질적으로 이끌어간 영의정 윤필상(尹弼商)도 『점필재집』에서 「조의제문」을 읽었지만 처음에는 의미를 몰랐다. 적개·좌리공신으로서 성종 치세 중반부터 의정부를 지킨 훈구파의 중추로서 유자광 재서용을 추진한 장본인이었던 윤필상은 무척 영민하고 능수능란한 인물이었다. 세조 13년(1467) 형조를 담당하는 형방승지(刑房承旨)를 지낼 때 추위가 혹독한 밤에 입직하였을 때의 일화가 있다. 윤필상은 임금이 '형옥의 죄수가 얼마나 되는가를 물을 것이다' 하며 자세히 조사해두었는데, 실제로 세조가 물었다. 김정국(金正國)의 「사재척언(思齋摭言)」에 나온다. 이러한 윤필상까지도 "김일손의 '충분을 부쳤다'는 말이 없었다면 그 뜻이 깊고 깊어 정말로 해독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였다.

그러나 유자광을 꿰뚫고 있었다. 「조의제문」의 여러 구절이 세조의 즉위를 부정한 은유와 풍자임을 절절이 풀어냈던 것이다. 유자광의 치밀하게 준비한 광극(狂劇)의 개막이었다. 이제 「조의제문」은 기억과 성찰의 시도는 물론이고, 연산군의 안일과 독단, 훈구대신의 무능과 부패에 대한 비판의 흐름을 덮치는 유령이 되었다.

유자광은 이에 머물지 않았다.「도연명의 술주시(述酒詩)에 화답한다」까지 문제 삼았다. '「술주(述酒)」는 술을 노래한 것이 아니라 동진(東晋)의 안제(安帝)를 죽인 유유(劉裕)의 처사에 비분강개하여 지었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워 함양군수 시절에 창작한 장편서사시였다. 김종직도 전문(前文)에 밝혔다.

당시 도연명은 멸족의 화가 두려워 은어와 비유로 적었지만 천 년 뒤에 태어난 자신은 유유가 두려울 것이 없으므로 그 흉악함을 드러낼 수 있으며 이것이 바로 춘추필법이다.

「조의제문」의 "자양의 노련한 필법을 따라 마음 설레며 공경히 사모하여"라는 구절이 연상된다.
김종직은 유유의 찬탈을 따른 신하를 "유씨(劉氏)가 우리 임금이네 하면 저 푸른 하늘을 속일 수 있다고 하였겠지" 힐난하고, 이렇게 이어갔다.

요순의 훈풍을 높이도 끌어댔지만 高把堯舜薰
선위를 받는 게 끝내는 역적이었네 受禪卒反賊
역사는 글을 교묘하게 꾸며서 史氏巧其文
거북 기린 용 봉황이 부응하였다고 유인하였네 諉以四靈應


유유가 요순의 선위를 내세웠지만 실은 반역이며, 그에 따른 찬양도 모두 거짓이라고 한 것이다. 유자광은 이 부분을 세조와 훈구공신을 비방한 증거로 들이댔다. 섬뜩한 머리놀림이며 무서운 올가미치기였다.

김종직은 대역부도(大逆不道)의 수괴가 되고, 사초에서 「조의제문」을 언급한 김일손·권오복·권경유 등은 참형을 당하였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김종직에게 배운 적이 있고 과거를 보거나 벼슬을 할 때 지도와 자문을 받은 후학들은 대부분 '난언(亂言)'과 '붕당(朋黨)' 죄에 걸려 죽거나 유배를 갔다. 이로서 김종직은 '사림의 영수'란 칭호를 받게 되었다.
▲ 예림서원, 밀양시 부북면 후사포리. 김종직이 배향된 서원으로 명종 22년(1567)에 처음 세워졌다. 김종직은 모친상을 겪으면서 성리학에 매진하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하여 경렴당(景濂堂)을 지었다. 염계(濂溪)에 살면서 「태극도(太極圖)」를 그리고 '극이 없으니 태극이라(無極而太極)'로 시작하는 『태극도설(太極圖說)』을 지은 주돈이(周敦頤)를 흠모하며 학문을 하겠다는 뜻이었다. 북송에서 본격적으로 성리학을 다시 열었던 학자였다. 그동안 벼슬로 하지 못한 성리학에 대한 본격적 연구를 하겠다는 의지가 있었다. 그러나 다시 벼슬을 나가면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경렴당이 서원이 되었을 것이다. 지금의 서원은 임진왜란에 불탄 것을 옮겨지었는데, 현종 10년(1669)에 사액서원이 되었다. 서원의 장판각(藏板閣)에는 김종직과 부친 김숙자의 문집의 책판이 보관되어 있다. ⓒ프레시안

에필로그

김종직은 역사의 쇠락을 아파하였고, 시대의 변화와 발전을 염원하였으며, 『소학』을 통한 인간형성의 가르침은 절실하였다. 그러나 어두운 과거를 치유하려는 구체적 노력, 과감한 정책대안이나 정치구상, 자아확립을 위한 철학적 성찰이 없었다. 또한 해박한 경학과 역사학을 국가적 편찬사업이나 이천 수가 넘는 시문에 발휘하였을 뿐이다. 그렇다면 훈구계열의 문인관료와 별반 다르지 않을까? 아니다.

이것은 개인적 능력과 의지의 문제가 아니었다. 세월의 흐름과 세대교체에 따라 다음 세대가 감당할 몫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일을 김종직의 문인이 해냈다. 이들이 성인과 경전의 재발견을 통하여 선비의 주체성 자각과 도학의 실천자로서 긍지를 갖추기 시작한 것이다. 현실비판과 미래희망을 향한 의식전환의 소산이었다. 이른바 '도학파'의 출현이었다.

이런 점에서 김종직은 창업과 수성단계의 국가적 성취가 사회적 도전에 봉착하기 시작하던 시기를 살면서 과거와 미래, 낡은 것과 새로운 것, 기득권세력과 비판적 도전세력을 가르는 경계선에 있었다. 그러나 한 발짝 앞으로 나가 있었다.

따라서 '훈구파인가 사림파인가' '사장학인가 성리학인가' 혹은 '문인인가 도학자인가' 하는 물음은 고독하고 치열한 역동적 삶을 무덤에 가두고 우리가 편하자고 하는 계보그리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김종직에 대한 당대 평가는 어떠하였을까? 한동안 전라도를 유랑하던 남효온이 담양향교가 김종직의 출연금으로 면모를 일신한 내력을 적은「담양향교보상기(潭陽鄕校寶上記)」에 적었다. "문장과 도덕에서 일대의 진신영수(縉紳領袖)이다." 『악학궤범(樂學軌範)』을 남긴 훈구계열 문인관료 성현(成俔)도 '무수한 진신(縉紳)의 선비가 김종직의 여광(餘光)에 힘입었다' 하였다. 삶과 길이 달랐던 두 사람이지만 김종직을 조정에서 두각을 나타냈던 진신의 영수로 본 것은 같았다.

사실 김종직은 문인관료의 지도자를 염원하였는지 모른다. 실제 많은 제자를 길렀지만, 대체로 관료의 길을 요구하고 그렇게 인도하였으며, 그렇지 않은 제자와는 거리를 두었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의식과 행동이 16세기 도학파의 의리론(義理論)과 출처관(出處觀)과 맞지 않는 부분이고 이 문제로 김종직은 훗날 집중적으로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오늘의 관점에서 이 역시 무조건 폄하할 일은 아니다. 지방 사족으로서 왕실과 혈연관계가 없는 비(非)특권사족이 과거를 통한 관료의 길 이외의 선택은 쉽지 않았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하며,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일반사족이 왕실 혈연층을 중심으로 한 특권사족을 대체하는 사림의 시대가 연출되었던 것이다.

또한 도학파의 김종직 비판론의 역사적 맥락을 새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도학파의 김종직 비판은 그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한층 높은 차원의 전진을 향한 선택과 진통의 여정이며, 시대인식의 소산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오늘의 관점에서 도학파의 문제의식을 그대로 수용하여 김종직을 평가할 수는 없다. 이를테면 처음에는 '김종직의 시문은 전아(典雅)하여 도(道)에 가깝다'고 평가한 이황이 만년에 이르러 '김종직의 평생 사업은 사화(詞華)였다'고 폄하하였는데, 이것은 16세기를 살았던 이황 자신의 문제의식의 변화를 설명하는 증거로서 살펴야 마땅하고, 나아가 '김종직론의 역사적 변천'과 같은 주제에 인용하여야지, 이를 김종직의 삶과 생각을 규정하는 데 무비판적으로 적용할 수는 없는 것이다.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대화'라는 명제는 미래 지향적 현재의 관점에서 과거와 만나야 한다는 의미이지, 과거로부터 주어진 해석을 오늘날에 되살려 과거를 평가한다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따라서 김종직을 진정으로 이해하자면 김종직과 그의 시대와 끊임없이 대화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그런데 최근에는 이황의 언급과 같은 사례를 전가(傳家)의 보도(寶刀)처럼 활용하여 김종직을 훈구파와 다를 바 없는 '관료문인'으로 재단하고 있는데, 퍽이나 16세기에 얽매인 해석이 아닐 수 없다. 김종직의 외침이 들리는 듯하다.

"언제 사림의 종장이 된다고 하였는가, 그런데 이번에는 관료문인이라니 이 또한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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