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공부의 길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공부의 길

[이종범의 사림열전] 남효온: 방랑, 기억을 향한 투쟁 ④

귀신논쟁

남효온은 '하늘과 땅 사이에는 하나의 기가 풀무질 할 따름이다'로 시작하는 김시습의 「신귀설」을 본 적이 있었다. 기학적 우주론이며 실천주의 예론이었다. 무척 좋았다.

남효온의 '귀신' 역시 김시습의 '신귀'와 같이 천지간의 큰 기운 즉 일기(一氣)의 운동이었다. 따라서 '귀신'은 푸닥거리의 대상이 아니었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왜 천재지변이나 전염병 등 이변이 거듭되는 것인가, 그리고 사람들은 왜 실재하지 않는 산요(山妖), 목괴(木怪), 여귀(厲鬼), 도깨비(魍魎) 등 물괴(物怪)나 변괴(變怪)를 자주 증험하는가? 「귀신론(鬼神論)」에 풀었다.

무릇 사람이 살아가는 이치[理]를 얻고 태어나 옳게 생을 마치면, 혼(魂)은 올라가고 백(魄)은 내려갈 뿐이다. 그런데 옳게 마치지 못하면 기가 뭉쳐 흩어지지 않아 천지간의 큰 기운[一氣]과 더불어 유행하지 못한다. 「귀신론」

즉, 억울한 원망이 혼백으로 하여금 제자리를 찾지 못하게 하면 이상한 징후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또한 천재지변과 전염병 등의 재앙도 사람이 초래하는 인재(人災)라고 하였다. 전쟁과 토목공사 등이 천지의 화기(和氣)를 해쳤기 때문에 생긴다는 것이다. 인간이 잘못하면 천지 기운의 운동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귀신이 잘못되는 것이다.

그런데 남효온이 생각하기에 당대의 이름 있는 학자들도 '귀신'을 가볍게 생각하였다. 『서경』과 『주역』에 능통한 성균관 사유(師儒) 장계이(張繼弛)는 '사람이 죽으면 처음에는 신(神)과 귀(鬼)는 있지만 오래되면 귀는 없다'고 하며, '신'과 '귀'를 구분하여 '신은 무한하고 귀는 한시적이다'고 하였다. 남효온도 한동안 수학한 적이 있었던 장계이는 예종 원년(1468) 『세조실록』 편찬 과정에서 '사초에 사관의 이름을 적게 하면 직필(直筆)에 장애가 된다'고 주장하다가 곤욕을 치른 적도 있었다.

또한 젊은 선비가 많이 따랐던 원로학자 이관의(李寬儀)는 아예 귀신의 존재를 부정하였다. "천지간에 귀(鬼)란 없고 천·지·인 삼신(三神)도 특별히 만들어낸 말이다." 나아가 "제사는 사람이 근본에 보답한다는 도리를 가르치자는 교화의 도구이지, 귀신이 있어서 제사를 지내는 것은 아니다"고도 하였다. 이른바 '무귀설(無鬼說)'이며 '무신론(無神論)'이었다. 특히 이관의는 사람들이 흔히 증험하는 사요(邪妖), 여괴(厲怪) 등의 이변을 철저히 부정하였다. 인간과 자연을 인지(人智) 내지는 '리(理)' 중심으로 사고한 것이다. 우주만물을 리의 체계로 인식하는 리학(理學)으로 거의 유리론(唯理論)에 가까웠다.

남효온은 도저히 수긍할 수 없었다. 이렇게 비판하였다. '어찌 사람이 죽으면 처음에 기운이 돌아갔다가 나중에 없어질 수 있는가' 하며, '한 시대의 유자가 눈앞의 것만 알고 의외(意外)를 살피지 않고서 귀가 없다고 하는 것은 잘못이다" 하였다. 리학에 대한 기학의 공세였다. 그러나 장계이와 이관의 두 학자는「귀신론」초고를 잡기 이전에 세상을 떠났으니 답변할 수 없었다. 사자(死者)와의 논변인 셈이다!
▲ 경남 의령군 칠곡면 도산리 소재. 『남효온의 삶과 시』(태학사)의 저자 김성언 교수에 의하면 이곳에서 『육신전』을 지었다고 한다. 남효온의 고조인 남재(南在)는 동생 남은(南誾)과는 달리 조선 건국에 다소 소극적으로 한동안 의령에 살았는데, 태종이 찾아서 '남(南)이 살아 있다' 하며 이름을 겸(謙)에서 재(在)로 고치라고 하였다. 한양에 살던 남효온 일가는 벼슬이 어렵게 되면서 계부인 남회(南恢)가 내려와 전장을 관리하며 살았는데 계부를 보낸 아쉬움을 담은 「영남으로 가시는 계부를 봉별하다」네 수에 담았는데, 처음에 "종가(宗家)가 적막한 지 어언 스무 해, 아버지 떠나시니 세월 또한 빠르더이다" 하였다.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남회도 연좌되어 진천으로 유배를 갔다. 남효온도 아들 충세와 같이 한동안 머물렀는데, 「살구꽃 피는 시절 아들을 따라 고향 집 뒷동산에 오르다」가 있다. 아이에 끌려 느릿느릿 산비탈을 돌아서니 携兒散步歷山陂 붉은 꽃망울 걸친 나무 끝에 보름달이 휘영청 걸려 있네 紅杏梢頭月午時 이미 죽은 몸에도 마음은 봄을 찾는 뜻에 따라 움직이니 半死心隨春意動 바람맞으며 가장 번화한 가지나 꺾어볼까 한다 臨風折得最繁枝 ⓒ프레시안

경남 의령군 칠곡면 도산리 소재. 『남효온의 삶과 시』(태학사)의 저자 김성언 교수에 의하면 이곳에서 『육신전』을 지었다고 한다. 남효온의 고조인 남재(南在)는 동생 남은(南誾)과는 달리 조선 건국에 다소 소극적으로 한동안 의령에 살았는데, 태종이 찾아서 '남(南)이 살아 있다' 하며 이름을 겸(謙)에서 재(在)로 고치라고 하였다. 한양에 살던 남효온 일가는 벼슬이 어렵게 되면서 계부인 남회(南恢)가 내려와 전장을 관리하며 살았는데 계부를 보낸 아쉬움을 담은 「영남으로 가시는 계부를 봉별하다」네 수에 담았는데, 처음에 "종가(宗家)가 적막한 지 어언 스무 해, 아버지 떠나시니 세월 또한 빠르더이다" 하였다.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남회도 연좌되어 진천으로 유배를 갔다. 남효온도 아들 충세와 같이 한동안 머물렀는데, 「살구꽃 피는 시절 아들을 따라 고향 집 뒷동산에 오르다」가 있다.
아이에 끌려 느릿느릿 산비탈을 돌아서니 携兒散步歷山陂
붉은 꽃망울 걸친 나무 끝에 보름달이 휘영청 걸려 있네 紅杏梢頭月午時
이미 죽은 몸에도 마음은 봄을 찾는 뜻에 따라 움직이니 半死心隨春意動
바람맞으며 가장 번화한 가지나 꺾어볼까 한다 臨風折得最繁枝

남효온이 자신이 수학하고 존경한 학자에 대한 신랄한 비판은 다름이 아니었다. 즉 귀신의 본질이 음양 두 기운의 양능(良能)임을 모르기 때문에 하늘의 재앙이 인사의 잘못, 인간의 원한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간과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적었다.

내 마음의 신명(神明)이 귀신의 신명이니 내 마음의 사사로움을 없애야 귀신의 사사로움을 없앨 수 있다. 「귀신론」

즉, 하늘의 재앙을 없애자면 인간이 신명과 의리를 회복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아래에서 사람의 기운이 화평하면 위에서 하늘의 기운도 화평하게 된다." 즉, 세상사가 화평하고 정당하면 음양 기운도 제대로 된다는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 혹은 천인합일론(天人合一論)이었다. 거의 신비주의 수준이었다.

본성과 기질

마음이 천지의 기운과 통하고 만물과 일체를 이루자면 그만큼 마음을 크게 가져야 한다. 이른바 '대심(大心)'이며 '양심(養心)'이었다. 이때 비로소 천지만물을 티끌 없이 비추며 담을 수 있다. 남효온이 마음을 명경지수(明鏡止水)에 비유한 까닭이다.

마음은 사람의 보이지 않는 근원이었다. 우주자연 삼라만상의 극점에 있는 태극(太極)과 같았다. 즉 "마음은 틈새 없이 태극을 본체로 삼는다." 그런데 태극이 처음에는 기미도 없고 동정도 없기 때문에 '무극(無極)이며 태극이라' 하듯이 마음도 처음에는 아무것도 담지 않고 오로지 고요하고 적막한 '텅 빈 속마음(腔子裏)'일 뿐이다. 그러나 태극이 음양을 낳듯이 마음에도 성(性)과 정(情)이 이미 갖추어져 있다. 이렇게 풀었다.

음양오행의 기운은 움직이며, 무극이며 태극인 원리는 움직이지 않는다. 무릇 마음도 텅 빈 속에 있는데, 조용하고 고요한 바를 '성'이라 하고, 감동하여 분발하는 바를 '정'이라고 한다. 「심론(心論)」

마음에는 움직이지 않는 본체(本體)가 있으니 '성'이며, 이것이 움직이며 발용(發用)하면 '정'이 된다는 것이다.
물론 '성'은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성이 없는 물은 없다'는 '무성무물론(無性無物論)'이었다. 송나라 기학(氣學)의 창시자인 장재(張載)도 '성은 만물 공동의 원천으로 홀로 가질 수 있는 사유물이 아니다'고 하였다.
남효온은 하찮은 풀 한 포기, 보잘것없는 동물도 그 나름의 '성'을 받았고, 나름의 도리를 다하고 있음을 이렇게 설명하였다.

까마귀라도 되씹어 먹이니 인(仁)이요, 벌들은 군신(君臣)과 같이 하니 의(義)이며, 수달은 제사 지내는 것 같으니 예(禮)요, 개가 주인을 알아보니 지(智)이며, 닭이 새벽을 알리니 신(信)이다. 초목도 봄에 피며 여름에 자라고 가을에 이루며 겨울에 감추는데 뿌리와 잎이 말랐다가 다시 나오니 바로 인의예지신이다. 「성론(性論)」

모든 사물이 제 본성에 따라 제 도리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인성과 물성은 같다[人·物性同論].' 그러나 사람과 동물이 본성은 같다고 하지만 본성의 발현은 다르다. 개가 주인을 알지만 사람과 같은 효도와 의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기질이 다르기 때문에 본성은 다르게 표현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보면 '인성과 물성은 같지 않다[人·物性不同論].' 성인과 범인의 갈림도 여기에 있다. 즉 성인과 범인은 하늘로부터 받은 본연지성(本然之性)은 같지만, 형기를 받아 발휘되는 기질지성(氣質之性)이 다른 것이다.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의 관계를 이렇게 정의하였다.

천명에 근원을 두는 본연지성이 기질에 구애되어 선악이 있으면 기질지성이라고 하는데, 그 본원을 따지면 결국 같으니 둘이 아니다. 그래서 성을 두고 '일본만용(一本萬用)'이라 하는 것이다. 「성론」

즉,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은 본원(本源)은 하나이지만 발용(發用)이 다르다는 것이다. 이러한 틀에서 선현의 성에 대한 선현의 이론을 정리하였다. 즉 맹자의 '성선(性善)'은 본연지성이며, 정호(程顥)가 '천하의 선악은 모두 하늘의 이치이다'고 할 때의 성은 기질지성이었다.

그러나 '성악(性惡)'의 순자(荀子), '성은 선악의 섞임(善惡混)'이라고 한 양자(楊子), '성은 있는 그대로의 생(生)'이라고 한 고자(告子)는 본원을 간과한 채로 발용만을 보고 성을 정의하였다. 한유의 '성의 상·중·하 삼품(三品)'도 다르지 않다. 올바른 입장이 아니었다.

그런데 성균관의 사유는 여전히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은 하나가 아니고 둘이다'는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다. 성균관을 출입하지 못하는 처지였지만, 도학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는 교육현실이 안타까웠다. 그래서 정리한 글이 「성론(性論)」이었다. 성종 16년(1485)이었다.

하늘과 백성은 어떻게 만나는가?

남효온이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의 본원이 하나라고 한 것은 누구라도 하늘에게서 받은 천명은 같고 누구라도 천명은 어길 수 없다는 믿음의 소산이었다. 그러면서 기질지성의 다름 또한 강조하여 기질에 구애되어 물욕의 노예로 떨어질 수 없다는 당위성을 피력하였다. 한유의 '성품설(性品說)' 비판도 스스로의 성품을 정하여 자신을 가두고 안주할 수 없음을 경계하고자 함이었다. 이것은 천명을 따르는 인간의 길이 아니었다.

그런데 만약 임금이 하늘을 따르지 않고 인간의 길을 포기하면 어떻게 되는가? 하늘이 임금으로 하여금 나라를 잘 다스려서 백성을 살려야 한다고 명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임금이 제 구실을 하지 못하면 나라를 망하게 한다. 나라의 멸망은 마치 눈 오는 겨울 복숭아꽃이 피는 것과 같은 이변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한 번 음이면 한 번 양이 되는 바가 도(道)다'라는 관점에서 보면 나라의 망함을 한사코 이변이라고만 여길 수는 없다. 「명론(命論)」에 풀었는데, 줄여 옮긴다.

나라의 흥망은 무엇 때문인가? 하늘은 지공무사(至公無私)하여 그침 없고 거침없이 선에는 복을 내리고 음란에는 화를 내린다. 또한 백성은 인은 가슴에 품지만 악에는 등을 돌린다. 임금이 성스러우면 흥하고 미쳐 있으면 망하는 것도 이 때문이니, 이것도 본래 모습의 하늘이다. 그래서 흥(興)도 천명이요, 망(亡)도 천명이라고 하는 것이다. 「명론」

즉 '일음일양(一陰一陽)'이 우주의 도라고 한다면, 나라와 역사는 '일흥일망(一興一亡)'의 궤적을 밟는다는 것이다. 또한 나라의 흥망은 임금의 '성(聖)인가 광(狂)'에 달려 있지만, 실은 음란에 재앙을 내리는 하늘의 명령과 악행을 등지는 백성의 마음이 만나서 결정된다고 하였다. 즉 하늘의 '복선화음(福善禍淫)'과 백성의 '회인배악(懷仁背惡)'이 나라를 흥하게도 하고 망하게도 한다는 것이다. '민심이 곧 천명'이라는 관점이었다.

따라서 하늘의 뜻에 따라 폭군을 토벌하고 새 나라를 세우는 일도 일종의 천명이었다.

임금과 신하의 나뉨이란 하늘과 땅을 바꿀 수 없는 것과 같지만 혁명을 할 때면 탕(湯)·무(武)와 같은 신하가 걸(桀)·주(紂)와 같은 폭군을 토벌하니 반명(叛命)과 역명(逆命)도 역시 천명이다. 「명론」

혁명을 일음일양과 같은 자연법칙으로 정당화하고 있다. 즉 폭군의 제거는 자연의 이변을 치유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정반합(正反合)의 변증법으로 읽으면 그만이지만 달리 들으면 아득하다.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임금자리에 오르는 것은 오로지 백성을 살리라는 하늘의 뜻에 있는 것이지 세습이 임금이 될 수 있는 이유가 아니라고 하였다.

백성을 낸 하늘은 주인을 세우지 않으면 백성이 서로 난리를 피우니 총명예지한 사람을 선택하여 억조창생의 주인으로 삼았을 뿐이지, 제왕의 후손으로 제왕을 삼지 않았다. 요가 순에게, 순이 우에게 임금을 맡긴 것도 이 때문이다. 「명론」

옛적에는 왕위의 승계가 세습이 아니라 선위나 추대였음을 말한 것인데, 고대의 사실을 말한 것이라 들으면 이 또한 그만이지만, 어찌 들으면 얼마든지 안타까운 빌미를 제공할 수도 있었다. 그러니 아련하다.

이렇듯 남효온의 「명론」은 '천일합일론'에 '혁명과 변화의 의상'을 걸치고 있었다. 그러나 세상에 대한 비분강개함에 성급함이 앞서고 또한 아무리 보아도 다자인이 서툴고 채색과 무늬가 거치니 아쉬울 따름이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