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조 5년(1459) 문과에 급제한 김종직은 학술과 문장으로 바로 두각을 나타냈다. 「현능한 인재를 천거하도록 의정부에 내리는 유교(諭議政府擧賢能敎)」「수령을 잘 가리도록 의정부에 내리는 유교(諭議政府旌別守令敎)」등 왕명을 옮기는 국가문서를 지었다.
세조 8년(1462) 여름에는 임금 앞에서 『중용』과 『서경』을 강의한 적도 있었다. 학자와의 토론에 이어 비판과 건의가 따르는 경연을 싫어한 세조가 경학에 밝은 유신(儒臣)으로 뽑아 공개 강의하게 하고 끝나면 의례히 술과 상급을 내리는 자리였다. 김종직도 『중용혹문(中庸或問)』 한 질을 받고 품계도 올랐다. 그러나 시련이 없지 않았다.
세조 9년(1463) 여름 불사(佛事)를 간언하다가 파직을 당한 바가 있었던 김종직은 이듬해 7월 세조에게 호되게 당하였다. 세조가 '능력이 있는 문신을 천문·지리·음양·의학·사학·시학·율려(律呂) 등 한 분야에 배속시켜서 익히게 하라'는 전교를 내렸는데 김종직이 그만 반대한 것이다.
"사학과 시학은 본래 유자의 일입니다만 나머지는 잡학(雜學)인데 문신에게 힘써 배워 능통하게 하라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닙니다."
세조는 용서하지 않았다.
"김종직은 내가 잡학을 장려한 까닭을 알 것인데, 참으로 경박하다."
천문 지리 의학 등의 실용학문의 필요성을 안다면 문신이 앞장서 익혀야 하는데 김종직이 섣불리 반대하였다는 것이다. 이때 김종직은 곤장을 받고 투옥되었으며 1년 정도 벼슬이 떨어졌다. 그리고 경상도 평사로 나갔던 것이다.
경상도 평사를 마치고 돌아온 김종직은 몸을 낮추고 조용히 지냈다. 세조를 이은 예종 치세가 단명으로 끝나고 성종이 즉위하는 과정에서도 움직임이 없었다. 다만 「예종대왕시책문(睿宗大王諡冊文)」「인수왕비봉숭옥책문(仁粹王妃奉崇玉冊文)」을 지었다. 당대 제일의 문장으로 대우받아야 맡겨지는 일이었다. 세조를 위한 추모음악에 들어갈 노랫말을 만들기도 하였다. 「세조혜장대왕악장(世祖惠莊大王樂章)」의 〈외외곡(巍巍曲)〉과 〈천명곡(天命曲)〉이다. 다음은 '높고 높으시다' 정도가 되는 전자의 후반부이다.
밝도다 문무의 도여, 빛나도다 예악이여 昭哉文武 煥焉禮樂
나라 세우고 지킨 높은 공이여, 가없이 드리우리 創守隆功 垂耀無極
이 분야에 일급의 명성을 얻지 못하면 짓고 싶다고 아무나 지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러한 명성에는 훨씬 의미 있는 기회가 따르기 마련이다. 즉 공식선이 아니면 좀처럼 넘보기가 쉽지 않는 '핵심(inner circle)'의 비밀스런 안뜰(inner court)에 다가설 수 있는 것이다. 사실 그랬다.
당대의 경륜인 신숙주가 김종직을 찾았다. 신숙주는 자신의 책임 아래 진행되는 「병장설(兵將說)」의 편찬 사업을 김종직에게 맡기며 주위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고 격려하였을 뿐 아니라, 손자인 신종호(申從濩)와 신용개(申用漑)를 보내 배우게 하였다.
김종직이 함양군수로 나갈 때도 신숙주는 "모친을 위하여 작은 고을 수령이 되니 닭갈비에 소 잡는 칼을 쓰는구나." 위로하였다. 다음은 이때 지은 「고령(高靈) 신상공(申相公)에게 받들어 화답하다」이다.
조잔한 기예가 몹시도 부끄럽습니다 深慙雕篆手
옷 짓기 배우느라 무딘 칼 잡았으니 學製把鉛刀
주야로 푸른 하늘을 쳐다보면서 日夜瞻霄漢
오직 북두성이 높은 줄만 알게 되었습니다 唯知北斗高
신숙주를 북두성에 비견한 것이다. 김종직은 실제로 신숙주를 존경하였다. 신종호의 부탁으로 적은 신숙주 문집의 서문에 이렇게 적었다.
"공의 도량(度量)은 홍광(弘曠)하고 재식(才識)은 박흡(博洽)하여 평일 온축(蘊蓄)한 바는 곧바로 경세제민(經世濟民)에 소용되었는데, 알고 있음의 끝이 어디인가를 도무지 헤아릴 수 없었다."
잘못을 들킨 아이처럼
당대 최고 공신 한명회(韓明澮)도 김종직을 찾았다. 첫 딸을 세자 시절 예종의 배필로 삼고 둘째 딸은 잠저 시절 성종에게 시집 보내 마침내 중전을 만들었으면서도 권세를 너무 오래 잡는다는 물의가 있자 압구정(狎鷗亭)을 지어 굽힘도 보일 줄 아는 노회한 최고 실세였다.
한명회는 김종직이 함양현감으로 갈 즈음에 압구정으로 초대하고는 시 한 수를 부탁하였다. 김종직은 "상공은 운학 같은 자태로서 하늘 멀리 안온하게 유희(遊戱)하네" 하였다. 한명회를 구름 위의 학에 견준 것이니 하염없은 굽힘이었다. 바로 「압구정에서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이 시를 요청하다」란 시였다. 이렇게 이어갔다.
원대한 뜻으로 폄과 맒을 생각하여 遐情念舒券
때로는 강 언덕을 찾아오나니 江皐有時至
화려한 집이 대단히 소쇄하여라 華構絶蕭灑
도성 남쪽의 한 조각 땅이로세 一片城南地
압구정을 지은 뜻을 세상만사의 폄과 맒, 나아감과 굽힘으로 풀며 칭송한 것이다. 무척 흐뭇하였을 것이다. 그러자 이번에는 시 한 묶음(卷)을 내보이며 글을 부탁하였다. 내력이 있었다.
젊은 시절 과거에 실패한 한명회가 원주로 유방선(柳方善)을 찾아 배웠을 때였다. 권근과 변계량의 문인으로 학문과 문장이 탁월한 유방선이 태종이 외척을 제압할 요량으로 일으킨 '민무구·무질(閔無咎·無疾) 옥사'에 부친이 연루되어 희생되는 바람에 영천으로 유배되었는데 풀려나서도 벼슬 생각을 접고 후진을 양성하던 참이었다. 그때 한명회가 이미 과거에 합격하고 고향인 대구를 내려가던 서거정에게서 다정한 작별시를 받았는데, 자신이 최고공신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시절에 받은 시라서 더욱 반가워 오래 간직하며 여러 사람에게 보이며 차운(次韻)할 것을 주문하였는데 어느덧 한 권 분량이 된 것이다.
김종직이 장편 「상당부원군의 시권(詩卷)에 쓰다」에 소감을 풀었는데, 중간 부분이 이렇게 되어 있다.
세상일이 하루아침에 바뀔 줄 어찌 알았으랴 豈知時事一朝改
온 나라에 요기가 가득하고 연기가 자욱한데 妖氛滿國煙濛濛
상공이 옷자락 떨치고 동산에서 일어나서 相公奮衣起東山
서쪽에 기운 해 바퀴를 손수 잡아 돌렸도다 手轉日轂咸池紅
김종서와 안평대군 때문에 왕실이 석양처럼 기울어 갔는데, 한명회가 나서 바로 세우자 왕조의 새벽이 다시 열렸다는 것이다. 극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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