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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락의 시대를 풍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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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락의 시대를 풍자하다

[이종범의 사림열전] 김종직: 경계인을 위한 변명ㆍ②

사방지(舍方知)

세조 치세 요란한 염문을 뿌린 사방지가 있었다. 얼굴이 예쁘고 바느질은 물론 자수에도 재주가 많은 여장 남자로 본래 안씨가(安氏家)의 사노(私奴)였다. 그런데 이웃집의 과부 이씨가 옷을 짓게 한다는 핑계로 밤마다 끌어들이면서 해괴한 소문이 퍼졌다. 더구나 그녀 심부름으로 사찰에 출입하다가 관계를 맺은 여승이 환속하였다는 풍설까지 돌았다.

과부 이씨는 명가 출신이었다. 그녀의 부친 이순지(李純之)는 우리나라가 북극에서 '36도 강'의 위치에 있음을 계산한 문관 출신 과학자로 세종의 신임이 각별하였다. 혼천의(渾天儀) 등 여러 천문기구를 제작한 장영실(蔣英實)에게 천문 이론을 가르친 스승으로서 세조도 '부왕이 중하게 여긴 신하이다'라고 하면서 지극히 예우하였다. 또한 이순지의 집안은 당대 명문으로 부상한 정인지와 사돈 간이었다. 즉 과부 이씨의 며느리가 정인지의 딸이었다. 이렇게 보면 왕실과도 인연이 있었다. 세조의 하나 뿐인 부마가 정인지의 아들인 하성위(河城尉) 정현조(鄭顯祖)였으니, 부마의 누이를 이씨는 며느리로 삼았던 것이다.

이렇듯 명문의 과부가 사노와 물의를 빚었으니 사헌부가 조사하는 것은 당연하였다. 사헌부가 환속한 여승을 찾아 '양도(陽道)가 매우 장대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이씨를 조사하려던 참이었다. 그러나 중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조가 막은 것이다.

이순지가 대부의 가문인데 명백히 증명하기 어려운 애매한 일로 하루아침에 흠을 받는다면 억울하지 않겠느냐? 『세조실록』 8년 4월 27일

이뿐만이 아니었다. 세조는 조사의 필요성을 거듭 제기하는 사헌부 감찰 등을 파직하고 의금부에 구금하였다. 그리고 사방지를 본래 주인에게서 빼앗아 이순지의 처분에 맡겨버렸다. 명문가의 과부와 사노가 관계되는 강상(綱常) 문제이니만큼 철저한 조사가 필요하고, 또한 사실이라면 죽음으로도 씻기 어려운 일이었음에도 석연찮게 봉합해 버린 것이다. 세조 8년(1462) 여름이었다.

이상한 풍문은 이후로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이순지는 사방지를 십여 대 장을 쳐서 경기도 가까운 곳으로 내쳤을 뿐, 과부인 딸을 단속하지 않았던 것이다. 더구나 남의 노비를 받았으면 어떤 식으로든지 보상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 이순지 졸기에 나온다.

임금이 사방지를 이순지에게 부쳤는데 이순지는 잘 제어하지 못하고 도리어 그 일로 송사를 하니 모두 비루하다고 여겼다. 『세조실록』 11년 6월 11일

이순지가 죽자 과부 이씨는 거리낌 없이 사방지를 다시 불러들였다. 추문은 더욱 기승을 부렸다. 이렇게 되자 세조도 어쩔 수 없었다. 사방지를 경기도 밖 신창현의 공천(公賤)으로 삼아 다시 도성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본 주인에게는 다른 노비로 보상하였다. 그래도 이씨는 무사하였다. 죽음이 내려야 마땅할 추문치고는 결말은 싱겁기 그지없었다. 세조 13년(1467) 4월이었다. 김종직이 경상도 평사를 마치고 예문관 수찬으로 복귀한 얼마 후였다.

김종직이 「사방지」두 수에 소감을 풀면서, 전문(前文)에 사건의 전말을 기록하였는데, 이런 구절이 있다.

주상이 영순군(永順君) 이보(李溥)와 하성위 정현조를 시켜 승정원과 함께 사방지의 몸을 살펴보도록 하였는데, 그의 누이가 과부 이씨의 며느리였던 하성위가 놀라 말하기를 '어쩌면 그리도 장대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하니, 주상이 웃고서 '이순지의 가문을 더럽히고 욕되게 할까 염려된다' 하면서 더 이상 캐묻지 말라고 하였다.

임금과 왕족, 부마가 모여서 신중하고 엄중히 대처할 강상문제를 흐지부지, 성적 음담 수준으로 처리하였던 것이다. 한편의 희화를 보는 듯하다. 「사방지」두 번째가 이렇게 되어 있다.

남녀를 어찌 번거로이 산파에게 물을 것 있나 男女何煩問座婆
요망한 여우가 굴을 파서 남의 집을 까부셨다네 妖狐穴地敗人家
길가에서는 하간전을 시끄러이 외워대고 街頭喧誦河間傳
규방 안에서는 양백화를 슬피 노래하네 閨裏悲歌楊白華


3연의 하간전(河間傳)은 중국 하간 지방의 전래 노래이며, 4연의 양백화(楊白華)는 본래는 위(魏)의 태후와 간통하였다가 후환이 두려워 도망한 사람이었다. '세상에서는 추문을 시끄럽게 비웃는데, 과부는 아직도 멀리 간 서방을 그리워하네' 정도의 풍자로 읽으면 그만이다.

그러나 이 정도에 그친 것이 아닌 듯하다. '하간전'을 글자로 풀면 '하(河)사이에 전하는 무엇'이 되는데, 본관이 하동(河東)이라 부마의 칭호가 '하성위'인 정현조가 중간에 세조에 전한 '어쩌면 그리도 장대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는 말을 가리키는 듯도 하고, '양백화'를 소리대로 풀면 '두 가지 백화(白禍)'인데, 남자와 아닌 여자도 아닌 양성(兩性)이 본관이 양성(陽城)인 이순지 집안을 망친 '백주(白晝)의 화'로 읽힌다.

그렇다면 이 시의 후반은 '남자도 아닌 것이 여자도 아닌 것이 양성 이씨 가문에 망하게 하는데 하성위는 무엇이 좋다고 임금에게 즐겁게 떠벌이니 이 무슨 해괴한 일인가'라는 뜻이 되는 것이다. 실로 절묘한 조합이며 신랄한 풍자, 질퍽한 은유가 아닐 수 없다. 현장성과 사실성을 갖춘 필력이 고사를 자유자재로 인용하였을 때의 풍자의 위력이 무엇인가 보는 듯하다.

「조의제문」도 이런 유형의 풍자문학이었다. 그런데 누구나 알고 있고 박진감 넘치는 명장면이 펼쳐지는 진(秦)의 멸망과 초한(楚漢)의 천하쟁패를 끌어들여 만들었으니, 우선 흥미를 자아내는데 그만이지만, 그러나 그 진의를 알게 되면 야릇한 전율이 뼛속까지 사무쳐 움츠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조의제문(弔義帝文)」

세조 2년(1456) 정월의 과거에 실패한 김종직은 무척 서운하였다. 그래도 백형 김종석(金宗碩)이 합격하여 다행이었다. 그리고 바로 부친을 잃었다. 무척 슬펐다. "푸른 하늘이여, 푸른 하늘이여, 이럴 수가 있단 말입니까. 선조(先祖)여, 선조여, 이럴 수가 있단 말입니까!" 부친의 임종을 못한 때문만이 아니었다. 학문과 경륜에 손색이 없었음에도 뜻을 펴지 못한 부친이 한없이 안쓰러웠던 것이다.

김종직은 두 형과 함께 시묘에 들어갔다. 그동안 세상은 요동을 쳤고 많이 변하였다. 성삼문 등의 상왕복위운동이 있었고, 노산군으로 강등된 상왕은 영월로 쫓겨났다가 몇 달 후에 목숨을 버렸다. 세조 3년(1457) 10월이었다. 세간에는 '시신을 강물에 던졌다', '영월의 호장이 들쳐 메고 사라졌다'는 등 풍설이 난무하였다.
▲ 청령포, 단종이 처음으로 유배를 왔던 곳. 그러나 물이 차면 수장될 위험이 있다고 하여 읍내로 옮기기 전까지 살았다. 청령포를 바라보는 언덕에 단종을 호송한 금부도사 왕방연이 돌아가며 처절한 심정을 담은 시조를 새긴 비석이 서있다.
"千萬里 머나먼 길의/ 고은 님 여희옵고/ 내
음 둘 듸 없셔/ 냇가의 안쟈 시니/ 뎌 물도 내 안
도다 / 울어 밤길 예놋다" ⓒ영월군청

이즈음 시묘 중이던 김종직이 밀양을 나서 성주(星州)의 답계역(踏溪驛)에서 하룻밤을 지냈다고 한다. 바로 상왕이 죽은 달이었다. 그런데 꿈에 의제(義帝)가 나타나서 '항우(項羽)가 나를 죽여 침강(郴江)에 빠뜨렸다'고 하소연하였다. 실로 신기하여 붓을 드니 「조의제문」이었다. 이렇게 시작한다.

하늘이 만물에 부여한 것을 나에게 주지 않았나 惟天賦物則以予人兮
누가 인의예지와 오륜을 지키지 않음을 모를까 孰不知其遵四大與五常
중화에는 넉넉하고 오랑캐에는 인색할 것이며 匪華豊而夷嗇兮
옛날에는 있었는데 지금에야 없겠는가 曷古有而今亡


하늘이 사람에게 내린 본성은 중화와 이적이 다르지 않고, 고금이 다를 수 없으니 의제를 위하여 조사(弔詞)를 바친다는 것이다. 먼저,

옛날 조룡이 포학을 자행하여 昔祖龍之弄牙角兮
사해의 물결이 검붉은 피바다를 이루니 四海之波殷爲衁


하였다. 진시황의 학정으로 세상이 핏빛으로 물들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담담히 이어갔다.

초나라의 장수 항량(項梁)이 군사를 일으키고 왕실의 후예인 심(心)을 찾아 회왕(懷王)으로 삼았는데, 항량의 조카인 항우(項羽)도 처음에 따르면서 나중에는 회왕을 의제(義帝)로 높이기까지 하였다. 황제로 옹립한 것이다. 그러나 순간이었다. 항우는 왕실의 호위부대인 경자관군(卿子冠軍)을 일망타진하고 의제를 시해하고 말았다. 이런 이유로 인심을 잃은 항우는 유방에게 대패하였고, 마침내 한나라가 건국되었다.

그러나 노래는 한의 건국을 찬양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의제가 왜 항우를 미리 제거하지 못하였는가를 물었다. 이 부분에서 김종직은 격정을 드러냈다.

양과 이리처럼 탐포하여 멋대로 관군을 멸족시켰는데 羊狠狼貪擅夷冠軍兮
어찌 그를 잡아다가 처형하지 않았던가 胡不收以膏齊斧
아 슬프다 형세가 이미 대단히 어긋났구나 嗚呼勢有大不然者
나는 왕을 위하여 더욱 두려웁도다 吾於王而益懼


의제가 항우를 미리 제거하지 못하여 배반을 당하고 결국 죽임을 당하였으니 슬프고 두렵다고 한 것이다. 그리고 의제의 주검이 버려진 침강에 아직도 그의 넋은 헤매고 있으리라, 노래하였다.

침강의 물은 밤낮으로 흘러가는데 郴之水流以日夜兮
물결은 넘쳐흘러 되돌아오지 않도다 波淫泆而不返
한스러워라 천지는 장구하여 언제 다하랴마는 天長地久恨其曷旣兮
그 넋은 지금까지도 떠돌아다니리라 魂至今猶飄蕩


실로 쉼 없이 흘러가는 침강에 의제의 넋이 침침하게 떠도는 것 같은 들춤이었다. 가히 심금(心琴)이다. 이렇게 마감하였다.

자양의 노련한 필법을 따라 循紫陽之老筆兮
마음 설레며 공경히 사모하여 思螴蜳以欽欽
술잔 들어 땅에 부어서 제사 지내니 擧雲罍以酹地兮
바라건대 영령은 내려와 흠향하소서 冀英靈之來歆


자양(紫陽)의 노필(老筆)은 주자의 의리와 정통의 춘추필법을 말한다. 의리와 정통의 입장에서 의제를 추모하고 항우를 단죄한다는 것이다.

「조의제문」 어느 구석에도 '항우는 세조이며 의제는 단종이다'는 암시는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의제를 꿈에서 본 '정축년 시월'이 단종이 영월에서 세상을 하직한 달임을 생각하면 의미는 판연히 달라진다.

그렇다면 '항우가 관군을 멸족시켰다'는 구절은 세조가 김종서를 척살한 사실이 되고, '어찌 그를 잡아다가 처형하지 않았던가?'는 단종이 미리 수양대군을 제거하지 못한 사실을 은유한 것이라고 하여도 달리 할 말이 없다. 또한 의제의 시신이 잠겼다는 침강은 두말 할 나위 없이 단종을 잠시 가둔 영월을 흐르는 동강이 된다.

문학이든 음악이든 작품은 작자의 의도도 중요하지만 독자와 관객의 감상과 평가로 자리매김이 됨은 동서고금이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감히 말할 수 있다. 풍자가 아니면 문학의 구실을 찾기 어려운 시절, 누구나 알고 있는 역사를 소재로 삼았기에 「조의제문」의 은유는 강렬한 들춤이 있었고, 그만큼 생동감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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