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희망의 단약(丹藥)은 없다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희망의 단약(丹藥)은 없다

[이종범의 사림열전] 남효온: 방랑, 기억을 향한 투쟁 ⑦

나는 있어 무엇 할까

남효온은 각처를 떠돌 때나 머물 때나 항상 가족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금강산을 나와 모친의 편지를 받은 적이 있었다. 모친이 '나는 평안한데 우리 진사는 어떠한가?'라고 썼던 모양이다. 「고성 온천에서 어머님 소식을 얻고」이다.

천 리 길을 온 어머님 편지 한 장 千里慈堂一紙書
전해준 사람에게 차마 안부 여쭙지 못하다가 御來不忍問何如
열어보니 처음 보이는 평안 두 글자에 開封始見平安字
날마다 남쪽 향한 시름 태반이 흩어졌다네 日日南愁太半舒


남효온은 항상 몸이 약해 병치레가 잦은 둘째 아들이 걱정이었다. 「병든 아들을 생각하며」가 있다.

몸이 약한데다 헐벗고 못 먹어 병마가 삼켰으니 弱質飢寒致病侵
아비 되는 부끄러움을 어찌할 길 없구나 念爲人父媿難禁
네 생각에 근심하다 밤이 되어도 잠을 못 이루다가 憶渠半夜愁無寐
마을에서 피리소리 나면 내 마음이 더욱 두려울 뿐이라 村笛一聲驚慟心


아들을 잘 먹이지 못하고 입히지 못한 자책감이었다. 성종 17년(1486) 초봄 아들은 결국 저 세상으로 갔다. 이해 늦봄에는 사위인 이온언(李溫彦)이 제 부친의 임지인 김해에서 과거 공부를 한다기에 떠나보냈다. 딸도 같이 갔다. 「광진나루에서 화숙(和叔)과 헤어지다」에 열심히 공부하라는 당부를 담았다. 사위의 자가 화숙인데 얼마나 애틋하였는지 무려 열한 수나 되었다. 그중 첫째 수에,

이른 봄에 아들을 잃은 슬픔을 겪었는데 春前喪子痛
늦봄에 그대를 보내는 내 마음이 어쩌겠나 春後送君心


하였다. 사위에게 준 시였지만 딸도 읽었으면 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2년 후, 사위는 불귀의 객이 되어 돌아왔다. 새재까지 한 걸음에 달렸다. 「사위의 영구(靈柩)를 맞이하며」네 수에 가라앉히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백 년이 춘몽이라지만 百年似春夢
슬픔과 환난이 꿈에도 살아나니 憂患夢中新
한없이 서쪽으로 흐르는 물을 보며 無限西流水
누각에 오른 이 사람 아무 생각도 없구나 登樓失意人


부인에게는 항상 미안하였다. 관서 여행 중에 「그윽한 그리움」두 수에 풀었는데, 첫 수에서

직녀는 능숙하게 베틀을 돌리는데 天孫自在弄機杼
견우는 일 년 내내 눈물이 마르지 않는다네 河鼓終年淚滿眶


하였다. 부인은 태연하고 자신은 가벼운 그리움에 떨고 있음을 직녀와 견우로 비유하였다. 다음은 둘째 수이다.

하루에도 열두 번 고개를 돌려보지만 日日回頭十二時
남쪽에서 오는 편지는 왜 이토록 힘들게 더디 오는지 南來魚雁苦向遲
가을 연꽃이 이슬 머금고 오가는 길이 어두워지면 秋荷露和徂徠黑
아내의 애간장 끊는 편지를 더듬어본다네 手點淑眞斷腸詩


아마 부인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던 모양인데, 이를 만지작거리며 애달파하는 모습이 선하다. 길쌈으로 어려운 살림을 꾸리고 일 년에 잠깐 보면서도 태연하게 살아가는 부인이 차라리 외경스러웠던 것이다.

슬픔마저 망가지다

남효온은 병마가 덮치며 급격히 쇠약해졌다. 여독이 겹치고 한강의 습한 기운과 지나친 술 탓이었을 것이다. 풍병(風病)과 울화증(火低症)은 폐병이 되었다. 광진나루에서 사위를 보내면서도,

폐병이 해가 가며 심해지고 肺病年來深
걱정 근심을 날마다 떨칠 길이 없다 憂愁日日侵


하며, 깊은 기침과 각혈을 호소하였다. 소갈증(渴症)도 무서웠다. 요즘의 당뇨병이다. 물은 자꾸 쓰이는데 비싸 마음껏 마실 수도 없었다. 자신을 비관한 「나를 읊는다」세 번째에 나온다.

가을 되니 소갈증이 평소보다 더한데 秋來渴病倍平昔
장안 물 값이 이리 오르니 어찌하란 말인가 其奈長安水價增
병든 여종이 항아리 들고 마른 우물가 지키다 病婢持瓶枯井上
해 쳐다보는 두 눈에서 흐르는 눈물이 고드름이 되었다네 日看雙淚自成氷


한강에서 길러 도성으로 나르는 물이 비싸 마음대로 살 수 없는 처지가 한탄스럽기도 하지만, 샘으로 물 길러 간 병든 여종이 추운 데에서 얼마나 기다렸는지 눈물이 고드름이 되었다니, 슬픔마저 망가지는 듯하다.

▲ 암각 '추강사우(秋江祠宇)'
전라남도 장흥군 장흥읍 예양리 예양서원(汭陽書院) 소재. 남효온은 명가 출신으로 영의정을 지낸 남재(南在)의 고손자이며 예문관 직제학을 지낸 남간(南簡)의 증손이었다. 조부 남준(南俊)은 사헌부 감찰을 지냈는데 부친 남전(南恮)이 벼슬을 못하고 31살에 생을 마감하였다. 모친은 영의정 이원(李原)의 손녀였다. 그러나 소릉복위상소를 올린 후로 여러 곳을 유랑하며 살았는데 전라도에서는 특히 장흥에서 오래 머물렀다. 이때 장흥 위씨(魏氏), 수원 백씨(白氏), 영광 김씨(金氏), 인천 이씨(李氏) 등의 유력 사족과 긴밀하게 지냈다. 이러한 이유로 장흥 지방 사림이 광해군 12년(1620)에 이색(李穡)을 위하여 건립한 예양서원에 숙종 7년(1681)에 배향되었다. 사진의 암각은 예양서원 뒤편에 있는데 언제 새긴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남효온과 장흥의 인연이 아직도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프레시안

남효온은 식량이 떨어지는 날도 많았다. 관청에서 곡식을 빌리기도 힘들었다. 「환곡을 얻지 못하다」후반이다.

쥐들도 처량하게 울며 굶어 죽으려 하니 凄凉鳴鼠欲飢死
영락하여 잔약해진 내 마음 더욱 암담하여라 零落殘魂倍黯然
듣건대 단약을 만들면 곡식을 끊는다고 하니 聞道煉丹能辟穀
차라리 이 신세에 신선술이나 배워볼까 寧將身世學神仙


병마보다 무서운 것이 굶주림이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연단술(煉丹術)이나 익혀볼까 하며, '누가 늙은 미치광이를 동정할까' 하였다.

남효온은 어느덧 단약에 관심을 갖고 장생술에 빠져들었다. '용호비결'즉 장생술에 심취한 나머지 세상의 비난을 뒤집어썼던 구영안(丘永安)과도 가깝게 지냈다. 언젠가 조신이 구영안을 데리고 압도를 찾아왔던 모양이다. 세 사람은 갈대를 태워 물고기와 게를 구워 먹으면서 밤을 새웠다. 「조신과 같이 시를 짓고 구영안에게 주다」가 있다. 그동안 가난으로 자식들을 울부짖게 하며 질병으로 힘들었던 신세를 한탄하였다.

가난을 견디고 배고픔을 참고 耐貧乃耐飢
곡식은 한 항아리뿐 留粟一瓦缸
십 년 낚싯대를 지켰네 十年守釣竿
추우면 거적 창을 따라 앉았다 누웠다 坐臥隨篷窓


그러면서도 구영안을 위로하였다.

그대도 입방아에 많이 올랐으니 夫君亦多口
계책이 궁하기는 우리 서로 쌍벽이라네 窮略與我雙
그래도 다행히 서로 말이 통하니 幸來話契闊
누가 살짝 와서 엿들을까 하네 耳邊疑有跫


마치, 세상의 비웃음을 받는 우리 신세가 다르지 않으니 그대 남모르게 오래 사는 비책을 가르쳐주시게나, 하는 듯하다.

남효온은 한때 연단술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부질없었다. 충청도에서 그리 높지 않은 산성에서 지었던 「홍주산성에 오르다」가 있다.

연단술 생각이 떠나지 않았지만 丹術思曾半
부서진 이 몸을 이제 어이 하겠는가 其如敗器何


연단술을 생각하면 할수록 '패기(敗器)'가 되어간다는 자각에 절망하는 모습이 선하다. 전라도에 머물 때 「장흥에서 생각 없이 읊다」에서도

신선이란 본디 뜻을 잃고 뒤뚱거리는 나그네 神仙本是蹭蹬客,
사람들은 술가를 살기를 탐한다고 비루하게 여긴다네 人道貪生鄙術家


하며, 스스로 못났다는 회한을 쓸어 담았다. 지난 세월이 한없이 쓰라렸다. 그래서 장흥에서 천관산을 오르다가,

술꾼 노릇 이십 년 오래도 되었으니 二十年前舊酒徒
지금 같은 영락을 어디 슬피 울부짖을 데도 없다 如今零落可鳴呼


한 것이다.

행주의 강바람이 너무 차구나

성종 23년(1492) 10월 남효온은 시대에 대한 갈등과 분노, 개인적 불행에 얽힌 힘들었던 서른아홉의 생을 마감하였다. 이제 살아 있을 때만큼 화제를 뿌릴 일이 없었다. 그러나 억울한 혼백이 떠돌았음인가?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둘째 사위 이총이 걸려들었다. 평소 슬픈 노래를 자주 연주하던 이총은 김일손·신용개 등과 어울리다가 "슬픈 노래가 유행하는 것은 세상의 종말이 어떻게 될지 몰라 염려하기 때문이다"고 하였는데 이것이 '난언'으로 몰려 유배를 갔다.

그런데 사화가 마무리될 즈음에 유자광이 남효온을 끌어냈다. 한때 결성하였던 '죽림우사'를 '세상을 업신여기고 조정과 나라를 우습게 여긴 불순한 만남'으로 고발한 것이다. 사사로운 은혜는 아무리 작아도 갚고, 원망은 조금도 잊지 않고 대가를 치르게 한다는 무서운 적의였다. 그러다가 자신의 아들 유방은 물론 당대의 훈구였던 노사신의 아들 노섭, 죽어서도 위풍당당한 한명회의 손자 한경기가 포함되어 있는 것을 알았다. 무척 난처하였다. 그런데 연산군이 알아차렸을까? 세 사람을 제외하고 다른 사람은 용서하지 않았다. 분명 '홍유손과 남효온 등이 이들을 끌어들인 것은 무슨 일이 있을 때 이들을 방패막이로 삼고자 하였을 것이다' 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남효온의 동지 중에서 홍유손·우선언 등은 제주와 갑산 등 변방의 봉수군(烽燧軍)으로 내쳤으며 이정은·이현손 등은 종친이라 풀어주긴 했지만 심하게 고문을 한 다음이었다.

연산군은 끝내 남효온을 좌시하지 않았다. 생모의 죽음에 대한 앙갚음을 빌미로 일으킨 갑자사화를 일으키면서 부관참시를 하고 뼈가루를 행주나루의 백사장에 뿌렸다. '소릉복위상소'가 왕실을 비판하는 풍조의 단초를 제공하였다는 것이다. 공신 천하에 대한 공세의 포문을 열었던 이심원도 피할 수 없었다. 무오사화에서 간신히 살아남았던 이총·이현손 등도 역시 목숨을 빼앗겼다. 모두 남효온과 뜻을 같이한 사이였다. '왕을 업신여기는 무리의 씨를 말린다'는 싸늘한 보복이었다.

연산군은 남효온의 아들 충세(忠世)까지 처단하였다. 충세는 자신을 체포하러 온 의금부 관리를 보고 조금도 두려움 없이 호통을 쳤다고 한다. 미친 사람 흉내를 낸 것이다. 그러나 연산군은 그대로 보지 않았다. '형벌을 가할 수 없다'는 의금부의 보고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미친 자를 살려두어 무엇하나!" 하였다. 충세 역시 행주의 차가운 모래사장에 버려졌다. 시체가 꽁꽁 얼었다. 누구도 거둘 생각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의 아내가 시신을 부둥켜안고 입김으로 녹여가며 장례를 지냈다. 그때 시어머니, 즉 남효온의 부인이 타박하였다. "시체를 꺼리지 않으니 모질다." 실로 허망한 세월이 만든 풍경이다. 허균의 이복형인 허봉(許篈)의 『해동야언(海東野言)』에 전한다.

중종반정 이후 연산군에게 화를 당한 선비나 관료들은 거의 복권되었는데, 남효온은 한참을 기다려야 하였다. 조신이 시문을 수습하여 알리자, 나라에서 문집을 간행하자는 말까지 나왔지만 때가 아니었다. 역사의 여정은 아직도 많이 남았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