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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65>
가톨릭 문화운동과 민족문화운동
이제는 아득한 옛 일이 되었으나 돌아간 박현채(朴玄埰) 선배는 나의 가톨릭 입교(入敎)를 완강하게 반대했다. 그리고 나의 입교에 가장 유연하고 긍정적으로 대응했던 것은 조영래 형이었다. 이현배(李賢培) 등 도리어 후배들이 훨씬 더 탄력이 있고 한 걸음 더 창조적이었
김지하 시인
2002.10.24 08:55:00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64>
원주시위(原州示威)
가톨릭 원주교구청의 반(反)부패 시위(示威)는 난데없이 일어난 것도 아니고 처음부터 정치적으로 조직된 것도 아니다. 그럴 만한 사연이 있었다. 원주교구는 원주MBC의 주식 지분을 갖고 있어서 명색은 공동경영으로 돼 있었다. 그런데 MBC가 순 할머니들의 구닥다리 종교로
2002.10.22 09:12:00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63>
루시아 수녀(修女)
꿈인 듯 내 곁에 앉아 있었다. 꿈꾸듯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지주교님의 주교관(主敎館) 귀빈실에 머무르며 가까운 생사탕집에 다녔다. 독사나 살모사 등의 탕제를 먹고 있었다. 지주교님, 청강 선생, 그리고 원주 중앙시장(中央市場)의 호상(豪商)인 강학(姜鶴) 형
2002.10.21 09:10:00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62>
미치코
첫눈에 알아보았다. 나는 그녀가 '요요기' 임을 알아보았다. '요요기'는 일본 공산당(日本共産黨) 본부가 있는 곳이다.한 진보적 주간지의 인터뷰 기자로 나를 찾았고 그 뒤로도 두 번 왔으니 꼭 세 번 만났다. "당신 요요기지요?"영어로였다. 화들짝 놀라
2002.10.19 09:07:00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61>
애린
그냥 애린이라고 부르자. 그녀의 실명(實名)은 박순임이지만, 내게는 여러 사람 이미지 가운데서도 애린에 제일 가까운 사람이 바로 그녀다.그녀는 지금 죽어서 없다. 내가 감옥에 있는 동안 떠났다. 손 한 번 잡아본 일 없이 사랑했다. 우리는 '오적' 직후, 출옥한
2002.10.18 09:02:00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60>
새로운 시각
나는 우선 내 친구들 가운데 가장 신뢰하는 벗 박재일 형과 의논했다. 박형은 그때 어묵공장에서 일하며 영덕 지역구 출신 국회의원의 참모진으로 참가하고 있었다. 나의 질긴 설득과 박형의 농촌지향이 합해져 박형은 우선 원주로 옮겨 가톨릭에서 경영했던 진광중학교(眞光
2002.10.17 09:16:00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59>
물 흐르는 곳
지친 나는 원주에 내려가 청강 선생과 이 모든 문제들을 의논했다."잠시 여기 와서 있게.쉬면서 천천히 생각해 보지."원주 봉살미 아래 봉산동 청강 선생의 자택(自宅)에 내가 머무르던 무렵이다. 교황들의 여러 회칙과 방대한 공의회 문헌들을 읽으면서 지내던 무렵이다.홍
2002.10.16 09:00:00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58>
불꽃
그 무렵 어느날 저녁때 조영래(趙英來) 형이 전화를 해서 급히 보자고 했다. 나는 약속장소인 명동성당 건너편 골목 입구의 한 2층 찻집으로 들어갔다. 거기 조(趙)형과 장기표(張琪杓)형, 이종률(李鍾律) 형과 민통(民統) 출신으로 동아일보 기자로 있던 심재택(沈在澤) 형
2002.10.15 09:02:00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57>
끝
'끝'은 그 무렵 동아일보 일요판 문화란(文化欄)에 실렸다. 문화부장(文化部長) 최일남(崔一男) 선생과 기자(記者)였던 평론가 김병익(金炳翼) 선배가 크게 칭찬하던 모습이 생각난다. '오적' 이후 이런 시를 쓰다니 놀라운 일이다.그랬다.또 명성이었다. 목
2002.10.14 09:00:00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56>
오적 이후(五賊 以後)
이리 가라면 이리 가고 저리 가라면 저리 가던 사람들의 마음이 이리 가라면 저리 가고 저리 가라면 이리 가기 시작한 것이 바로 오적 이후(以後)부터라고 했다.'동아일보'(東亞日報) 홍승면(洪承勉) 선생의 말이다. 그러니 겸손하라고 했다.그것이 '중'(中)
2002.10.12 09:0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