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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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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60>

새로운 시각

나는 우선 내 친구들 가운데 가장 신뢰하는 벗 박재일 형과 의논했다.

박형은 그때 어묵공장에서 일하며 영덕 지역구 출신 국회의원의 참모진으로 참가하고 있었다. 나의 질긴 설득과 박형의 농촌지향이 합해져 박형은 우선 원주로 옮겨 가톨릭에서 경영했던 진광중학교(眞光中學校)의 교사로 일하게 되었다. 그때는 악어 형도 원주주물공장을 그대로 운영하고 있을 때였다.

나도 원주로의 이사를 계획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전에 가톨릭에 대한 관계가 설정되어야 했다. 청강 선생은 어느날 나를 당시 가톨릭 원주교구장(原州敎區長)으로 계시던 지학순(池學淳) 주교(主敎)님에게 소개했다. 지(池) 주교님은 은발(銀髮)에 용모가 수려하신 분인데 성격은 뜻밖에도 소탈하고 솔직했다.

"뭔가 뜻있는 일을 하고자 한다고 들었어. 오적의 작가라는 것도 알고."
"가톨리시즘에 관심이 있습니다."

"공의회 소식은 들었지요?"
"네. 회칙들도 대강 읽었습니다."

"호랑이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지! 어디 나하고 한번 손잡고 일해 볼까. 일하기 위해서는 영세부터 받아야 할 텐데…."

직선이었다.
군소리가 아예 필요 없었다.
오직 일꾼으로서의 상호 신뢰가 중요할 뿐이었다.

나, 박재일 형 그리고 또 한 사람의 청강 선생 제자인 이창복 형. 이렇게 세 사람이 그해 부활절에 원주 단구동 성당에서 이영섭 신부님에게 영세를 받고 입교(入敎)하였다.

내가 이신부님께 교리문답 요령을 알아야 하지 않느냐고 물었을 때 신부님은
"아! 회칙들과 공의회 문헌을 다 읽은 사람한테 초보적인 교리문답이 무슨 소용이오? 괜찮아요. 그냥 가만히 있어요."

이렇게 세 사람이 다 양해되어 영세를 받았다.

나의 영세명은 '아씨시의 성(聖) 프란치스코'였다. 그것은 그때 중학생으로서 나를 따르던 '글라라'의 희망이었는데 그 뒤로도 이름을 잘 골랐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예수 이후 가장 큰 분이 프란치스코 성인(聖人)이다. 프란치스코 사상 위에 일종의 새로운 의미의 사회주의를 구축했더라면 가톨릭이 오늘날 저렇지 않을텐데 하는 생각도 가끔 했다.
내가 무엇을 알랴?

그러나 그 무렵 나를 사로잡은 전혀 새로운 이미지가 하나 있었으니 중세(中世) 때의 일본 '기리스단'(切支丹)의 비극적 상징인 '오다 줄리아'의 청신(淸新)한 이미지였다. '오다 줄리아' 기념사업회는 은(銀)으로 자그마한 접시를 만들어 사방에 보급했는데 아마도 그 무렵의 나의 신앙은 공의회 문헌과 회칙들에 나타난 토미슴과 떼야리즘의 저 거대한 우주적 스케일보다 도리어 신념 하나 때문에 그 고통스러운 유형(流刑)에서 죽어가는 한 아름다운 처녀의 해맑은 절개에 묶여 있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백서사건(帛書事件)으로 유명한 황사영(黃嗣永)의 애인 최설자(崔雪子)의 이미지, 밤새워 애인의 옷을 짓던 동대문 밖의 여성청년회장(女性靑年會長) 최설자의 이미지였다.

성녀(聖女) 데레사와 체칠리아 등 모든 마리아 이미지가 나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그 이미지의 추구는 몇몇 젊은 여인들과의 애틋한 사귐으로 나타났다. 사랑에서도 나에게 새로운 시작이 그야말로 시작된 것이다. 그 순결한 사랑의 '씨'를 처음 뿌린 것이 바로 '오다 줄리아'요, 특히 그녀의 기념인 자그마한 은잔(銀盞)이었다.

<'월간중앙'과 동시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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