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은 그 무렵 동아일보 일요판 문화란(文化欄)에 실렸다. 문화부장(文化部長) 최일남(崔一男) 선생과 기자(記者)였던 평론가 김병익(金炳翼) 선배가 크게 칭찬하던 모습이 생각난다.
'오적' 이후 이런 시를 쓰다니 놀라운 일이다.
그랬다.
또 명성이었다.
목마른 것은 나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 사회 전체가 '타는 목마름으로' 좁혀져가는 민주주의(民主主義) 광장의 회복과 변혁의 물결을, 그리고 통일의 감격을, 그보다 어떤 새로운 창조적인 문화(文化)의 획기적 출현을 고대하고 있는 것이었다.
기다림밖엔
그 무엇도 남김 없는 세월이여
끝없는 끝들이여
밑 없는, 모습도 없는
수렁 깊이 두 발을 묻고 하늘이여
하늘이여
외쳐 부르는 이 기나긴 소리의 끝
연꽃으로도 피어못날 이 서투른 몸부림의 끝
못믿을 돌덩이나마 하나
죽기 전에 디뎌 보마.
죽기 전엔
끝없는 네 하얀 살결에나마 기어이
불길한 꿈 하나는 남기고 가마
바람도 소리도 빛도 없는 세월이여 기다림밖엔
남김 없는 죽음이 죽음에서 일어서는
외침의 칼날을 기다림 밖엔
끝없는 끝들이여
모든 끝들이여 잠자는 끝들이여
죽기전엔 기어이
결별의 글 한줄은 써두고 가마.
그러나 끝내겠다는 결단의 의지는 반가운 것이지만 끝도 못 본 채 대개 거기까지 가는 과정에서 이리저리 좌(左)로 혹은 우(右)로 흩어져 녹아버리고 매몰(埋沒)돼 사라져 버리는 이 시대, 이 사회, 이 세대의 숙명!
나에게는 더욱이나 그 숙명, 그것의 가능성이 농후하게 덮어오기 시작했다.
문리대를 나보다 먼저 졸업하고 영국 케임브리지에 가서 정치철학을 공부하고 돌아와 무언가 민중과 민족을 위해 일해 보겠다고 애쓰던, 아무리 애를 써도 소용없음을 깨달으며 지쳐가던 나의 후배이며 벗인 한 친구가 어느날 술자리에서 내게 하던 말이다.
"과정에 매몰된다!"
그래
이 땅은 그런 땅이다.
끝없는 탐구심과 끊임없는 자기 결단, 끝없는 '끝'과 함께 '끝없음' 자체가 동시에 체현(體現)되지 않으면 매장되거나 흘러가 버리고 마는 이 민족, 이 사회의 한 진보주의자의 숙명!
나는 그 무렵 이 숙명에 뼈저리게 공감하며 '우물'이라는 시 한편을 또 썼으니….
우물에서 달을 길어
빠져 죽었네
두레박에
길게 누운 구름에 묻고 죽었네
꿈꾸던 산 머리는
바람에 짤려
고원
아아 고원에서 지나간
지나간 날의 눈물을 국경의 밤에
높이 울던 하얀 말
높이 울던 무성의 찰수숫대
목줄기가 찢어졌네
꽃샘 아래 철쭉목.
온갖 이쁜 소리의 방울과 우렁찬
모든 종들이 굳게굳게 입을 다물 때
밤이 깊으면 마른 번개의 밤이 깊으면
젊어서들 죽었네
홀로 깨어 일어나 촛불을 밝힌 죄로
도래질을 남기고 끄덕임도 남기고
물마른 우물전엔 홈을 남기고
두레박에 죽었네
우물에서 달을 길어
빠져 죽었네.
<'월간중앙'과 동시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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