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리 가라면 이리 가고 저리 가라면 저리 가던 사람들의 마음이 이리 가라면 저리 가고 저리 가라면 이리 가기 시작한 것이 바로 오적 이후(以後)부터라고 했다.
'동아일보'(東亞日報) 홍승면(洪承勉) 선생의 말이다.
그러니 겸손하라고 했다.
그것이 '중'(中)이요, '정'(正)이라고 했다.
술을 한잔 사주면서.
명심하고 명심했으나 홍선생(洪先生)은 그 직후 세상을 떠나셨다.
"이리 가라면 저리 가고
저리 가라면 이리 간다?"
이 말은 지금도 내 가슴에 새겨져 있다. 더욱이 '겸손'하라고. 그것이 '중정'(中正)이라고….
매스컴은 나를 단연 톱스타로 대접했고 나는 가는 곳마다 왕자였다. 심지어 택시 운전수나 찻집 주인마저 나를 알아보았다. 나는 '겸손'을 애써 지니려 했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점차 점차 '매스컴 중독(中毒)'에 빠져들었다. 체 게바라와 함께 싸웠던 프랑스 사람 '레지 드 브레'가 질타한 프랑스 지식인들의 '매스컴 중독'을 읽다 속으로 뜨끔했다.
'뜨끔'
그 정도 가지고는 안된다.
'섬뜩'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
바로 멸망의 길이었기 때문이다.
명성을 도리어 이용하기로 작심했다.
명성을 민중운동의 전진, 특히 민족문화운동의 비약에 활용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나의 그 무렵의 '매스컴 중독'과 '명성중독'(名聲中毒)이 나의 이같은 목적으로 용서받기를 바랐다. 그러나 아무리 내가 내 이름과 사회적 명망을 이용해 그 운동을 용의주도하게, 때로는 과격할 정도로 끌고 가도 내내 지워지지 않는 것은 역시 그대로 있는 '중독'의 냄새요, 자취였다. 내 스스로 깨달아 깜짝 깜짝 놀라고 몇몇 선배와 동료들이 지적해 깜짝 깜짝 놀라곤 했으니….
어느날 천관우(千寬宇) 선생이 잔뜩 볼이 부어서 왈,
"신문은 물거품이오. 기대 걸지 마시오."
교통사고로 죽은 연극계의 한 꽃 박영희(朴英姬)는 모처럼 내가 사는 술잔 앞에서
"많이 변했어. 변하지 말아요, 제발!"
그날 저녁. 그렇다.
내가 입원해 있던 서울대병원 병실에 정보부원들이 들이닥쳤다. 병원측에서 항변했으나 부질없는 것, 나는 즉시 남산으로 끌려가 슬리퍼 바닥으로 양쪽 뺨이 부풀도록 얻어맞았다. 그리고 첫날은 밤을 새워 취조했다. 괘씸죄였다.
우습다.
그런 상황에서도 동료들 사이에 원칙으로 돼 있던 '취조받는 법'을 잊지 않으려고 열심히 기억하고 죽을 힘으로 머리에 새기고 있었으니….
"1차 취조에서 열 개를 양보하면 2차 검찰 취조에서 다섯 개는 되돌려받고 다섯 개만 양보하고 3차의 법정에서는 그것마저 몽땅 지워 버려라!"
그러매 당시 사상계 사장이었던 부완혁 선생이 나를 놀려대며
"아는 것도 모르는 척
모르는 것도 아는 척!"
그랬다.
부(夫)선생의 이 농담은 날카롭고 정확했다. 법정에서 내가 사회주의 등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것이 없는 척했고, 잘 알지 못하는 동양(東洋)의 고전(古典)이나 청백리사상(淸白吏思想)에 대해서는 많이 아는 척했기 때문이다.
대법정은 만원이었고 함석헌·장준하(張俊河) 선생을 비롯한 여러분들이 방청했다. 부완혁 선생, 김승균 형과 신민당 기관지 '민주전선'의 주필(主筆)과 내가 법정에 섰다.
우리의 진술(陳述)과정은 동아일보를 비롯한 도하 각 신문에 대서특필 되었고, 미국과 유럽과 일본에까지 알려졌다.
뻔한 싸움이었다. 박정희 당시 대통령과 당시 신민당 당수인 유진산이 독대를 통해 문제를 해소하고 당시 재판장이었던 지금 한나라당 의원 목요상(睦堯相)씨가 직권으로 보석했다.
100일 동안의 구속이었다.
별 고통은 없었다.
다만 사전(事前)의 정신적 수양이나 깊은 철학적 교양(敎養) 없이 투지와 정열(情熱)과 혁명적(革命的) 구도심(求道心), '요기 싸르'에의 피투성이 도전만으로 그 명성(名聲)과 세인(世人)의 기대에 부응할 수는 없었다.
그날 밤, 교도소 문을 나오자 여러 사람들이 자기 차를 타라고 했다. 나는 장준하 선생의 차로 돌아오며 생각하고 또 생각했으며 명심하고 또 명심했다.
"곁길을 가지 마라!
똑바로 가라!
들뜨지 마라!
침착, 냉정해라!"
그러나 모두 부질없는 짓이었다.
바로 그 이튿날 유진산 씨를 찾아가 지나친 야당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고 장준하 선생이 베푼 술자리에서는 술에 취해 실수를 연발했으며 부 선생과 함께 찾아가 향응을 받은 정희여사(正喜女史)의 산옥(山屋)에서는 경망스럽게도 나의 앞날에 대한 계획마저 비치고 말았다.
장안(長安)의 내로라 하는 사람들이 직·간접으로 연락해 만나자고 했고, 만나서는 반드시 향응을 베풀었다. 칭송도 있고 비아냥도 있고 묵묵한 경침(警針)도 있었다.
한 사회에, 서울 바닥에 '상류'(上流)라고 부르기도 뭣하고 '노블리스 오블리제'라는 말로는 과분한 어떤 골목, 어떤 장소, 어떤 집단이 있었다. 그로부터 발사돼 오는 인광 같은 유혹은 참으로 강렬한 것이었다.
그 속에 끼워주는 것.
그것은 대단한 일이었는데, 서울이 나 같은 촌놈에게 그것을 허용하는 듯했다는 것이다.
그것의 정체는 무엇일까.
나는 목마른 청년이었다.
칭찬에 굶주리고 명예에 굶주리고, 환락에 굶주리고 아름다움에 굶주렸다.
문리대 시절의 벗이자 한때 사상계 편집장을 지낸 황활원이 경영하던 '주촌'(酒村)이라는 전통술집에 나가 매일 밤 취하고, 그가 경영하던 출판사 '한얼문고'에서는 나의 첫 시집 '황토'(黃土)가 간행되었다.
겨울이었다.
출판기념회가 열렸던 신문회관, 지금의 프레스센터 지하실에 사람, 사람, 사람들. 그것도 명사, 명사, 명사들이 줄지어 들어와 일대 성황을 이루었다.
그때 한 꽃다발이 배달돼 왔다. 그 꽃다발에는 꽃이 없었다. 시퍼런 동백 잎사귀들로 엮인 잎다발이었는데, 그 복판에 자그마한 명함이 한장 끼어 있었다.
'지하에게
유끼로부터'
무교동의 그 '유끼'가?
살아 있구나!
왜 내용이 없을까.
그것은 새하얀 설원(雪原)에 단 한송이 피어 나그네를 혼란에 빠뜨리는 기이한 '알라바스터'꽃 같기도 하고 푸른 바닷물 위에 뚝뚝 떨어지는 남해(南海)의 붉은 동백꽃 같기도 했다.
그 무렵 '주촌'에서 만취해 벗들 앞에서 지용(芝溶)의 '카페 프란츠'를 외우기 시작했을 때 내 곁에 앉아있던 고(故) 박현채(朴玄採) 선배가 나직한 목소리로
"너무 진하다! 이상해!
시골 가서 좀 쉬는 게 어때?"
고마운 충고였다.
그러나 나는 피할 수 없었다.
술에 만취해 걷다 걷다 지쳐 들어간 명륜동 성균관대 돌담 곁에 붙어 있는 어느 한 여관, 잠에서 깨어난 그 새벽에 나는 이제 '끝'을 생각해야 하는 시인, 르네 클레망의 영화 '태양을 가득히'에서 '최고야!'라고 만족하는 그 마지막 순간 푸른 바다의 한 돛단배처럼, 배경음악의 찢어질 듯한 그 트럼펫 소리처럼 '끝'을 각오해야 하는, 책임감 있는 한 사람의 시인이 되어야 한다는, 그런 생각에, 그런 생각에 그런 생각에….
아! 그때 방안의 벽지를 뜯어내 벽 위에 쓰듯 그 위에 한 편의 시를 썼으니 바로 '끝'이 그것이다.
<'월간중앙'과 동시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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