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아득한 옛 일이 되었으나 돌아간 박현채(朴玄埰) 선배는 나의 가톨릭 입교(入敎)를 완강하게 반대했다. 그리고 나의 입교에 가장 유연하고 긍정적으로 대응했던 것은 조영래 형이었다.
이현배(李賢培) 등 도리어 후배들이 훨씬 더 탄력이 있고 한 걸음 더 창조적이었다. 후생가외(後生可畏)란 이를 두고 이름이리라!
나는 늘 강조해 왔다. "새 열매 안에는 새 씨앗이 있다. 씨앗은 진화한다." "새로운 상황에 대한 새로운 전술은 새 전략을, 새 전략은 새 이념을 낳는다. 진리의 용은 늘 변화하며 진리의 체(體)는 불변하지만, 그 불변은 끊임없는 변화를 내포하고 있다."
동양사상사(東洋思想史)에서 입고출신(入古出新)이니 법고창신(法古創新)이니 하는 말들의 근본에, 선천(先天)은 후천(後天)을 낳고 후천 속에서 선천이 새로워진다는 말들의 근본에 구약(舊約)은 신약(新約)을 낳고 구약은 신약 속에서 제 근본을 회복한다는 말들의 근본에 이와 같은 싹과 열매, 열매와 새 '씨알'의 관계에 대한 진리가 압축되어 있다.
이미 나는 전술적 또는 전략적 통일전선론을 넘어섰고, 그렇기 때문에 당(黨)기능을 가진 전선, 전선당(戰線黨)이름의 뇌수(腦髓) 안에서 끊임없이 새 사상(思想), 새 철학(哲學), 새 미학(美學)과 새 문화(文化)를 창조하기 위해 상호 토론하며 그 변화 중에 있는 뇌수를 새로운 중심으로 하는 탈중심적(脫中心的) 네트워크로서의, 역사상 전혀 새로운 전선을 주장해온 것이다.
일본 중앙공론사(中央公論社)에서 간행(刊行)한 그 문제에 관한 나의 메모 첩(帖) '불귀'(不歸)의 사상적 핵심은 바로 이와 같은 사고에 있었다. 그러니 원리주의자(原理主義者), 근본주의자(根本主義者) 도그마 신봉자(信奉者)들, 극좌(極左)와는 잘 어울릴 수 없었던 것이다. 반대로 극우적(極右的) 반공주의자(反共主義者)들과도 어울리기 힘든 것은 마찬가지였다.
변화의 예상 속에서의 가톨릭 진보사상, 해방신학, 민중신학이었기 때문에 그 변화를 목표로 하는 가톨릭 문화운동과 민족문화운동은 서로 다르면서도 함께 어울릴 수 있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었다. 요컨대 화이부동(和而不同), 부동이화(不同而和)가 이 문제에 대한 나의 신조였다.
가톨릭문화운동에 찬성하는 신부님들, 신학자(神學者)들과 김민기(金敏基)·이상우(李祥雨)·김석만(金錫滿) 등이 어울린 한 연극이 마련되었으니, '금관(金冠)의 예수'가 바로 그것이다. 가톨릭 쪽의 사람 이동진(李東震)이 이미 플롯을 세운 위에 내가 이전에 쓴 '구리 이순신(李舜臣)' 그리고 오스카 와일드의 동화를 끌어들여 대폭 뼈대를 수정한 것이고, 이종률(李鐘律)과 우리쪽 멤버들이 연습과정에 대거 참여해 '어렌지'를 과감하게 함으로써 거의 새 작품으로 되었다.
이 '금관의 예수'는 노래가 더 유명한데 나의 가사에 김민기 아우가 곡을 붙인 것이다. '가톨릭 문화' 자(字)가 붙어있고 신학자(神學者)들이 관여했으니 신도(信徒)나 성직자(聖職者)들의 관람은 불문가지였다.
특히 금관을 벗은 예수 고상(苦像)의 웅변에 수녀들이 흐느껴 우는 것을 보고 인간에게 감성(感性)과 이성(理性)만으로는 아무 것도 정곡(正鵠)을 찌를 수 없고 거기에 제3의 힘, 아니 근원적인 힘 영성(靈性)이 발동되어야 무엇인가 이루어질 수 있음을 끝없는 감탄사와 함께 절감(切感)하였다.
나는 이제 가톨릭을 떠난 지 오래지만 가톨리시즘이나 불교의 사상을 근본으로 깔고 그 위에 세우는 철학 및 과학(科學)과 예술(藝術)의 집만이 진정한 문화요, 문화운동(文化運動)임을 알게 되었다. 민족문화운동도 여기에서 재출발(再出發)해야 된다고 강조했으니, '마당극'이 이제 다시금'마당굿'으로 재편성되어야 한다는 채희완(蔡熙完) 아우의 주장은 참으로 정당한 것이다.
그러매 가톨릭문화운동과 민족문화운동은 사실에 있어서 서로 모순되는 게 아니라 상호보완적(相互補完的) 관계에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유(思惟)들은 요즈음 비롯된 것이 아니다.
문자화되지는 않았다 해도 나와 우리 아우들의 생각 속에 이미 잉태(孕胎)된 새 생각들인데, 결국 이것이 우리 고유의 전통인 선도(仙道)나 풍류도(風流道)의 삼극사상(三極思想), 삼일사상(三一思想), 천부사상(天符思想)임을 나중에야 확인(確認)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조화사상에 접근하는 과정은 수많은 도그마의 지뢰(地雷)밭을 통과하는 것이었고, 나 자신의 사유도 그런 지뢰들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음을 여기서 밝혀 말하고 싶다.
<'월간중앙'과 동시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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