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애린이라고 부르자. 그녀의 실명(實名)은 박순임이지만, 내게는 여러 사람 이미지 가운데서도 애린에 제일 가까운 사람이 바로 그녀다.
그녀는 지금 죽어서 없다. 내가 감옥에 있는 동안 떠났다. 손 한 번 잡아본 일 없이 사랑했다. 우리는 '오적' 직후, 출옥한 바로 그 뒷날 '체크'를 위해 서울대병원에 입원했을 때 만났다. 거기 나의 담당 간호원이었다.
처음 나를 보고는 미소지었다.
"그 거친 말솜씨와 지독한 욕설이 어디서 나오느냐"고 물었고 "내 얼굴은 그 욕설과는 거리가 멀다"고 웃으면서 말했다. 얼굴이 노오래서 병적이었으나 너무나 아름다워 차라리 멀리서 바라보는 것이 나을 듯 싶은, 사람 가슴 저리게 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퇴원할 때 내 방에 뛰어들었다.
"그냥 헤어질 수는 없어요.
내일 혜화동 '블루'라는 까페에서 봐요. 꼭 나오세요."
이번에 내가 웃었다. 욕망과는 거리가 먼 기이한 감정이 나를 방문했다. 바로 오다 줄리아의 은잔 같은 이미지가 그때 이미 그에게 그리고 내게 와 있었다.
이튿날 나는 '블루'에서 메모지에 썼다.
"우리는 가능할까."
대답이 말로 돌아왔다.
"늦었어요. 5년 전이었다면…."
"아이가 있나?"
"네."
이것으로 끝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계속 만났다. 그러다 그녀는 결혼했다. 결혼 직전 비원(秘苑) 안 숲속에 나란히 앉아 얼마나 많은 유행가를 불렀던지! 잘 가라는 축가(祝歌)였을 것이다. 그날 내가 입고 간 버버리 코트가 내게 잘 맞는다고 말하는 그 새카만 눈동자가 문득 스치는 흰구름을 반영하고 있었다. 검은 눈에 흰 빛이 얼른 떴다 사라졌다. 눈물 같기도 했다.
그리고는 갔다.
내게는 그녀가 애린이었다.
애린은 갔다.
그러나 두세달 뒤던가 전화가 왔다. 만났더니 병색이 아주 아주 짙었다. 약을 먹고 떠나려는 순간 발견됐다는 거였다. 혼수상태에서 내 이름을 불렀다는 것이다.
"자기가 뭔데 내가 자기 이름을 불러?"
택시 안에서 잠깐만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도 괜찮으냐고 물었다.
나는 기댄 그 사람에게 말했다.
"죽을 용기 있거든 그 용기 갖고 살아 봐!"
내가 비어(蜚語) 사건으로 마산요양원에 연금(軟禁)돼 있다 올라왔을 때도 또 한번 만났다. 적선동(積善洞)에 있는 한 찻집에서.
얼굴이 창백했다.
꽃이었다.
약을 또 먹었고 또 토했다고 한다.
또 다시 택시에서 어깨에 기댔다.
그리고 나서 그 뒤로는 보지 못했다. 소문도 없었다. 그 뒤 단 한 번도 보지 못했고 소식도 듣지 못했고 어디 물어볼 데도 없었고 그리고 해남 이후 광주에선가 한밤에 고서의 한식집으로 가는 찻속에서였다.
그녀 같았다.
영상이 그랬다. 차창밖 어둠 자체가 그녀 같았다. 새카맸다.
우는 듯했다.
사슬 속에 있는 듯했다.
자살했구나!
그 순간 이상하게도 그녀가 병실에 있는 나에게 씨근거리며 뛰어와 내 귀에다 대고 낮은 소리로 일러주던 일이 떠올랐다.
"내일부터 간호원 파업이 있어요."
이상하다.
그녀는 내가 그 파업 소식에 기뻐하리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월간중앙'과 동시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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