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원주교구청의 반(反)부패 시위(示威)는 난데없이 일어난 것도 아니고 처음부터 정치적으로 조직된 것도 아니다. 그럴 만한 사연이 있었다.
원주교구는 원주MBC의 주식 지분을 갖고 있어서 명색은 공동경영으로 돼 있었다. 그런데 MBC가 순 할머니들의 구닥다리 종교로 가톨릭을 폄하하고는 제멋대로 독주하고 있었다. 주교님과 청강(淸江) 선생과 기획실장 영주(榮注) 형님과 나는 이미 여러 달 전부터 이 건을 불씨로 하여 큰 시위, 반부패 운동을 불지르기로 작정했다.
그래서 내가 주교관에 머무는 동안 그 작업을 진행했던 것이다. 즉, MBC와 관계(官界)에 뜸을 들이고 있었다. 알아차릴 리 없는 MBC와 관(官)쪽에서 자꾸만 무리수를 축적하고 있었다. 숱한 무리수가 훗날 3일간에 걸친 대규모 시위로 터졌을 때, 그들은 할 말이 없었으니 우리의 현실적인 요구 조건을 다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때가 무르익기 시작한 것은 그해 추석(秋夕)이었다. 봉산동에 있는 가톨릭 묘지에서 주교님 집전으로 사자(死者)들을 위한 추석 미사가 있었다. 예외적(例外的) 행사였다. 미사중 주교님은 MBC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어 우리 사회의 공적 기능(公的機能)과 관계 전부가 썩어 있음을 개탄했다. 이것이 시작이었다. 몇 단계의 사전 포석(事前布石)을 거쳐 드디어 시위에 들어가기로 스케줄을 확정했다.
나는 그 무렵 서울에서 모든 운동의 통제와 조율, 촉매를 임무로 하는 한 그룹을 갖고 있었으니 돌아간 조영래(趙英來) 변호사와 박(朴), 김(金) 두 사람과 나였다. 조영래 변호사가 두 차례나 내가 묵고 있던 원주 주교관의 귀빈실에 다녀갔고, 원주시위를 서울의 학생운동과 신·구교 및 언론계와 재야지도자층에게로 연결시키는 일을 맡았다.
이제 공적인 표현에서 MBC 건은 완전히 배제해버리기로 했다. 선언문이 쓰여졌고 성토문, 결의문 등이 확정되었다. 선언문은 군부정권 전체의 부패호화를 격정적으로 성토했다. 내가 종교의 문건으로는 너무 과격하지 않나 걱정했을 때 지(池) 주교님 말씀이 있다.
"옛날 예언자들이 모두 과격파들이야! 막 두들기라고! 그래야 정신이 번쩍 들지!"
선언문 등 문건 전체는 사전에 인쇄되어 조 변호사를 통해 이미 '동아일보'(東亞日報)의 천관우 선생에게 전달되었고 박형규(朴炯奎) 목사님과 박 홍(朴弘) 신부님, 그리고 학생운동 지도부에 전달되었다. 외신(外信)에까지 전달되었으니 이미 세계적인 사건이 되었다.
2천여명의 신도들이 성당 마당에 모여 시위를 시작하자마자 동아일보가 대서특필하기 시작했다. 하늘이 놀라고 땅이 잠을 깰 사건이었다. 희미한 촛불 밑 할머니들의 '중얼중얼' 종교인 가톨릭이 반정부 시위를 하다니! 그것도 서울이 아닌 시골에서! 2천~3천명씩이나!
사전 조율에 따라 각 대학 학생운동 지도 역량들이 수십 명씩 내려와 농성에 참가했고, 하루에 한 번씩 거리 시위를 시도하는데 대형 미사 때의 그 화려한 복장을 한 주교님과 신부님들이 앞장서서 진압 경찰 및 경찰서장 등과 대치하는 중에 시위대의 이동 선전반은 계속해서 정부의 실정(失政)과 반민주적 정치, 부패 스캔들에 대한 공격을 쏟아부었다.
나와 기획실장, 그리고 박재일 형 등은 사제관에 틀어박혀 정보를 수집하고 중요한 판단이나 문건, 그리고 스케줄의 변동이나 우발적인 일 등에 대처하는 통제탑 기능을 했다. 신탁(神託)과 독신(獨身)과 수양(修養)의 대명사인 신부(神父)님들이 마이크를 통해 수천 신도들과 구경 나온 시민들 및 보도진 앞에서 돌아가며 성토(聲討)하고 공격하는 예언자적 모습들은 참으로 기상천외의 웅혼한 숭고 그 자체였다.
지금 한나라당 원내총무인 이재오 형이 연설했고 '내일신문' 발행인인 최영희씨가 학생대표자격으로 인사했다. 숱한 성토가 진행되었으며 밤마다 횃불이 켜지고 사제관 전화통은 불이 났다. '가톨릭시보'사에서 기자가 온 직후 가톨릭 중앙협의회(中央協議會)의 성직자들이 주교님을 만나 설득하며 불을 끄려고 끊임없이 시도했다.
사흘 동안이었다. 이 사흘 동안에 한국의 종교 상황, 민주화운동 세력의 상황, 학생운동의 상황 등이 근본적으로 방향을 수정했다. 그 북새통 같은 소식 교차의 사제관에 있으면서 나는 드디어 한국의 정세가 아연 바뀌고 있음을 실감했다. 원주의 근거지는 확립되었다. 전 종교의 현실참여는 이제 시간문제다. 우익의 천관우 선생과 좌익의 조영래 변호사가 한 채널을 이용함으로써 전선(戰線)은 머지않아 새 전술, 새 전략 단계를 지나 새로운 이념(理念)을 창조할 것이 분명해졌다.
원주 시위는 일본으로, 로마와 프랑스 언론 등을 통해 유럽으로, 미국으로 그 소식을 확산하며 미구(未久)에는 남미의 해방신학전선과 손을 잡을 것이다. 이미 그때는 우리가 불교나 이슬람 등과도 연대하는 단계에 있을 것이니, 그와 같은 경륜(經綸)은 이제 현실적 사건으로 바로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나는 시위가 끝난 뒷날 새벽, 루시아 수녀가 모는 지프 뒤쪽에 엎드린 채 험상궂은 얼굴들이 포위한 사제관을 빠져나와 횡성(橫城) 가는 길목의 한 굽이에서 얼른 내려 원주 시내의 고속버스 터미널로 돌아가 서울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기인 한숨을 내쉬었다. 한 굽이가 지난 것이다.
이미 시위 바로 이튿날 원주MBC 문제는 그쪽에서 먼저 사과함으로써 법적(法的), 공적(公的)으로 해결되었고, 기획실장의 측근 한 사람이 우리쪽 경영권자로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지 주교님의 승리였고 청강 선생의 승리였다. 그 장구(長久)하고 치열했던 가톨릭의 정치 참여, 정의구현전국사제단(正義具現全國司祭團)의 그 무서운 위력은 바로 이 사흘간의 원주시위가 남상(濫觴)이었다.
<'월간중앙'과 동시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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