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년 12월 24일 10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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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과 놀다 <48>
아버지 살린 박실의 효성
간관은 왜인을 도망치게 한 책임을 물어 예문춘추관 대학사 한상질과 중추원 상의 유양을 탄핵했습니다. 앞서 계림부 윤으로 있던 유양이 경상도 관찰사로 있던 한상질에게 “사람을 왜구에게 보내 어르고 달래면서 설득해 항복하게 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중 의운(義雲)을
이재황 실록연구가
조선왕조실록과 놀다 <47>
“왜구들 속은 알 수가 없어...”
1397년 1월, 왜구의 무리가 항복하러 울주포(蔚州浦)로 들어왔습니다. 왜적의 괴수인 나가온(羅可溫)은 그 아들 도시로(都時老) 등을 계림부 윤 유양에게 볼모로 보냈으나, 유양은 병 때문에 나가 보지 않았습니다. 왜구는 자신들을 꾀어 함정에 빠뜨리려는 것이 아닌가 의심
조선왕조실록과 놀다 <46>
대마도 정벌과 왜구의 잇단 항복
몇 달 뜸하던 왜구는 1396년 6월부터 다시 나타나기 시작해 8월부터는 남 동해안에 대거 몰려왔습니다. 1백20 척이 한꺼번에 몰려오는가 하면 바닷가 성들도 여럿 함락시키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12월, 나라에서는 결국 문하부 우정승 김사형을 5 도 병마 도통처치사(都
조선왕조실록과 놀다 <45>
여덟 대문을 세우다
도성 공사는 1396년 8월에 재개됐습니다. 이때 경상 전라 강원도에서 징발된 일꾼은 모두 8만 명이었습니다.이에 앞서 간관들은 거듭 글을 올려 성 쌓는 공사를 중지하라고 청했습니다. 백성의 힘을 쉬게 함으로써 가을갈이에 차질이 없도록 하고, 군사 훈련에 온 힘을 쏟아
조선왕조실록과 놀다 <44>
중국 황제에게 올린 글이 말썽
1396년 2월, 설날 축하 사신 유구(柳玽)를 따라 중국에 갔던 김을진(金乙珍)과 고인백(高仁伯) 등이 돌아와 예부(禮部)의 공문을 전했습니다. 설날을 축하해 올린 글에 놀리고 멸시하는 부분이 있다며, 글 지은 자를 보내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머지 사신 일행은 ‘인질
조선왕조실록과 놀다 <43>
현비 강씨의 죽음
태조의 첩이지만 본처 한씨가 개국 직전에 죽는 바람에 조선 왕조의 첫 왕비가 되는 행운을 안았던 현비 강씨가 1396년에 죽었습니다.현비는 이해 6월 말에 병이 났습니다. 임금은 옛 궁으로 거처를 옮기고 중들을 내전에 모아 부처에게 빌었으며, 사람을 회암사에 보내 빌기
조선왕조실록과 놀다 <42>
도성 공사에 12만 장정 동원
새 도읍에 궁궐과 종묘를 짓고 나자 태조는 곧바로 성곽 공사에 착수했습니다. 도읍을 옮길 당초부터 궁궐 종묘 성곽의 3대 공사가 과제로 떠올랐지만, 공사 규모와 시급성 등의 기준에 따라 궁궐과 종묘를 먼저 짓고 성곽을 뒤로 미루었던 거죠. 궁궐과 종묘 공사가 마무리
조선왕조실록과 놀다 <41>
새 궁궐 이름은 ‘경복궁’
새 궁궐도 궁궐이지만 종묘가 완성됐으니 조상들을 옮겨 모시는 일이 급했습니다. 윤9월로 넘어가면서 임금은 종묘이안도감(宗廟移安都監)을 설치하는 한편, 종묘 공사를 감독한 제조관(提調官)들에게 잔치를 베풀고 각각 대궐 말 1 필씩을 내려주었습니다.그달 하순에는 예
조선왕조실록과 놀다 <40>
새 도읍에 새 궁궐
새 도읍으로 옮겨온 직후인 1394년 11월부터 종묘 궁궐 성곽 공사가 시작됐습니다. 임금이 직접 도평의사사와 서운관 관원들을 인솔하고 종묘 사직 세울 터를 살폈으며, 용산강(龍山江)에 가서 종묘의 재목을 살펴보았습니다. 공작국(工作局)을 설치하고 도평의사사의 건의에
조선왕조실록과 놀다 <39>
목은 이색과 야은 길재
조선의 건국에 반대해 충절을 지켰다는 고려 말의 3은(三隱)은 목은(牧隱) 이색, 포은(圃隱) 정몽주, 야은(冶隱) 길재(吉再)의 세 사람을 꼽기도 하고 길재 대신 도은(陶隱) 이숭인을 넣기도 합니다. 호(號)에 모두 ‘은(隱)’자가 들어 있지요. 그러나 ‘숨어 살았다’는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