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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과 놀다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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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과 놀다 <42>

도성 공사에 12만 장정 동원

새 도읍에 궁궐과 종묘를 짓고 나자 태조는 곧바로 성곽 공사에 착수했습니다. 도읍을 옮길 당초부터 궁궐 종묘 성곽의 3대 공사가 과제로 떠올랐지만, 공사 규모와 시급성 등의 기준에 따라 궁궐과 종묘를 먼저 짓고 성곽을 뒤로 미루었던 거죠.

궁궐과 종묘 공사가 마무리되던 1395년 9월에 임금은 좌복야 남재와 경흥부(敬興府) 사윤(司尹) 조순을 시켜, 이듬해 1월에 각 도 백성들을 징발해 도성을 쌓겠다는 뜻을 좌 우 정승에게 알리게 하고 공사를 빨리 마치라고 지시했습니다.

직접 도성 쌓을 터를 둘러보고, 도성조축도감(都城造築都監)을 두어 판사 부판사 사(使) 부사(副使) 판관 녹사 등 관원들을 임명했습니다. 성터를 정하는 책임은 삼사 판사 정도전에게 맡겼습니다.

공사가 시작된 것은 임금의 지시대로 이듬해 1월이었습니다. 경상 전라 강원도와 서북면의 안주 이남, 동북면의 함주 이남 장정 12만 명이 동원됐습니다. 공사를 시작하면서 도성 터를 닦고 백악(白岳)과 5방 귀신에게 제사를 지냈습니다.

이에 앞서 성터를 측량하고 천자문 글자로 구간 이름을 나누어 정했는데, 백악(白岳) 동쪽에서 천(天)자로 시작해 백악 서쪽에서 조(弔)자로 끝났습니다. 서쪽 산 석령(石嶺)까지 합쳐 길이가 모두 6만 자 가까이 됐는데, 6백 자마다 한 글자씩 붙이니 모두 97 글자였습니다. 한 글자마다 6 호(號)로 나누었으며, 두 글자마다 감독으로 판사 부판사를 각각 1 명씩 두고 사(使) 부사(副使) 판관 12 명을 두었습니다.

각 도의 고을과 가구 수에 따라 일을 나누어 맡았습니다. 제1~9구역은 동북면, 제10~17구역은 강원도, 제18~58구역은 경상도, 제59~73구역은 전라도, 제74~97구역은 서북면이었습니다.

인구가 적은 동북면과 강원도는 8~9 개 구역만 맡았고, 경상도는 전체 97 개 구역의 40%를 넘는 41 개 구역을 맡아 가장 부담이 컸습니다. 경기와 충청도는 궁궐 공사에 동원됐기 때문에 도성 공사에는 제외했으며, 경기 장정 2백 명만이 소격전 공사에 나갔습니다.

공사 감독자들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을 시키니, 임금은 날씨가 매우 춥다며 밤 작업은 금지시켰습니다. 임금이 직접 성 쌓는 공사를 둘러보아 어떤 때는 사흘을 잇달아 공사장에 나가기도 했습니다. 또 성 쌓는 곳에 내시를 보내, 얼어 죽는 자가 있을까 염려되니 앞으로는 바람 불고 눈 내리는 날은 공사를 하지 말라고 지시했습니다.

농사철이 다가오자, 2월 말까지 1차 공사를 마무리짓고 일꾼들을 모두 돌려보내 농사짓게 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성문 밖 세 곳에서 수륙재를 베풀어 그동안 공사장에서 죽은 자의 혼령을 위로하도록 했으며, 또 죽은 사람의 집도 3 년 동안 부역을 면제해주도록 했습니다.

이때의 1차 공사에서 성터가 높고 험한 곳은 석성(石城), 평탄한 산에는 토성(土城)을 쌓았습니다. 높이 15 자로 쌓은 석성은 길이가 1만 9천2백 자였고, 너비 18~24 자, 높이 25 자로 쌓은 토성은 길이가 4만 3백 자였습니다. 수구(水口)에는 구름다리를 쌓고 양쪽에다 16 자 높이의 석성을 쌓았는데, 길이가 1천50 자였습니다.

동대문은 지세가 낮아 밑에 돌을 쌓고 나서 성을 쌓았기 때문에 힘이 다른 곳보다 두 배나 들었습니다. 경상도 안동부 성산부(星山府) 사람들이 그 일을 맡아 마치지 못했는데, 경상도 도관찰사 심효생은 사람들을 10여 일 더 두고 마치게 해서 다시 올라오는 번거로움을 없애달라고 청했습니다. 그러자 한성부 판사 정희계가 아뢰었습니다.

“백성들을 속일 수 없습니다. 얼마 전에 ‘씨뿌릴 때가 되었으니 성 쌓는 사람들을 모두 돌려보내 농사를 짓게 하라’고 지시하셔서 듣는 자들이 모두 기뻐했는데, 이제 안동 성산 사람만 남겨두면 그 민심이 어떻겠습니까? 더욱이 마치지 못한 것은 지형 때문이지, 백성들이 게을러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임금이 옳게 여기고 함께 돌려보내도록 지시했습니다. 그러고는 도평의사사에 지시해 축성을 감독한 중앙과 지방 관리들에게 잔치를 베풀도록 했습니다.

자은종(慈恩宗) 도승통(都僧統) 종림(宗林)과 전 판사 윤안정(尹安鼎)이 판교원(板橋院)을 짓고 성 쌓으러 왕래하는 사람들을 보살폈는데, 우정승 김사형이 듣고 보고하니 쌀 콩과 소금 간장을 내려주었습니다. 이들은 병이 난 사람들에게 의원을 불러 진찰시키고 약을 지어 치료해주고 음식도 주었으며, 병이 나으면 식량까지 주어 보냈습니다.

또 진원군(珍原郡, 장성) 백성의 딸 도리장(都里莊)도 미담의 주인공으로 이름이 올라 무명을 내려주었습니다. 도리장은 아버지가 성 쌓는 공사에 갔다가 병이 들었다는 말을 듣고 통곡한 뒤, 남자 형제가 없으니 자신이라도 가서 살펴드려야 살아 돌아오실 수 있겠다며 남자 옷으로 바꿔 입고 그날로 길을 떠났습니다. 길가에서 병들어 누워 있는 사람을 보기만 하면 꼭 들어가 보았는데, 판교원에 이르러 다 죽게 된 아버지를 발견해 정성껏 치료하고 부축해 돌아왔습니다.

임금은 전라도 사람들 가운데 성 쌓는 공사에 왔다가 병들어 죽은 자가 더욱 많다는 얘기를 듣고, 죽은 사람들 집에 쌀 콩을 내려주도록 지시했습니다.

이때 성을 튼튼하게 쌓지 못했던 축성 제조 이성중은 나중에 순군부 옥에 갇혔다가 10여 일 만에 풀려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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