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뜸하던 왜구는 1396년 6월부터 다시 나타나기 시작해 8월부터는 남 동해안에 대거 몰려왔습니다. 1백20 척이 한꺼번에 몰려오는가 하면 바닷가 성들도 여럿 함락시키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12월, 나라에서는 결국 문하부 우정승 김사형을 5 도 병마 도통처치사(都統處置使)로, 예문춘추관 대학사 남재를 도병마사로, 중추원 부사 신극공(辛克恭)을 병마사로, 전 도관찰사 이무를 도체찰사로 삼고, 5 도의 병선을 모아 일기도(一歧島) 대마도를 공격케 했습니다.
떠날 때 임금이 남대문 밖까지 나가 전송하고, 김사형에게 부월(鈇鉞)과 교서를 주고 안장 갖춘 말과 털갓 갑옷, 활 화살, 약 상자를 내려주었으며, 남재 이무 신극공에게는 각각 털갓 갑옷과 활 화살을 내려주었습니다. 도당에서는 한강에 나가 전송했습니다.
사의(司衣) 사직(司直) 송득거(宋得居)와 전 별장 노문리(盧文理) 등이 대궐에 나아가 참전을 청하니, 임금이 장하게 여기고 5 도 도통처치사 휘하로 보냈습니다.
이 무렵 왜구의 배 60 척이 영해 축산도에 이르렀는데, 왜구 만호 임온(林溫) 등이 관찰사 한상질에게 글을 올려 항복을 청했습니다. 변방 한 곳에 살도록 해주고 또 식량을 주면 감히 딴 생각을 갖지 않을 것이며 다른 도적들도 금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한상질이 보고하니 임금도 허락했습니다.
이때 도절제사 최운해와 계림부 윤 유양, 안동부 사 윤저(尹柢) 등이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영해 서쪽에 진을 치고 적과 싸워 물리쳤는데, 적의 괴수가 사람을 보내 항복하려 한다는 말을 들었지만 모두 믿지 않았습니다. 유양이 홀로 말했습니다.
“위엄과 신의로 항복을 받아들이는 것은 옛날부터 있는 일이니, 어찌 의심해 좋은 기회를 놓치겠소?”
유양이 즉시 말을 달려 바로 앞으로 가서 사람을 시켜 먼저 계림부 윤이 왔다고 소리를 지르게 하니, 왜구의 괴수 다섯 명이 수백 명을 거느리고 모두 갑옷을 벗고 배에서 내려와 줄지어 절을 하고 명령을 기다렸습니다. 유양이 이해(利害)를 설명하고 항복하도록 권하자 왜구의 괴수들이 기꺼이 항복하기로 하고 사로잡았던 사람들을 돌려보냈습니다.
항복한 왜구의 괴수 구육(구六)은 세 사람을 인솔하고 서울에 와서 긴칼 하나와 환도(環刀) 하나를 바치고 조정 반열에 나아가 숙배(肅拜)했습니다. 임금이 불러 보고 이야기를 나눈 뒤 구육에게 옷 한 벌과 갓 하나를 주면서 말했습니다.
“네가 무슨 생각으로 왔느냐?”
“전하께서 항복하는 자를 어루만져 안정시켜 주시고 지난날의 악한 것을 생각지 않으신다기에, 토지를 청해 백성이 되려고 합니다.”
“항복하는 자가 너만이 아니며 항복을 받는 자도 나만이 아니다. 천하가 모두 이러하다. 네가 가도 쫓아갈 필요가 없고 와도 막을 필요가 없으니, 너의 거취는 오직 네 마음에 달려 있다. 네가 돌아가서 너의 무리들에게 이런 뜻을 알려라. 너희들 중에도 어찌 복(福)과 지혜가 있는 자가 없겠는가? 장구한 계획을 생각하고 다시 와서 말하라.”
구육이 눈물을 흘리고 물러갔습니다. 삼사 좌복야 우인열과 예문춘추관 학사 하윤에게 지시해 묵고 있는 곳에 가서 잔치를 베풀어주게 했습니다. 구육을 선략장군(宣略將軍)에 용양순위사(龍驤巡衛司) 행(行)사직(司直) 겸 해도(海道) 관군민만호(管軍民萬戶)로 삼았으며, 은띠 1 개, 사모(紗帽) 1 개, 신발 1 켤레를 내려주었습니다.
임금은 나중에 근정전에서 조회를 받으면서 구육을 불러 위로했는데, 구육은 감히 쳐다보지 못하고 땀을 흘리며 눈물만 쏟을 뿐이었습니다. 임금은 구육에게 쌀 30 섬과 콩 20 섬을, 수행원 2 명에게는 옷과 갓 각각 한 벌씩을 내려주었습니다.
왜구 문제로 시끄럽다 보니, 해프닝도 생겼습니다. 대사헌 민여익은 취임하자마자 중추원 지사 조견이 합포(合浦)의 절제사로 있을 때 왜구를 제어하지 못했고 한성부 윤 신효창은 당시 대사헌으로 있으면서 조견을 탄핵하지 않았다며 이들을 탄핵했습니다.
그러면서 개인적으로 조견의 형인 좌정승 조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상께서 사헌부로 하여금 조견을 탄핵케 하려 하신 지 오래 됐습니다.”
임금이 이를 듣고 화가 나 말했습니다.
“너는 사헌부 관리니 죄가 있는 자를 탄핵하라. 왜 꼭 말을 핑계삼느냐? 또 조견은 공신이라 가벼이 탄핵할 수 없다.”
민여익을 옥에 가두려고 하니 의성군 남은이 나아가 말했습니다.
“조견과 민여익은 모두 공신입니다. 누구는 취하고 누구는 버리십니까?”
그래서 집으로 돌아가도록 지시하고 사헌부에 나오지 못하게 했습니다. 곧 탄핵됐으나 그 뒤 모두 용서했습니다. 그러나 대사헌은 곧 이직(李稷)으로 바뀌었습니다.
<표-139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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