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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과 놀다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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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과 놀다 <43>

현비 강씨의 죽음

태조의 첩이지만 본처 한씨가 개국 직전에 죽는 바람에 조선 왕조의 첫 왕비가 되는 행운을 안았던 현비 강씨가 1396년에 죽었습니다.

현비는 이해 6월 말에 병이 났습니다. 임금은 옛 궁으로 거처를 옮기고 중들을 내전에 모아 부처에게 빌었으며, 사람을 회암사에 보내 빌기도 했습니다. 또 소격전에 초제(醮祭)를 올리고 전국의 가벼운 죄수를 풀어주었습니다.

8월 들어 현비의 병이 위독해지자 내시부 판사 이득분(李得芬)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으며, 임금이 그곳에 거둥해 병을 살폈습니다.

8월 13일 밤에 현비가 이득분의 집에서 죽었습니다. 임금이 애통해 마지않으며, 조회와 저자를 열흘 동안 쉬도록 했습니다.

이튿날 세자와 백관이 마질(麻絰)을 띠고 곡을 했으며, 장례를 주관할 기구로 4 도감(都監) 13 소(所)를 설치했습니다. 예조에 장례 절차를 마련하게 하고, 빈소를 옛 궁궐로 옮겼습니다. 각 도의 각급 군 민관의 위문은 금하도록 했습니다.

공신인 문하부 좌정승 조준과 우정승 김사형 등이 공신 가운데 한 사람을 정해 3 년 동안 능을 지키게 하자고 건의하니, 안평군 이서로 하여금 능을 지키도록 했습니다.

능터는 임금이 직접 돌아다니며 잡았습니다. 현비가 죽은 다음다음날인 15일에 임금이 흰옷과 흰갓 차림으로 안암동(安巖洞)에 나가 능 자리를 물색했으며, 20일에는 행주(幸州)에 거둥해 능 자리를 보았으나 능 자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서운관의 유한우 배상충 이양달 등이 저희들끼리 서로 좋으니 나쁘니 다투다가 결정을 짓지 못하자 임금이 화가 나 모두 곤장을 때렸습니다. 21일에도 안암동에 거둥해 능 자리를 보고 이튿날 터를 닦도록 했으나, 땅을 파보니 물이 솟아올라 중지했습니다. 결국 23일에 취현방(聚賢坊)에 가 능 자리를 보고 그곳으로 결정했습니다.

형조에서 상장군 오용권(吳用權), 대장군 심징(沈澄) 노상의, 중군장군(中軍將軍) 윤보로(尹普老), 좌군장군(左軍將軍) 이사근(李思謹) 등이 장례 기간중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었다고 탄핵했습니다. 파직토록 했으나 형조에서 다시 글을 올려 극력 주장하니 직첩을 거두도록 했습니다.

봉상시에서는 현비의 존호를 신덕왕후(神德王后), 능호를 정릉(貞陵)으로 정해 올렸습니다. 좌정승 조준과 중추원 판사 이근이 신덕왕후의 시책(諡冊)을 올렸습니다.

임금은 현비가 죽은 지 석 달쯤 지난 11월 8일 처음으로 고기 반찬을 들었으며, 1백 일 만인 11월 23일에는 백관이 모두 상복(喪服)을 벗었습니다. 그러나 백관의 상복은, 일 보는 데 불편하다 해서 현비가 죽은 지 10여 일 만에 임금의 지시로 이미 벗고 제물을 올리거나 재를 올리는 때만 입고 있었습니다.

장례는 이듬해 1월에 치렀습니다. 1397년 정월 초하룻날 백관이 신덕왕후 빈전(殯殿)에 제물을 올리고 이튿날 빈전에 나아가 계빈제(啓殯祭)를 올렸습니다. 3일에 취현방 북쪽 언덕에 장례하고 정릉이라 불렀습니다.

종친과 백관이 상복을 벗고 조복(朝服)을 갖추어 인안전(仁安殿)으로 반혼(返魂)한 뒤에, 흰 옷과 검은 띠 차림으로 업무를 보았습니다. 왕후의 혼전도감(魂殿都監)을 설치했습니다.

임금은 정릉에 아침 저녁 향불을 받들라며 흥천사(興天寺)라는 절을 세우도록 하고 자주 흥천사에 거둥해 공사를 살피고 기술자들에게 음식을 주기도 했습니다. 흥천사 공사는 내시 김사행이 아첨하느라 사치와 화려가 극에 달했다고 합니다.

임금은 1398년 5월에 흥천사에 가 절 북쪽에 3 층짜리 사리전(舍利殿)을 짓도록 했습니다. 자원하는 각 부대 군사 50 명을 모집해 식량을 주고 공사에 나오게 했습니다. 임금은 며칠 뒤 다시 흥천사에 거둥해 사리전 지을 터를 본 뒤 감독관 김주에게 일렀습니다.

“정릉과 요물고는 빨리 만들 필요가 없으나, 이 사리전은 지으려 한 지가 오래 되었는데 지금 일을 마치지 않으면 나중에 못하게 하는 사람이 있을까 염려되니 서둘러 완공해 나의 바람에 보답하라.”

그 뒤에도 자주 흥천사에 거둥했고, 각 부대 군사와 기술자, 중들을 모두 사리전 공사에 나가게 했습니다. 어느 날은 백관이 자리에 나아가 반열을 정제했는데도 조회를 보지 않고 흥천사에 거둥해 사리전 짓는 것을 보기도 했습니다. 임금은 이해 6월 15일에 흥천사에 거둥해 사리탑을 보았습니다.

대상(大祥) 때인 1398년 8월에 신덕왕후의 초상화를 인안전에 봉안했습니다. 임금은 흥천사에 거둥해 신덕왕후의 천신(薦新) 재회(齋會)를 보았습니다. 대상재(大祥齋)를 흥천사에서 베풀었으며, 도당에서는 따로 흥복사에서 베풀었습니다. 세자 이방석은 이때 길복(吉服)을 입었습니다.

3 년 동안 왕후의 능을 지키고 상복을 입은 공신 이서와 내시 강인부는 각각 문하부 참찬과 중추원 상의의 벼슬을 상으로 받았습니다. 그 마을에 정문(旌門)을 세워 ‘충신 마을’이라 하고, 안장 갖춘 말과 옷 갓 금띠도 내려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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