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도읍으로 옮겨온 직후인 1394년 11월부터 종묘 궁궐 성곽 공사가 시작됐습니다. 임금이 직접 도평의사사와 서운관 관원들을 인솔하고 종묘 사직 세울 터를 살폈으며, 용산강(龍山江)에 가서 종묘의 재목을 살펴보았습니다.
공작국(工作局)을 설치하고 도평의사사의 건의에 따라 종묘 궁궐 성곽 공사를 시작토록 지시했습니다.
백관을 무악에 모아 다시 도읍 앉힐 땅을 살피기도 했으나, 여러 사람이 모두 좁다고 해서 그만두었습니다.
12월 들어 임금이 직접 재계(齋戒)하고 하룻밤을 보낸 뒤 삼사 판사 정도전에게 지시해 하늘 땅의 귀신에게 제사를 올려 공사 일으킨 일을 고하게 했습니다.
또 문하부 참찬 김입견을 보내 산천(山川)의 귀신에게 고하게 했습니다. 중추원 부사 최원(崔遠)을 종묘 세우는 터에 보내고, 또 중추원 첨서 권근을 궁궐 지을 터에 보내 5방의 지기(地祇)에게 제사지내 그 터를 닦았습니다.
백성들을 고생시키지 않기 위해 여러 산의 중들을 모아 관청에서 옷과 먹을 것을 주고 공사장에 나가게 했습니다. 임금이 종묘의 터 닦는 것을 시찰했습니다.
개성부에서는 각 관청의 터를 헤아려 등급에 따라 나눠주었습니다. 전 현직 각급 관리에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개인에게도 헤아려 집터를 주도록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남의 집터를 빼앗은 개성부 판사 이거인(李居仁)이 간관의 탄핵을 받았습니다. 임금은 이거인에게 업무를 보게 했으나, 이듬해 연초에 간관이 다시 이거인을 탄핵했습니다.
새 도읍 건설에서 토지를 맡은 관원임을 기화로 이조 의랑 최사위(崔士威)가 갖고 있던 집터를 빼앗으려 했으며, 욕심을 채우지 못하자 검교 중추원 부사 최융의 집을 빼앗아 그 처자로 하여금 추위 속에 통곡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개국 초에 중국에 사신으로 가서 몰래 무역을 해 돌아오다가 도중에 도둑맞자 수행원들을 윽박질러 그 포목 값을 물게 했으며, 우리 나라에 들어와서도 분이 풀리지 않아 그 중 한 사람을 가두어 결국 병들어 죽게 만들었다는 전력까지 탄핵 사유에 보태졌습니다.
임금은 이거인이 원종공신이라며 파직만 허락했으나,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곧 이어 간관이 다시 올린 글을 보면, 새 도읍 땅은 5백여 결에 불과해 개성부에서 정한 대로 정1품에게 60 부(負)를 주고 차차로 내려오면 문 무관 현직자에게도 다 줄 수 없으니 하물며 전직자와 서민에게 돌아갈 게 없다는 것입니다.
임금은 개성부에 다시 직급별로 지급할 집터를 정하도록 지시해, 정1품은 35 부로 하고 이하 1 품에 5 부씩 내려 6품은 10 부, 서민은 2 부씩 주도록 했습니다.
1395년 1월 말부터는 사직단(社稷壇) 건설을 시작하고 임금이 서봉(西峯) 밑에 가 사직단 쌓는 것을 직접 보았습니다.
2월부터는 궁궐을 세우는 각 도의 일꾼들을 돌려보내고 중들로 대신하게 했습니다. 궁궐 짓는 데 필요한 몇만 명의 기술자와 일꾼을 다 농민으로 채우면 틀림없이 농사 때를 놓칠 것이라는 사헌부의 건의에 따른 것입니다.
사헌부는 사대부가 집 한 채를 짓는 데에도 꼭 기술이 있고 또 살림살이가 없어 일에 전념할 수 있는 중을 데려다 일시키는데 하물며 궁궐을 세우는 데에 어찌 서투른 사람을 쓰겠느냐고 지적하고, 중들 역시 먹고 입는 것을 해결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데 따라다니기를 좋아한다며 이렇게 말합니다.
“나라에서 중이 되는 것은 원래 정한 수효가 없어 백성 가운데 중이 3 할이나 되는데, 그 중 공사에 쓸 수 있는 자가 3분의 2 이상이 될 것입니다. 중들은 세 가지 부류가 있습니다. 배부름을 추구하지 않고 일정한 곳에 거처하지 않으며 불당에서 마음을 수양하는 것이 상등이요, 법문(法文)을 강설하며 말을 타고 바삐 돌아다니는 자가 중등이며, 재(齋) 올리는 데나 초상집을 쫓아다니면서 먹고 입는 것을 얻으려는 자가 하등입니다. 신들은 가만히 생각건대 하등의 중들을 나라의 공사에 동원하는 것이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유학에 기반을 둔 관원들로서야 눈에 거슬리는 중들을 동원해 공사를 진행한다면 불교를 억누르고 농사도 망치지 않을 수 있으니 일거양득이었던 것입니다. 임금도 이를 윤허했습니다.
한편 교주도에 벌채해 놓은 재목 1만여 개를 운반하는 것도 큰 문제였습니다. 담당자의 건의에 따라 이를 모두 바로 운반하지 않고 비가 온 뒤에 뗏목을 만들어 떠내려보내도록 했습니다.
임금은 먼저 이룩된 새 궁궐 양청에 술자리를 마련하고 옛 친구들인 남양백 홍영통과 창녕부원군(昌寧府院君) 성여완(成汝完) 등을 불렀습니다. 삼사 판사 정도전이 시를 지어 바쳤습니다.
금원(禁院)에 봄이 깊어 꽃은 한창 흐드러진데
늙은 친구 불러 술자리를 마련하네
하늘도 때맞추어 문득 비를 내리니
이에 온몸으로 우로(雨露)의 은택을 깨닫도다.
임금은 가끔씩 궁궐 조성 감독관과 인부들에게 술과 음식을 내리기도 하고, 종묘에 거둥해 짓는 것을 보기도 했습니다. 현비도 직접 나가 일 나온 중들과 여러 목공(木工), 석공(石工)들에게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8월에 경기좌도 장정 4천5백 명과 우도 장정 5천 명, 충청도 장정 5천5백 명을 징발해 궁궐 공사에 투입했습니다. 9월에는 가을걷이 때문에 새 대궐에서 일하는 장정들을 놓아 보내고 중들만 남겨 두었습니다.
그러나 종묘와 새 궁궐 공사는 순조롭게 진행돼 9월중에 마무리됩니다. 임금은 새 대궐 후원(後園)에 연못을 파도록 지시하고, 삼사 판사 정도전에게 새 대궐 침실 네 벽 위에 본받을 만하고 경계될 만한 교훈을 쓰겠다며 경전과 역사서에 있는 좋은 말들을 모아 올리라고 지시합니다.
새 대궐 완공을 축하하듯, 장끼가 새 대궐의 대전(大殿) 남쪽 뜰에 들어왔다고 실록은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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