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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과 놀다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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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과 놀다 <47>

“왜구들 속은 알 수가 없어...”

1397년 1월, 왜구의 무리가 항복하러 울주포(蔚州浦)로 들어왔습니다. 왜적의 괴수인 나가온(羅可溫)은 그 아들 도시로(都時老) 등을 계림부 윤 유양에게 볼모로 보냈으나, 유양은 병 때문에 나가 보지 않았습니다.

왜구는 자신들을 꾀어 함정에 빠뜨리려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고, 양식을 주며 접대하던 지주사 이은 등 몇 사람을 잡아가지고 도망쳐 돌아갔습니다.

임금은 도당과 각 부서, 원로에게 지시해 최운해 이귀철 김빈길 김영렬 등의 죄를 논의하도록 했습니다. 경상도 절제사였던 최운해는 영을 어겨 적을 도망치게 했고, 충청 전라 경기우도 절제사였던 이귀철 김빈길 김영렬 등도 모두 그 기한을 어겨 5 도 도통사 김사형이 이들을 경산부(京山府, 성주)에 잡아 가두고 긴급 보고하며 처벌을 청한 것이었습니다.

전라 경상 충청도 도절제사로는 박자안(朴子安) 윤방경(尹方慶) 조영무(趙英茂)를 대신 임명해 보냈습니다.

최운해 이귀철 김빈길 김영렬 등은 순군부 옥에 갇혀 대간과 형조의 국문을 받았습니다. 판결이 나자 우정승 김사형과 의성군 남은이 죄를 감해달라고 청하니, 임금은 최운해를 안변(安邊) 진명포(鎭溟浦)에, 김영렬을 옹진(瓮津)에, 김빈길을 청해(靑海)에, 이귀철을 평양에 귀양보내고 모두 수군에 편입시키도록 지시했습니다.

나중에 최운해는 곤장 1백 대를 치고 청해도(靑海道) 수군으로, 김빈길은 90 대를 쳐 흑림(黑林) 수군으로, 이귀철은 90 대를 쳐 안주 수군으로, 김영렬은 90 대를 쳐 옹진(瓮津) 수군으로 각각 옮겨 편입토록 했으며, 모두 직첩을 거두게 했습니다.

5 도 도통사 김사형은 이듬해 1월 말에 돌아왔습니다. 임금이 흥인문(興仁門) 밖까지 거둥해 맞으며 위로했습니다. 의안백 이화, 좌정승 조준, 봉화백 정도전에게 지시해 우정승 김사형에게 잔치를 베풀도록 했습니다.

이때 중국을 다녀온 사은사(謝恩使) 권중화 이하 여러 사신과 항복한 구육도 참석했습니다. 김사형에게 물소뿔 띠를 내려주었습니다. 개국공신들이 따로 김사형 등을 위해 잔치를 베풀자 임금은 금주령에도 불구하고 술을 쓰도록 허락했습니다.

왜인들은 잡아간 울주 지사 이은과 전 판사 위충(魏충) 등을 돌려보냈습니다. 전 사재감 소감(少監) 박인귀(朴仁貴) 등이 자청해 이들이 잡혀가 있던 대마도까지 가서 설득하고 데려온 것입니다.

박인귀 등 5 명은 쌀 10 섬씩과 부역 면제의 혜택을 받았습니다. 또 울주 아전 둘은 나중에 도관찰사 이지의 청에 따라 향역(鄕役)을 면제받았습니다.

왜구는 계속해서 항복을 청했습니다. 왜인 만호 나가온의 아들 도시로를 사정(司正)에, 곤시라(昆時羅) 망사문(望沙門)을 부사정(副司正)에 임명하고 옷과 갓을 내려주었으며, 중추원 상의 유양이 왜적 두 사람을 데리고 계림에서 오자 옷을 내려주었습니다. 왜적의 배 10 척이 항복을 청하자 임금이 도당에 지시했습니다.

“지금 경상도에서 항복을 청하는 왜인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는 알기 어렵지만, 항복은 받아야 한다. 저들은 비록 진실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믿음을 잃지 말아야 한다. 다만 마땅히 스스로 힘써, 만일 저들이 먼저 움직여 도둑이 되면 곧 사태에 대응해 섬멸해야 한다.”

4월 들어서 왜구의 괴수 나가온이 병선 24 척을 거느리고 항복을 청했습니다. 나라에서는 대장군 김계수와 전 만호 박문숭(朴文崇)을 경상도에 보내 왜적에 대한 방비를 살피게 하는 한편 충청도 군사 5백 명을 징발해 경상도 전라도에 보내 왜구를 막도록 했습니다.

항복한 왜구의 괴수 2 명이 그 무리 6 명과 함께 술을 가지고 와 경상도 도관찰사를 대접했습니다. 며칠 뒤 왜구의 괴수가 사람을 보내, 만호 세 명이 각각 1백 명을 거느리고 관찰사를 뵙고자 하니 먼저 양식을 달라고 관찰사에게 말했습니다. 관찰사가 쌀 2백 섬을 주었습니다.

나가온이 관찰사를 만나자고 청한 뒤 그 무리 80 명을 거느리고 밀양부(密陽府)에 오자 관찰사 이지가 술과 음식을 대접했습니다. 나가온 등 일부만 서울로 보내고 나머지는 모두 배로 돌려보냈습니다.

그런데 도안무사 박자안이 군선(軍船)으로 덮치려 했습니다. 왜인이 알아차리고는 달아났는데, 박자안이 추격했으나 미치지 못했습니다.

항복한 왜구 나가온은 그 무리 12 명을 데리고 서울에 왔습니다. 임금이 근정전에 앉아 조회를 받을 때 나가온은 조회 반열의 동반 8품 반두(班頭) 조금 뒤에 섰습니다. 나가온에게 비단옷과 가는 베옷 각 한 벌과 사모 은띠 신발을 내려주었고, 나머지 사람들에게도 각각 베옷 한 벌씩을 내려주었습니다. 며칠 뒤 나가온은 선략장군에, 그 부하 도시라(都時羅) 등 8 명은 각 부대의 사정(司正) 부사정(副司正)에 임명됐습니다.

한편 나라에서는 권전(權專)을 시켜 도관찰사 도절제사에게 명을 전했습니다.
“왜인이 배반하고 갔으니, 만일 잡지 못하면 죄를 용서하지 않겠다.”

또 박인귀를 보내 일본 대마도에 도망친 왜인 상만호를 잡아달라는 편지를 전하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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