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관은 왜인을 도망치게 한 책임을 물어 예문춘추관 대학사 한상질과 중추원 상의 유양을 탄핵했습니다.
앞서 계림부 윤으로 있던 유양이 경상도 관찰사로 있던 한상질에게 “사람을 왜구에게 보내 어르고 달래면서 설득해 항복하게 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중 의운(義雲)을 보냈는데, 왜인들이 도망쳐 돌아가자 간관이 중을 보낸 이유를 물은 것이었습니다.
“중추원 상의 유양이 전에 계림에 있었는데, 왜구가 투항할 때 단기(單騎)로 가서 적을 보고 어르고 달래 왜놈으로 하여금 자식을 볼모로 바치게 했으면 마땅히 더욱 부지런히 하고 게으르지 말아서 그 공을 이루어야 했습니다. 왜적의 배가 와 정박한 뒤에 병이 심하다는 핑계로 이해(利害)의 갈림길임은 조금도 생각지 않고 중 의운을 보내 의심이 나서 도망쳐 돌아가게 했습니다. 또 중이 왕래한 사실을 숨기고 조정에 보고하려 하지 않았으며, 그 까닭을 물어도 교묘한 거짓으로 말장난해 사정을 드러내지 않으니 간사하게 거짓을 꾸미는 듯합니다.”
직첩을 거두고 국문하라는 청이었으나, 임금은 지방에 부처만 하고 숨은 의운이 나타나면 물어 사실을 조사토록 했습니다. 간관이 잇달아 글을 올려 유양의 처벌을 청하니, 임금이 말했습니다.
“의운이 도망쳐 숨었다는 것은 실로 황당하다. 우선 직첩을 거두어 먼 지방에 부처하고 의운이 나타나면 사실을 조사하라.”
그래도 간관이 다시 글을 올려 처벌을 청하니, 임금이 유양을 하옥시키고 사헌부에 지시해 범죄 사실을 명확히 국문한 뒤 분간해 보고하도록 했습니다. 유양은 한 달쯤 뒤에 병이 있다는 이유로 풀려났습니다.
유양은 이듬해 6월 병이 낫자 다시 사헌부로부터 탄핵을 받았습니다. 다시 국문하자는 것이었으나, 임금은 고문은 하지 말고 상세히 심문해 보고토록 지시했습니다. 사헌부에서 다시 청하니, 임금이 말했습니다.
“아뢴 대로 한다면 유양은 틀림없이 죽게 될 것이니, 차라리 상도(常道)에 어그러지는 게 낫다.”
그러고는 재산을 몰수한 뒤 지방으로 귀양보내는 것만 허락했습니다.
섣불리 왜적을 공격하다가 놓친 박자안도 군중(軍中)에서 목베도록 했습니다. 이때 박자안은 왜적을 쫓아 막 전라도 진포(鎭浦, 군산)에 가 있었습니다.
일이 왜적에 관계돼 알리지 않고 쉬쉬하니 바깥 사람들이 알 수 없었는데, 그 아들 박실(朴實)이 듣고 이방원의 집으로 찾아갔습니다. 마침 의안군 이화 등 종친들이 이방원의 집을 찾아와 이방원이 문에 나와 영접했는데, 박실이 울며 아비의 목숨을 살려달라고 청했습니다.
이방원이 말했습니다.
“나라의 큰 일을 나더러 어찌하라는가?”
종친들이 들어갔다가 하직할 때 이방원이 다시 문을 나와 보냈는데, 박실이 땅에 엎드려 통곡했습니다. 이방원이 마음으로 불쌍히 여겨 종친들과 함께 대궐에 들어가 청하려 하니, 종친들이 말했습니다.
“이것은 나라의 비밀스런 일인데, 상감께서 어디서 알았느냐고 물으시면 뭐라고 대답하겠소?”
이방원이 말했습니다.
“그 책임은 내가 지겠습니다.”
곧 함께 대궐에 들어가 내시 조순에게 아뢰도록 청하니, 조순이 말했습니다.
“이것은 비밀한 일인데, 종친들께서 어떻게 아셨습니까?”
이방원이 말했습니다.
“사람을 처벌하고 사람을 죽이는 것은 나라의 큰 일인데, 바깥 사람이 어찌 모를 까닭이 있겠는가?”
조순이 들어가 아뢰니, 임금이 듣고 처음에 화가 나 말했습니다.
“너희들은 박자안에게 죄가 없다고 생각하느냐?”
조금 있다가 중추원에 지시했습니다.
“내가 박자안의 죄를 감형코자 하니, 급히 말 잘 타는 지인(知印)을 불러 문서를 보내라.”
중추원에서 심귀수(沈龜壽)를 보내도록 아뢰자, 곧 명을 내렸습니다.
“네가 힘을 다해 빨리 달려 박자안을 죽음에서 구하라.”
심귀수가 명을 받고 재빨리 달려갔습니다. 길을 반 이상 갔을 때 말에서 떨어져 역리를 시켜 대신 글을 보냈습니다.
글이 도착하는 날, 관원이 박자안을 처형하려고 얼굴에 칠을 하고 옷을 벗기고 칼날까지 갖추었는데, 문득 바라보니 넓은 들에서 한 사람이 달려오며 삿갓을 휘둘러대고 있었습니다. 관원이 괴이하게 여겨 형(刑)을 멈추고 기다려 박자안은 죽음을 면했습니다.
박실은 본래 배운 게 없고 또 무예가 있는 사람도 아닌데, 이방원이 아비 살린 것을 좋게 여기고 나중에 대궐 군사를 맡겨 벼슬이 2품에 이르렀습니다.
박자안은 순군부 옥에 갇혀 위관(委官)인 문하부 판사 권중화와 대간 형조의 국문을 받았습니다. 박자안의 진술에 경상도 도절제사 윤방경과 계림부 윤 하윤이 나오자 모두 불러 옥에 넣었습니다.
박자안은 목베도록 했다가 조금 뒤에 도승지 정담을 보내 풀어주되 직첩만 회수하고 곤장 1백 대를 때려 삼척으로 도형을 보내도록 했습니다. 윤방경은 광주(廣州)에, 하윤은 수원에 안치하게 했습니다. 이들은 넉 달 만인 10월에 풀려납니다.
나라에서는 방어 태세를 재정비하도록 했습니다. 임금이 도당에 지시해 경상도에 공문을 보냈습니다.
“합포(合浦)의 군관(軍官)은 다년간 왜구를 막아 비상 사태에 대응해 움직이는 법을 잘 알고 있으면서, 지금 왜적이 잔뜩 상륙했는데도 한몸의 편하고 편치 않은 것만 생각하고 전체를 돌보지 않아 장수를 속이고 싸움의 시기를 놓쳤으며, 도망쳐 달아나는 왜적을 머뭇거려 잡지 않고 투항하거나 장사하는 자를 잡아 해쳤다. 마땅히 군법에 따라 조치해야겠으나, 우선 가벼운 법에 따라 우두머리와 간사에게 각각 곤장 1백 대를 때려 군졸로 편입하고 직책과 이름을 보고하라.”
또 각 도의 병마 도절제사를 없애고 각 진(鎭)에 첨절제사를 두어 인근 고을의 소속 병마를 거느려 방어에 대비케 했습니다. 도관찰사로 하여금 근무 성적을 매기도록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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