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건국에 반대해 충절을 지켰다는 고려 말의 3은(三隱)은 목은(牧隱) 이색, 포은(圃隱) 정몽주, 야은(冶隱) 길재(吉再)의 세 사람을 꼽기도 하고 길재 대신 도은(陶隱) 이숭인을 넣기도 합니다. 호(號)에 모두 ‘은(隱)’자가 들어 있지요.
그러나 ‘숨어 살았다’는 그 글자의 의미에 초점을 맞추면 네 후보 가운데 두 명은 ‘실격(失格)’이고, 합당한 인물은 이색과 길재뿐입니다. 정몽주는 건국 전에 이방원 일파에 의해 살해당했고, 이숭인은 건국 직후 정도전 등이 곤장을 심하게 쳐 죽였으니까요.
실제로는 ‘양은(兩隱)’뿐이지만 그렇게 부르기에는 좀 허전하고 해서 셋을 채우려다 보니 마땅치 않았다―얘기 되죠?
물론 나중에 미화된 것이겠지만, 그 ‘양은’에 대한 역대 임금의 애정은 각별했다고 합니다.
태조는 일찍부터 이색을 특별히 대했습니다. 공양왕 3년(1391) 11월, 귀양갔던 이색이 임금의 부름을 받고 서울로 돌아와 이성계를 집으로 찾아오자, 이성계는 몹시 기뻐하며 그를 윗자리에 맞아들이고 꿇어앉아 술을 올렸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당시 이성계의 권세는 임금마저 압도할 정도였지만, 이색은 이성계의 공대를 전연 사양치 않았다고 합니다.
태조는 임금 자리에 오른 뒤에도 그를 옛 동료로 대했습니다.
1395년 11월, 도평의사사에서는 한산군 이색에게 쌀과 콩 1백 섬을 보냈으나 받지 않았습니다. 며칠 뒤 이색이 오대산(五臺山)에서 돌아왔습니다. 앞서 이색이 지방으로 쫓겨났다가 원하는 곳으로 옮기도록 사면을 받아 관동(關東)을 여행하겠다며 오대산에 가서 살았는데, 이때 임금이 사람을 보내 부르자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임금은 옛 친구의 예로 대하고 조용하게 대화를 나눈 뒤 술자리를 마련해 즐겼습니다.
실록은 이때 이색이 이런 말을 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개국할 때 왜 제게 알리지 않았습니까? 제게 알렸다면 추대하는 의식을 베풀어 더욱 빛났을 텐데, 어찌 말장사를 우두머리가 되게 하셨습니까?”
말장사란 태조를 추대하는 데 대표로 나섰던 배극렴(裵克廉)을 가리킨 것이었습니다. 남은(南誾)이 옆에 있다가 말했습니다.
“어찌 그대 같은 썩은 선비에게 알리겠는가?”
임금이 남은을 꾸짖어 다시 말을 못하게 하고, 옛날 친구의 예로 대접해 중문까지 나가서 전별했습니다.
임금은 이색에게 과전(科田) 1백20 결, 쌀과 콩 1백 섬, 소금 5 섬을 내려주었습니다. 10여 일 뒤에 다시 쌀과 콩 1백 섬을 내려주고, 또 술과 고기를 주면서 말했습니다.
“경은 이미 늙었으니 다시 술과 고기를 먹고 건강을 유지하시오.”
이때에 이색이 불교를 믿어 술과 고기를 끊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임금은 이색을 한산백(韓山伯)으로 봉하고, 의성고(義成庫), 덕천고(德泉庫) 등 5 고(庫)의 도제조(都提調)로 삼았으며, 대나무로 만든 요여(腰輿)를 내려주었습니다. 또 잔치를 베풀어 주었습니다.
임금이 중문까지 나가서 전별한 것이 나중에 문제돼 뒷말이 생기자 남재(南在)가 이색의 아들 이종선(李種善)을 불러, 화를 피하려면 도성을 떠나야 한다고 일렀습니다.
이색은 여주 신륵사(神勅寺)로 가다가 병이 생겼습니다. 절에 간 뒤 병이 심해져 중이 옆에 와서 무슨 말을 하려고 하자, 이색이 손을 흔들면서 말했습니다.
“죽고 사는 이치는 내가 의심치 않소.”
그 말을 마치고는 바로 죽었다고 합니다.
고려 말에 일찌감치 낙향한 길재는 태종과 성균관에서 같이 공부한 인연이 있다고 합니다.
태종이 세자가 된 뒤인 1400년 7월, 길재가 서울에 왔습니다. 학문에 뛰어나고 행실이 좋다 해서 세자가 불렀다는 것입니다.
길재는 우왕 때 벼슬해 문하부 주서(注書)가 되었는데, 1389년에 창왕이 가짜 왕씨로 몰려 쫓겨나자 벼슬을 버리고 선주(善州, 선산)로 돌아가 홀어머니를 봉양하니 고향 사람들이 그 효성을 칭송했습니다.
하루는 세자가 서연(書筵) 관원들과 더불어 숨은 선비를 논하다가 말했습니다.
“길재는 강직한 사람이다. 내가 일찍이 함께 배웠는데, 보지 못한 지 오래 되었다.”
정자(正字) 전가식이 길재와 같은 고향 사람인데, 길재가 집에 있으면서 효도를 다하고 있다고 자세히 말했습니다. 세자가 기뻐하며 삼군부에 지시하고 공문을 띄워 그를 불렀습니다.
길재가 역마를 타고 서울에 오니, 세자는 임금에게 청해 봉상시(奉常寺) 박사(博士)에 임명했습니다. 길재는 대궐에 나와 사은(辭恩)하지 않고 동궁(東宮)에 편지를 올렸습니다.
“제가 옛날에 저하와 더불어 성균관에서 ‘시경’을 읽었는데, 지금 신을 부르신 것은 옛 정을 잊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신씨 조정에서 과거에 올라 벼슬하다가 왕씨가 복위하자 곧 고향에 돌아가 평생을 보내려 했습니다. 지금 옛일을 기억하고 부르셨으니 제가 올라와서 뵙고 곧 돌아가려 했을 뿐, 벼슬에 종사할 생각은 없습니다.”
세자가 말했습니다.
“그대가 말한 것은 바로 바꿀 수 없는 강상(綱常)의 도리니, 의리상 뜻을 빼앗기는 어렵다. 그러나 부른 것은 나지만 벼슬을 준 것은 주상이니, 주상께 사면을 고하는 것이 옳다.”
그러자 길재가 글을 올렸습니다.
“신이 본래 한미(寒微)한 사람으로 신씨 조정에 벼슬해 과거에 뽑히고 문하부 주서에 이르렀습니다. 신이 듣건대, 여자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고 신하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고 합니다. 제발 시골로 돌아가도록 풀어주셔서, 신의 두 성(姓)을 섬기지 않는 뜻을 이루게 하고, 늙은 어미를 효도로 봉양하며 남은 생애를 마치게 하소서.”
정종이 보고 괴이하게 여겨 말했습니다.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좌우가 말했습니다.
“한미한 유생(儒生)입니다.”
이튿날 경연에 나가 권근에게 물었습니다.
“길재가 절개를 지켜 벼슬하지 않겠다는데, 예전에 이런 경우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는가?”
“이런 사람은 조정에 남도록 청하고 벼슬을 더해주어 뒷사람을 권장해야 합니다. 청해도 굳이 간다면 자기 생각을 펴게 하는 것이 낫습니다. 광무제는 한나라의 어진 임금이지만, 엄광(嚴光)이 벼슬하지 않았습니다. 선비가 분명한 뜻이 있으면 빼앗아서는 안 됩니다.”
그러자 정종은 길재에게 자기 고을로 돌아가도록 허락하고, 그 집의 부역을 면제해주도록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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