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년 12월 24일 23시 0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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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과 놀다 <28>
‘철없는’ 세자에 세자빈은 간통까지
‘철없는’ 세자에 세자빈은 간통까지태조는 막내 아들을 세자로 세우는 ‘모험’을 했습니다. 나중에 자세히 나오겠지만, 스스로 모험이라 느끼지 못했던 이 선택은 결국 자신의 왕위마저 빼앗기는 불행을 초래하고 맙니다. 그 불행의 씨앗, 어린 세자에 대해 승자의 기록인
이재황 실록연구가
조선왕조실록과 놀다 <27>
중국에서 결재받아온 나라 이름
명나라에 대한 ‘사대(事大)’는 조선이 건국하면서부터가 아니라 고려 말부터 시작됐습니다. 공민왕이 원나라의 그늘에서 벗어나 새로 일어나는 명나라와 관계를 맺으면서 씨앗이 뿌려졌고, 그 이후 임금이 바뀌는 등의 중요한 일이 있을 때면 중국에 사신을 보내는 것이 정
조선왕조실록과 놀다 <26>
계룡산에서 시작된 새 도읍 공사
□ 이야기 25 이성계는 즉위 후 한 달도 안 돼 도평의사사에 한양으로 천도를 지시합니다. 그러고는 삼사 우복야(右僕射) 이염을 한양부에 보내 궁실을 손질토록 했습니다. 고려 때 한양은 남경이어서 이궁(離宮)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임금이 평주 온천에 나가 있을
조선왕조실록과 놀다 <25>
'역사 바로 세우기"를 시작하다
표면적인 정권의 안정을 찾은 건국 첫해를 넘기고 1393년으로 접어들면서, 조선 왕조에서도 이른바 ‘역사 바로세우기’가 시작됐습니다.이해 1월, 사헌부는 전 예문춘추관 학사 이행(李行)의 직첩을 회수하고 국문해 논죄하라고 글을 올렸습니다. 이행은 공양왕 때 지신사(
조선왕조실록과 놀다 <24>
불교를 폐하고 유교를 세우려니
불교와 유교. 고려와 새 나라의 차이점을 얘기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입니다. 사실 불교와 유교는 고려와 조선에서 각기 나라를 이끌어가는 이념적 기반이었기 때문에 두 시기의 차이를 이렇게 설명한대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그러나 변화란 그렇게 쉽게 이루
조선왕조실록과 놀다 <23>
새 임금의 첫 나들이
이야기 23태조는 임금 자리에 오른 지 한 달 만에 황해도 평주(平州)의 온천에 나들이를 합니다. 정신없었을 한 달이 지나고 조금 안정을 되찾았다는 얘기겠지요.새 나라 새 임금의 첫 거둥이니만큼 사헌부에서는 법도를 지켜 후세에 본보기를 남길 것을 청합니다. 의흥친군
조선왕조실록과 놀다 <22>
넘쳐나는 공신들
새로운 정치 주도 세력으로 등장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공신 집단이었습니다.태조는 즉위 열흘 만인 7월 말에 발빠르게 관제를 개정하고 공신들을 주요 관직에 임명했습니다. 배극렴(裴克廉) 조준(趙浚)을 정승인 문하부 좌 우 시중에 앉힌 것을 비롯해, 이화(李和) 김사형(
조선왕조실록과 놀다 <21>
나이 어린 막내를 세자로
왕실이었던 왕씨는 서민으로 물러나고, 이씨는 한 집안에서 왕실로 격상이 됐습니다. 이른바 화가위국(化家爲國)이라는 것이죠. 조상들도 4대까지 모두 임금으로 높이고 존호(尊號)를 올렸으며, 이방원을 동북면에 보내 조상들의 산소에 즉위를 고하고 능호(陵號)도 올렸습니
조선왕조실록과 놀다 <20>
매맞아 죽은 우현보의 아들들
다음은 구세력의 추방입니다.사헌부는 개국 직후 구세력으로 고려의 대사헌이었던 문하부 찬성사 김주를 지목해 처벌토록 건의했습니다. 건의 내용에 과거 정도전이 글을 올리자 처벌을 청했다는 얘기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 권력 핵심에 있던 정도전이 ‘괘씸죄’로 건 모양
조선왕조실록과 놀다 <19>
임금 자리를 공손히 내놓은 ‘恭讓’王
역성혁명이 일어났다고는 해도 모든 것이 하루아침에 바뀔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꼭 바꿔야 할 부분, 즉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는 일단 그대로 놔두는 것이 초기 정권을 안정시키는 데 더욱 효과적인지도 모르지요. 또 모든 것을 한꺼번에 바꾸기는 시간적으로도 어렵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