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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과 놀다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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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과 놀다 <44>

중국 황제에게 올린 글이 말썽

1396년 2월, 설날 축하 사신 유구(柳구)를 따라 중국에 갔던 김을진(金乙珍)과 고인백(高仁伯) 등이 돌아와 예부(禮部)의 공문을 전했습니다. 설날을 축하해 올린 글에 놀리고 멸시하는 부분이 있다며, 글 지은 자를 보내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머지 사신 일행은 ‘인질’로 붙잡아 놓고 말입니다.

조선에서는 즉시 성균관 대사성(大司成) 정탁(鄭擢)과 전교시(典校寺) 판사 김약항(金若恒)이 글을 지었으나 정탁은 풍질로 움직일 수가 없다며, 김약항만 곽해륭(郭海隆)을 시켜 압송케 했습니다.

중국과 말이 다르고 서툴러서 그런 것이지 일부러 그랬겠느냐는 변명 공문을 들려서였습니다. 출발에 앞서 김약항은 중추원 학사, 곽해륭은 대장군의 직함을 주었습니다.

이들을 떠나보낸 뒤 임금은 성균관 대사성 함부림(咸傅霖)을 의주에 보내 김약항을 타일렀습니다.
“그대를 아끼지 않는 것은 아니나, 여러 번 중국의 지시를 어겼기에 보내는 것이다. 그대는 좋은 말로 대답하고 실수가 없도록 하라.”

김약항이 명령을 듣고 말했습니다.
“어찌 마음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김약항은 압록강을 건너기 전에 함부림에게 부탁했습니다.
“전하께서는 군자를 가까이하고 소인을 멀리해 정치와 법제를 정비함으로써 나라를 잘 다스릴 생각을 하시고, 내가 죽고 사는 것은 걱정하지 마시라고 해주시오. 나는 나라를 위해 개인을 잊은 지 오래니, 내 말을 전하께 아뢰어 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그 말을 마치고는 중국으로 떠났습니다.

4월에는 설날 축하 사신의 또 다른 일행 박광춘(朴光春)이 예부의 공문을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이번에는 사신 일행의 가족을 데려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졸지에 식구들을 보내게 된 사신 일행의 집에 임금은 등급에 따라 쌀과 콩을 내려주었습니다. 그러고는 중국에 억류돼 있는 유구를 진천군(晉川君)으로, 정총(鄭摠)을 서원군(西原君)으로, 정신의(鄭臣義)를 오천군(烏川君)으로, 김약항을 광산군(光山君)으로 각각 봉했습니다.

6월에 중국에서는 사신을 보내, 앞서 보내지 않은 정탁과 함께 정도전도 잡아 보내라고 요구했습니다. 조선에서는 이해 황제 생일(9월 18일) 축하 사신을 글 없이 먼저 보낸 뒤, 사역원(司譯院) 판사 이을수(李乙修)를 시켜 예문춘추관 학사 권근(權近)과 우승지 정탁, 경흥부(敬興府) 사인(舍人) 노인도(盧仁度)를 압송케 했습니다. 한성부 윤(尹) 하윤(河崙)은 전말을 보고하는 사신으로 함께 갔습니다.

정도전은 당시 정탁이 지은 글을 교정해야 하는 위치에 있었으나 종묘를 옮겨 모시는 일 때문에 그 다음 책임자인 정총 권근이 교정해 이 일과 관계가 없으며 또 복창(腹脹)과 각기병을 앓고 있어 보내지 못한다는 것이었고, 노인도는 그때 교정을 청한 실무자였습니다.

이때 임금은 권근을 보내는 것을 망서렸는데, 권근이 청했습니다.
“글을 지은 일에는 실상 신도 참여했습니다. 신은 지금 잡혀가는 것이 아니므로 용서받을 수 있고 잡혀가지 않는 자들도 의심을 면할 수 있겠지만, 신이 만일 뒷날 잡혀가게 되면 신의 죄는 도리어 무거워질 것입니다.”

그러자 임금이 권근을 중국에 보냈습니다.
얼마 뒤 임금은 정도전을 삼사 판사에서 물러나게 하고 봉화백(奉化伯)으로 봉했습니다.

11월에는 하윤과 정탁이 돌아왔습니다. 사건과 관계 없는 사신 일행 등은 모두 돌려보낸다며 정도전을 지목해 꾸짖는 내용의 공문을 보내왔습니다. 조선에서는 정총 권근 김약항 노인도 등의 가족을 중국에 보냈습니다.

중국에 억류됐다가 돌아온 유구는 삼사 우복야(右僕射), 정신의는 중추부 지사에 임명됐습니다.

이듬해 3월, 문하부 참찬 안익(安翊)과 중추원 동지사 김희선(金希善)이 예문춘추관 학사(藝文春秋館學士) 권근(權近)과 함께 돌아왔습니다. 왕비 강씨의 죽음을 위로하는 황제의 글과 공문 등을 가지고서였습니다. 특히 권근이 진실해 돌려보낸다고 칭찬하고 황제가 직접 시까지 세 편 지어 주었습니다.

처음에 권근이 중국에 가니, 황제가 이야기를 나눈 뒤 학식이 있는 것을 알고는 제목을 주어 시 24 편을 짓게 했습니다. 권근이 모두 지어 올리니, 황제가 기뻐하며 상을 주고 권근과 정총 등에게 문연각(文淵閣)에 나가 여러 선비의 강론을 듣도록 했습니다.

황제의 노여움이 조금 풀려서 이들을 돌려보내려고 옷을 주고 사흘 동안 돌아다니며 구경하게 한 뒤 제목을 주어 시를 짓게 했습니다. 하직할 때 권근은 내려준 옷을 입었으나 정총은 현비(顯妃)의 상 때문에 흰옷을 입으니, 황제가 화가 나 말했습니다.

“너는 무슨 마음으로 내려준 옷을 입지 않고 흰옷을 입었느냐?”
그러고는 권근만 돌려보내고 금의위(錦衣衛)에 지시해 정총 등을 국문하게 했습니다. 정총은 두려워 도망하다가 잡혀 형(刑)을 당했고, 김약항 노인도는 정총 때문에 함께 형을 당했습니다.

정총 등 세 사람의 집에서 그들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발상(發喪)을 하니, 임금이 듣고 말했습니다.
“황제가 정총 등을 죽였으면 예부에서 틀림없이 공문을 보냈을 것이다. 그 말을 믿을 수 없다.”
그러고는 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1400년에 길창군(吉昌君) 권근(權近)이 김약항은 마음가짐은 강직한데다 나라를 위해 죽었다며 추증(追贈)해야 한다고 청하자, 의정부 찬성사(贊成事) 벼슬에 보국숭록(輔國崇祿)의 품계를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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