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성 공사는 1396년 8월에 재개됐습니다. 이때 경상 전라 강원도에서 징발된 일꾼은 모두 8만 명이었습니다.
이에 앞서 간관들은 거듭 글을 올려 성 쌓는 공사를 중지하라고 청했습니다. 백성의 힘을 쉬게 함으로써 가을갈이에 차질이 없도록 하고, 군사 훈련에 온 힘을 쏟아 뜻밖의 사태에 대비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임금은 도읍에 성이 없으면 안 되는데 굳이 말리는 것은 무슨 까닭이냐며 꾸짖고, 집에 가서 대기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임금은 도평의사사에 지시해 도성 마무리 공사에 대해 가부를 물었습니다. 찬성사 이하가 모두 옳지 못하다고 하자, 임금이 신하들을 불러 물었습니다.
“내가 도읍을 옮기고 성곽이 거의 다 되었는데, 마무리 공사에 대해 모두 안 된다고 말하니 어쩐 일인가? 그러면 내가 어떻게 도읍을 이리로 옮기겠는가?”
삼사 좌복야 우인열이 대답했습니다.
“신들이 안 된다고 하는 것은 영원히 성을 쌓지 말자는 것이 아니라 잠시 풍년을 기다리자는 것입니다.”
정당문학 한상질은 대답했습니다.
“신들이 안 된다고 하는 것은, 금년 초에 가물고 나중에는 홍수가 졌으며 또 누리 피해까지 있어 벼가 잘 익지 않았으니 내년에 가서 공사를 마치는 것이 낫겠다는 것입니다.”
임금이 말했습니다.
“내가 벌써 각 도 관찰사에게 지시해 성 쌓는 공사의 양곡을 지급하게 했다.”
문하부 참찬 안익이 대답했습니다.
“신들은 이미 양곡을 지급하라는 지시가 내린 줄 모르고 안 된다고 했으니, 신들이 모두 죄가 있습니다.”
임금이 안익의 말을 듣고 노여움이 조금 풀려 술을 주어 보내도록 지시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결국 공사는 재개됐습니다. 임금은 도성 공사를 둘러보고 감독관에게 술을 내려주었습니다.
공사 도중 사건이 하나 발생했습니다. 도성 공사 감독관인 전 사재시 감(監) 박이(朴理)가 군사를 시켜 큰 돌을 운반하다가 길이 좁아 전 밀직 이사위(李士渭)의 집 울타리를 부쉈는데, 이사위가 박이를 때리고 욕한 것입니다.
성문 제조(提調) 최유경 등이 보고하니, 임금이 이사위의 종 20 명을 남문 공사에 보내도록 했습니다. 형조에서 다시 글을 올려 이사위가 박이를 때리고 욕한 죄를 논하니, 이사위를 순군부 옥에 가두었다가 10여 일 만에 풀어주었습니다.
이 공사는 9월 하순에 끝나 장정들을 돌려보냈습니다. 봄철에 쌓은 곳에 물이 솟아나 무너진 곳이 있기 때문에 석성으로 쌓고 간간이 토성을 쌓았습니다. 구름다리도 빗물이 덮쳐 무너진 곳이 있어 다시 쌓았습니다.
또 구름다리 한 곳을 두어 수세(水勢)를 나누게 하고, 석성이 내려앉은 곳은 더 쌓았습니다. 각 문(門)의 누각도 지었습니다. 이때 이루어진 문의 이름은 다음과 같습니다.
<표-문이름>
임금은 도성제조(都城提調)인 권화 박자안 신유현(辛有賢)에게 대궐 말 1 필씩을 내려주었습니다.
그러나 공사는 계속된 듯합니다. 10월 초에도 임금이 성 쌓는 공사를 보았다는 기록이 있으며, 이듬해에도 도성 공사에 대한 기록은 계속 나오기 때문입니다.
1397년 1월, 풍해도 도관찰사는 도내 인민들이 바람 홍수 피해와 누리의 재해로 농사를 망치고 굶주림과 가난에 시달리고 있는데 도성 공사에 각자 식량을 가지고 가게 되면 그 어려움이 더욱 심할 것이라며, 도내의 쌀과 묵은 콩을 지급하자고 청해 허락을 얻어냅니다.
또 같은 달에 일꾼 가운데 상(喪)을 당한 자와 병자 노약자를 놓아 보냈다는 기록과 임금이 동대문에 거둥해 옹성 터를 살펴보았다는 기록도 나옵니다.
4월이 돼서야 임금은 궁실 짓는 것이 대충 끝났으니 미비한 것은 나중에 하자며, 공사를 모두 중단해 오직 군사를 기르고 양곡을 비축하는 데에 힘쓰라고 도당에 지시합니다.
그러고는 삼사 영사 이화와 봉화백 정도전에게 지시해 궁궐 공사 감독관들에게 잔치를 베풀게 했습니다. 자신은 흥인문(興仁門)에 거둥해 옹성을 보고, 성을 돌아 동소문까지 갔다가 돌아왔습니다.
8월에는 다시 경기 안의 백성을 징발해 도성을 수축케 했다가 10월에 일꾼들을 돌려보냈습니다. 이듬해 1398년 5월에는 경기좌도와 충청도 고을로 하여금 시기에 맞추어 도성을 보완하게 했습니다. 둘레가 9천7백60 보 남짓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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