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년 12월 24일 11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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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과 놀다 <78>
이방원, 드디어 세자가 되다
정안공 이방원이 정종의 뒤를 이을 세자로 결정된 것은 이방간의 거사가 실패한 다음다음날이었습니다.문하부 참찬 하윤 등이 청했습니다.“정몽주의 난에 정안공이 없었다면 큰 일이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이고, 정도전의 난에 정안공이 없었다면 또한 어찌 오늘이 있었겠습
이재황 실록연구가
조선왕조실록과 놀다 <77>
이번엔 친형을 몰아내다 ③
서익이 창을 잡고 이방간을 쫓으니, 이방간은 형세가 궁해 북쪽으로 달아났습니다. 이방원이 소근을 소리쳐 불러 말했습니다.“무지(無知)한 사람이 혹 형을 해칠까 두렵다. 네가 달려가서 빨리 소리쳐 해치지 말게 하라.”소근이 고신부(高臣傅)․이광득(李光得)․
조선왕조실록과 놀다 <76>
이번엔 친형을 몰아내다 ②
승지 이숙번이 이방원을 따라 사냥을 가려고 나가다 백금반가(白金反街)에 이르렀는데, 민무구가 사람을 보내 말했습니다.“빨리 갑옷 입고 무기 들고 오시오.” 이숙번은 곧 이방원의 집으로 달려갔습니다.그가 도착하기 전에 이방원은 이미 군사를 정돈하고 나와 시반교(屎
조선왕조실록과 놀다 <75>
이번엔 친형을 몰아내다 ①
정종이 즉위한 뒤에 남재가 대궐 뜰에서 큰 소리로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지금 당장 정안공을 세워 세자로 삼아야 합니다. 이 일은 늦출 수가 없습니다.”정안공 이방원이 듣고 크게 화를 내며 꾸짖었지만, 임금의 정실인 왕후 김씨에게 아들이 없으니 임금의 동복 아우
조선왕조실록과 놀다 <74>
‘말썽꾸러기’ 장사정과 곽충보
조선 건국 초기에 두 ‘말썽꾸러기’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공신인 장사정이고, 또 하나는 앞서 부인들의 추문에 잠시 언급됐던 곽충보라는 무장입니다. 말썽도 집안 내력인지, 장사정의 말썽에는 그 형 장사길이, 곽충보의 말썽에는 아들 곽승우가 곁들여집니다.개국․
조선왕조실록과 놀다 <73>
백제의 후손을 자처하는 일본인
1399년 5월 전년에 태조의 지시로 일본에 갔던 통신관(通信官) 박돈지(朴惇之)가 일본에서 돌아왔습니다. 일본국 대장군도 사신을 보내 특산물을 바치고 잡혀갔던 남녀 1백여 명을 돌려보냈습니다.앞서 일본에 간 박돈지는 그곳 대장군에게 우리 임금의 지시를 전했습니다.
조선왕조실록과 놀다 <72>
무고의 단골메뉴 ‘역모’
‘역모’는 나라의 근본과 관계되는 중대 문제라 나라에서도 가장 큰 관심을 갖고 있는 문제입니다. 그래서인지, 남을 모함하는 무고 사건 가운데는 역모가 단연 으뜸입니다.1394년 3월, 판사 장담이 들어와 고했습니다.“이인길(李仁吉)이란 사람이, 9백여 명이 함께 변란을
조선왕조실록과 놀다 <71>
고관 부인들의 잇단 탈선
1399년 3월, 죽은 중추원 부사 구성우(具成祐)의 아내 유(柳)씨가 참형을 당했습니다. 유씨는 처음에 김익달(金益達)이라는 사람에게 시집갔는데, 김익달이 장가든 지 사흘 만에 유씨를 버려 뒤에 구성우에게 시집갔습니다. 구성우가 아들이 없이 죽자 유씨는 명복을 빌러 간
조선왕조실록과 놀다 <70>
의안공과 정승들의 2선 후퇴
1399년 12월에는 글자 그대로 ‘건국 이래’ 최대의 인사 개편이 단행됐습니다. 새 나라가 들어선 뒤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만 7 년 동안이나 권력의 핵심인 정승 자리를 지켜오던 조준․김사형 두 정승이 한꺼번에 물러나고, 1 년여 전 쿠데타 이후 신하들의 웃어
조선왕조실록과 놀다 <69>
조박과 이저, 누가 더 셌나
조박은 이때 ‘실세(實勢)’였던 임금의 아우 이방원의 동서이자 또 다른 임금의 아우 이방간과 사돈간입니다. 또 임금의 후궁 유씨와도 연결됩니다. 반면 이저(李佇)는, 이백경(李伯卿)이라는 이름이었으나 정종이 즉위해 이름을 경(曔)으로 고치자 같은 발음을 피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