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9년 12월에는 글자 그대로 ‘건국 이래’ 최대의 인사 개편이 단행됐습니다.
새 나라가 들어선 뒤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만 7 년 동안이나 권력의 핵심인 정승 자리를 지켜오던 조준, 김사형 두 정승이 한꺼번에 물러나고, 1 년여 전 쿠데타 이후 신하들의 웃어른 노릇을 하던 의안공 이화도 핵심 부서에서 물러났습니다.
이 인사는 몇 달 전부터 제기돼온 문제들을 모두 수용한 것입니다.
맨 먼저 제기된 문제는 종친인 의안공 이화의 관직 문제였습니다. 이화는 태조의 서제, 그러니까 임금과 이방원 등에게는 숙부 뻘입니다. 그는 쿠데타 직후 임금의 형제들과 같이 공(公)의 작위를 받고 문하부 판사 겸 의흥삼군부 영사에 임명됩니다. 당시 국가 기구의 양 축이라 할 수 있는 정부와 군부의 맨 웃자리를 동시에 차지한 것이죠.
6월에 문하부에서는 이를 문제삼는 글을 올렸습니다.
“옛날에 처음으로 제후가 된 임금은 숙부들과 형제를 신하로 삼지 않았고, 처음으로 제후가 된 임금의 아들은 숙부들을 신하로 삼지 않고 형제는 신하로 삼았습니다. 이것은 세대가 내려가면서 친족 관계가 줄어듦을 드러내고 임금과 신하의 분별을 높이는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처음으로 제후가 된 임금의 아드님이시니, 숙부 관계에 있는 사람을 신하로 삼지 않는 예로 대접하는 것이 옛 제도에 부합합니다. 지금 의안공 이화가 벼슬이 조정에 으뜸이고 병권까지 아울러 장악했으니, 이것은 숙부를 신하로 삼지 않는 원칙에 어긋나는 측면이 있습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전하께서는 한결같이 옛 제도에 따라 의안공을 숙부의 예로 대접하셔서 문하부 판사의 직임과 병권을 거두어들이소서.”
8월에는 좌정승 조준이 글을 올려 사직을 청했습니다. 임금은 사직을 청하는 글을 보기 전에 도승지 이문화에게 말했습니다.
“어제 꿈에 조준이 나를 보고 스스로 공민왕 이래로 두루 벼슬해온 노고를 말하고, 정승을 사임하기를 청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문화가 조준의 글을 펴서 읽으니, 임금이 탄식해 말했습니다.
“내가 덕이 없는 몸으로 이 큰 기업을 이어받아 훈신(勳臣)의 협찬과 보필에 힘입어 태평 시대를 이루었는데, 어찌 이다지도 빨리 사임을 청하는가?”
그러고는 우승지 이숙(李淑)을 시켜 윤허하지 않는 비답(批答)을 가지고 조준의 집에 가 위로하도록 했습니다. 조준이 이를 읽고 감격해 울었습니다.
11월 들어서는 우정승 김사형이 병을 이유로 글을 올려 사직했습니다. 임금은 도승지 이문화에게 일렀습니다.
“아직 이 글을 보류하고 병의 차도를 기다리도록 하라.”
임금은 도승지 이문화를 보내 김사형에게 업무를 보도록 타일렀습니다.
좌정승 조준은 12월에 다시 사직을 청했습니다. 재이(災異) 때문이었습니다. 이 무렵 임금은 백관을 거느리고 태상왕을 뵈었습니다. 잔치를 베풀어 풍악을 잡혔으며, 한껏 즐겼습니다. 이거인, 성석린이 일어나 춤을 추었습니다.
임금이 태상왕께 아뢰었습니다.
“지금 두 정승이 모두 사직을 청하는데, 어떻게 처리할까요?”
태상왕이 말했습니다.
“조준과 김사형은 사람들 가운데 뛰어난 사람이다. 그러나 굳이 물러나겠다면 심덕부, 성석린도 대신할 만한 사람들이다.”
임금은 이 말을 그대로 수용해 인사를 단행했습니다. 먼저 이화를 심덕부가 있던 삼사 영사 자리로 옮기고, 조준을 이화가 앉았던 문하부 판사 자리로 돌렸으며, 조준이 맡았던 좌정승에는 심덕부가 들어가는 삼각 이동이 이루어졌습니다. 우정승에도 태상왕이 추천한 성석린을 앉혔습니다.
심덕부는 7월에 삼사 영사 자리를 물러나겠다고 청했었고, 성석린은 이미 4월에 늙고 병들었다며 서북면 도순문사 겸 평양부 윤에서 물러난 상태였습니다. 우정승에 임명된 성석린은 사촌동생의 상중이라며 업무를 보지 않았으나, 문하부와 중추부 대신은 상중에라도 특별 명령으로 업무에 나오게 하는 법을 새로 만들어 취임하게 했습니다.
이와 함께 이거이(李居易)는 문하부 시랑찬성사, 민제(閔霽)는 삼사 판사, 하윤(河崙)은 문하부 참찬, 이직(李稷)은 문하부 지사, 권근(權近)은 정당문학에 임명돼 공신 세력이 정승급 바로 밑에까지 대거 진출했습니다.
한편 이보다 앞서 11월에는 군사권을 종친들에게 집중시키는 조치를 취했습니다. 사헌부에서 가병(家兵)을 없애도록 글을 올리고, 대간이 함께 글을 올려 다시 한 번 청했기 때문입니다.
너도나도 군사를 거느려 적과 싸우는 때와 같으니 충의가 있는 지친(至親)으로 군사를 맡을 만한 사람을 골라 주관하게 하고 나머지는 군사를 맡지 못하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임금은 옳게 여기고 여러 도의 군사를 종친들에게 나누어 맡겼습니다. 임금의 아우인 이방의는 경기 충청도, 이방간은 풍해도 서북면, 이방원은 강원도 동북면을 맡았고, 임금의 매부인 상당후 이저는 경상도 전라도를 맡았습니다.
문하부 참찬 이거이, 조영무, 문하부 참지 조온, 중추원 동지사 이천우도 군사를 맡는 데에 참여하고, 그 나머지 군사 맡은 자는 모두 거둬들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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