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건국 초기에 두 ‘말썽꾸러기’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공신인 장사정이고, 또 하나는 앞서 부인들의 추문에 잠시 언급됐던 곽충보라는 무장입니다. 말썽도 집안 내력인지, 장사정의 말썽에는 그 형 장사길이, 곽충보의 말썽에는 아들 곽승우가 곁들여집니다.
개국 정사(定社)공신인 장사정은 1399년 5월 전 판사 남궁서(南宮恕)의 아내를 붙잡아 귀를 자르고 때려 죽였습니다. 문하부에서는 이 일과 함께 그 이웃 마을 사람 가운데 상처를 입어 거의 죽게 된 자도 많다며 처벌을 청했습니다. 임금은 개국 정사의 공로 때문에 국문은 허락하지 않고 직첩만 거두어 함주(咸州)로 귀양보내게 했습니다.
이 일을 사헌부에 내렸으나 며칠 지체하자 문하부에서 잡단 민공생(閔公生)을 탄핵했습니다. 사헌부에서 장사정을 섬에 안치하라고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고 다만 청주(靑州)로 옮겨 안치하게 했습니다. 형조에서는 장사정이 감히 개인적인 분풀이로 나라 법을 어겼으니 사헌부에서 아뢴 대로 처리해 뒷사람을 경계하라고 청했으나 역시 윤허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문제는 엉뚱한 곳으로 번집니다.
남궁서의 아들이 사헌부에 원통함을 호소했으나 사헌부의 민공생은 관원들이 모이지 않았다는 핑계로 처리하지 않아 낭사에서 탄핵한 것입니다. 민공생은 회안공 이방간의 처남이었는데, 이방간이 임금에게 아뢰어 민공생으로 하여금 다시 업무를 보게 했습니다.
탄핵받은 대간 관원은 임금이 다시 비답을 내리기 전에는 다시 출근하지 못했는데, 이런 원칙을 민공생이 깬 것입니다. 낭사가 또 이를 탄핵해 형관이 법을 어겨 탄핵을 당하면 다시 임명하지 말라고 글을 올렸습니다. 글이 올라가자 임금이 옳게 여기고 도승지 이문화에게 지시해 명령을 전했습니다.
“앞으로 글을 올리는 말을 거만하게 하지 말고, 오늘 이전에 탄핵당한 자는 거론하지 말라. 풍문으로 들은 의심스런 일도 탄핵하지 말라.”
이때에 형조 의랑 구종지(具宗之)와 좌랑 박안의가 다른 일로 탄핵당했는데, 임금이 민공생과 구종지, 박안의를 불러 원래의 직책에 돌아가도록 지시했습니다. 낭사가 듣고 다시 민공생을 탄핵하니, 이방간이 임금에게 호소했습니다. 임금이 화가 나 간사인 우습유 탁신(卓愼)을 불러 꾸짖었습니다.
“민공생이 이미 명령을 받고 직무에 복귀했는데, 다시 탄핵하는 것은 무슨 까닭이냐?”
“대간과 형조의 낭리(郞吏)로서 탄핵당한 자는 반드시 비답이 고쳐 내려진 뒤에 출근하는 것이 옛 법입니다. 민공생이 어찌 어명을 받았다고 옛 법을 무너뜨릴 수 있겠습니까?”
임금이 화가 나 말했습니다.
“그 부서에서 하는 일이 꼭 모두 옳은 것도 아닌데 스스로 옳게 여기고, 내가 하는 일이 꼭 모두 그른 것도 아닌데 도리어 그르게 여기니, 그 까닭은 무엇이냐?”
곧 순군부 당직자에게 지시해 그 집으로 압송하고 업무를 보지 말게 했습니다. 그러자 좌습유 김익정이 병을 무릅쓰고 대궐에 나와 아뢰었습니다.
“지난번에 대간 형조의 관원으로 탄핵당한 자는 구두 지시로 다시 업무에 복귀시키지 말라고 문하부에서 글을 올려 말해 주상께서 이미 허락하셨는데, 지금 다시 탁신을 꾸짖어 집으로 돌려보내셨습니다. 신은 이 때문에 언로가 가리고 막힐까 두렵습니다. 또 낭사 간사는 신(臣)이지 탁신이 아닙니다.”
임금이 이문화를 시켜 명령을 전했습니다.
“그대가 과인의 전날 일을 잘못되었다고 하는 것인가?”
김익정이 대답했습니다.
“신이 요즘 휴가였던 탓에 일찍이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민공생이 출근하는 것은 예전에 그런 예(例)가 없었으니, 신이 감히 아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순군부 나장(螺匠)으로 하여금 좌습유 김익정을 그의 집으로 압송케 했습니다.
사헌부 중승 이승상 등이 문하부 낭사를 용서하라고 글을 올렸으나, 임금은 문하부 낭사를 모두 좌천시켰습니다. 박석명(朴錫命), 안노생(安魯生), 권진(權軫), 김분(金汾)은 모두 지방 수령으로 좌천됐고, 황희(黃喜), 허조(許稠)는 파직됐습니다.
우간의대부 맹사성은 업무를 본 지가 얼마 안 돼 처음부터 의논에 참여하지 않았으므로 김익정 탁신과 함께 복직됐습니다. 김익정과 탁신은 부모의 병을 핑계로 잇달아 사직해 돌아갔으나, 민공생은 다시 잡단이 됐습니다.
한편 이해 6월에 전 중추원 상의 곽충보가 청주(淸州)로 귀양갔습니다. 곽충보는 그 아들 곽승우(郭承祐)와 더불어 개인적인 원한으로 전 소감(少監) 황문(黃文)과 그 아내, 그리고 학생 김환(金桓) 등을 잡아다 묶어 놓고 때려 거의 죽게 만들었으며, 또 사람의 똥을 입과 뺨에 발라 형조로부터 탄핵을 받았습니다.
임금은 곽충보가 본디 무공(武功)이 뚜렷하다며 청주로 귀양만 보내고, 곽승우의 별장 직책을 파면했습니다. 형조에서 글을 올려 곽충보 부자를 법에 따라 단죄할 것을 다시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고 곽승우의 직첩만 회수했습니다.
이해 7월 임금 생일에 장사정 곽충보는 모두 용서를 받았으나, 이들은 이듬해에 각각 다시 탄핵을 받습니다.
먼저 1400년 6월 사헌부는 장사정과 그 형인 화산군(花山君) 장사길을 싸잡아 처벌하도록 청합니다. 이방간의 변란 직후 지방에 부처됐다가 복직된 것을 원망해 어미 병을 핑계로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수령과 양민을 멋대로 부리고, 금주령을 어겼으며, 지진이 일어난다는 요승(妖僧)의 거짓 꾀임에 속아 불법을 저질렀고, 사냥을 다니다가 사람을 강에 빠져 죽게 했으며, 농사철에 임금 행차처럼 온천에 드나들어 민폐를 끼쳤다는 등 다섯 가지 죄목을 꼽았습니다. 그러나 임금은 그들이 서울에 올라오면 다시 의논하고, 우선은 거론치 말도록 했습니다.
7월에는 문하부에서 곽충보 등 12 명을 지방에 귀양보내자고 청해 그대로 따랐습니다. 이방간의 난에 관련됐다가 용서받은 곽충보, 이침, 이백온, 환유, 설숭, 박인길, 김보해, 곽승우, 황재, 곽원(郭願), 임천년, 최용소 등이 반성하지 않은 채 친구들을 이끌고 시가지를 달리기도 하고 칼을 차고 화살을 메고 시골 마을에 횡행하니 제재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임금은 종친인 이백온을 제외하고 모두 지방에 보내도록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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