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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만 촛불이 나서면 박근혜는 물러날까"

[프레시안 뷰] 지금 '광장'에서 논쟁해야할 것들

청와대 진격인가, 평화 시위인가

다시 주말입니다. 이번 주에도 100만 명, 아니 그 이상의 사람들이 모일 것입니다.

100만 명이 모인 집회가 어떤 형태로 나타나야 하는가에 대한 다양한 의견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가능하고 필요한 일입니다. 이들의 의견이 모두 하나로 일치되어야 한다면, 혹은 그 중 몇 개만이 절대적으로 옳다면, 그것은 자유가 질식된 민주주의라고 불러도 좋을 것입니다.

폭력과 비폭력에 대하여 사람마다 입장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중 어떤 입장이 더 설득력이 있다고 결론 내리기란 쉽지 않습니다. 마키아벨리와 카이사르의 말대로, 그것은 상황에 따라 항상 달라집니다.

그래도 여기에 일반적 가설이 없지는 않습니다. 2012년, 1980년생의 젊은 정치학자 에리카 체노베쓰(Erica Chenoweth)는 <Why Civil Resistance Works>를 써서 미국정치학회 올해의 책 상을 받았습니다.

이 책에서 에리카 체노베쓰와 그의 동료들은 자료가 수집 가능한 20세기의 시민혁명 사례 323개를 조사했습니다. 연구자들은 이들을 200여 개의 폭력혁명과 100여 개의 비폭력 시위로 구분해서 분석했습니다.

그 결과, 폭력 시민혁명의 성공률은 26%, 비폭력의 경우는 53%였습니다. 더 주목할 만 한 점은, 폭력 혁명의 경우 성공한 이후에 다시 독재로 돌아간 경우가 많았던 반면에, 비폭력 시위로 성공한 경우에는 민주주의가 안착된 경우가 많았다는 결과를 얻었습니다.

또한 기존 연구에서는 시민저항이 성공하는 경우의 참여 인원을 전체 인구의 5% 이상으로 보았지만, 이들의 조사에서는 국민의 3.5% 이상이 시위에 참여한 경우, 그 시민혁명은 결코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비폭력 시위의 성공률이 더 높은 이유, 그리고 그 이후에 민주주의가 더 잘 안착되는 이유에 대해 체노베쓰는 '우리는 시위 유형에 따른 성공 여부나 이후의 진행 경과에 대한 데이터를 갖고 있을 뿐이지, 질문한 부분에 대한 답을 지금 드리기는 어렵다'고 전제하면서 다음과 같은 가설을 제시했습니다.

'폭력 집회보다는 비폭력 집회에 더 많은 사람들이 쉽게 참여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한 경우 결과적으로는 시위의 목적을 달성하는데 더 효과적이라는 결과를 어쨌든 우리는 갖고 있다. 그리고 장기적으로 볼 때, 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한 경우에 그 민주주의는 힘이 세다는 것이 역시 증명되고 있지 않는가 생각한다.'

평화 시위가 항상 옳다는 말인가?

어떤 분들은 이 연구 결과를 보시고, 생각할 것입니다.

'거 봐, 역시 비폭력 시위가 더 효율적이라잖아. 그러니 폭력 시위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틀렸어.'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체노베쓰 본인도 언급했듯이, 이 연구 결과는 명확한 인과관계를 설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연구는, 비폭력 시위도 47%는 실패했으며, 폭력적인 수단을 통한 혁명도 26%는 성공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또한 참가자가 3.5%에 이르지 못했던 많은 시민저항도 성공했습니다.

기실 모든 시위가 단순히 한 번의 사례로 카운트되는 이러한 계량적 방식의 분석은 여러 질적인 차이에 의한 변수, 가령 그 중 어떤 저항이 가장 중요하고 결정적인 것이었는지를 설명하지 못합니다.

또한 어떠한 폭력 시위가 나중에는 다수가 참여하는 비폭력 시위의 원동력이 되어서 결과적으로 그 저항을 성공으로 이끌었는지에 대한 구체적 관계 등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다만 시위의 비폭력성과 그것의 성공 간에 통계적 유의미성이 존재하며, 비폭력을 통한 시위를 주장하는 것이 '일반적으로' 인정될 수 있다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즉, 이 통계는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에서 어떤 행동이 옳다는 것에 대해서는 사실상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을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는 거리에 있다

모든 통계적 수치는 그로부터 곧바로 결론이 도출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논쟁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시작점일 따름입니다.

체노베쓰의 연구는 시위의 폭력/비폭력뿐만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맞닥뜨린 상황에서 어떠한 해법이 가장 바람직한지, 그것을 위해 우리는 어떠한 행동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쟁을 시작할 수 있는 계기인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러한 일반적인 통계적 유의미성이 현재 우리의 상황에 적절한 것인지를 우리 스스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 판단은 자신과의 대화뿐 아니라 광장과 SNS상에서 만나는 다른 사람과의 대화를 통해서 내려져야 합니다.

그 판단에 동의하거나 동의하지 않는다고 해서, 설령 그 판단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 대단히 극소수라고 하더라도 그 판단이 그르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은, 우리가 자유에 기반을 둔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한 현재에도 불가능하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광장에 나온 시민으로서, 우리 모두는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강압이 아니라 대화로 서로를 설득할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타인의 판단을 존중하면서 우리의 미래를 스스로 개척하는 것입니다. 그에 따른 결론이 지금까지의 모든 연구결과에 반하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실행하기에 충분히 정당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박근혜 이후의 나라를 어떻게 만들어 갈 것인지에 대해, 우리는 거리에서 사람들과 만나서 이야기해야 합니다. 또한 그것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새로운 정치'의 시작입니다.

축제와 성찰이 어우러지는 광장

1987년 이후 우리가 모든 것을 다 이룬 듯이 정치에 무관심하고 각자도생의 길을 선택한 결과, 우리는 정확히 30년 만에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거리의 민주주의는 축제의 장이어야 하지만, 동시에 성찰의 장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먼저, 정치에 무관심했던 그동안 우리와 우리 자식들의 삶이 얼마나 피폐해졌는지, 왜 우리에게 미래는 없는지, 대한민국은 어떻게 부정의와 몰염치가 판치는 세상이 되었는지, 그래서 우리 하나 하나는 또한 역사와 우리 자식들 앞에서 부끄러운 존재인지를 고백해야 합니다.

지금도 출세를 위해 권력의 눈치를 보며 이리저리 줄서기를 고민하는 검사들, 불법과 비리를 저지르고도 대통령의 측근에게 돈을 갖다 바치며 사건을 무마하는 재벌들, 무자격자가 내리는 부조리한 명령을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묵묵히 수행했던 고위 공무원들, 최순실의 위세 앞에서 선생으로서 최소한의 양심조차 던져버리고 발가벗었던 교수들.

바로 이들이 우리가 항상 부러워했던 그런 사람들은 아닌지, 우리 자식들에게 성공이라고 가르쳤던 길은 아닌지, 막상 나 자신도 그런 입장이 되면 별 수 없을 거라고 지금도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그것에 대해 우리는 거리에서 서로 만나 이야기해야 합니다.

100만 명이 모여서 박근혜의 하야를 외치는 것이 단지 자랑스러운 것이 아니라, 이 나라를 이렇게 만든 장본인이 바로 우리이며, 우리가 먼저 바뀌지 않고서는 이 사회가 절대 바뀌지 않으리라는 것에 대해 우리는 이야기해야 합니다.

100만 명의 힘이 아무 것도 아니라면, 새누리당은 왜 둘로 갈라졌고, 야당 대표는 왜 영수회담을 철회했으며, 박근혜는 왜 제대로 된 변호사 하나 구하지 못하고, 기자들은 왜 갑자기 그렇게 용감해졌단 말입니까?

그래서 이 시민적 저항은, 단지 박근혜를 퇴진시키기 위한 싸움이 아닙니다. 박근혜가 퇴진할 때까지 매주 모일 100만 명의 시민들은, 단지 박근혜를 퇴진시키기 위해서 모이는 것이 아니라 이 땅의 민주주의에 대해, 인간이 살 수 있는 대한민국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모이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가 어디서부터 왜 망가졌는지에 대해 성찰하는 계기를 만들기 위해, 자기 고백을 통해서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 그래서 지금을 우리의 민주주의에서 위대한 또 한걸음을 딛는 순간으로 만들기 위해서, 우리는 모이는 것입니다.

이번 주에는 수능이 치러졌습니다. 대부분 취업 전진기지 이상도 이하도 아닌, 그나마 그것도 제대로 보장해주지 못하는 대학을 가기 위해 우리의 청춘들은 학교와 학원으로 맴돌았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공정하다고 생각했던 이 경쟁에서도, 중고등학교와 대학을 말을 타고 유유히 들어간 사람, 그리고 그것도 실력이라고 주장한 사람과 그의 부모와, 그것을 비호해 준 대통령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주에는 입시에만 억눌려 있던 이 가련한 청춘들이, 거리에서 민주주의의 기운으로 충만한 자유를 만끽하고, 하고 싶은 말을 목청껏 외치면서 그 무거웠던 짐을 하늘로 훌훌 날려버리면 좋겠습니다.

저 하잘 것 없는 박근혜가 들으라고 외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부끄러운 어른들이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말입니다. 그리고 그 목소리가 하늘에도 닿을 수 있도록 말입니다.

▲ 지난 12일 서울 광화문 인근을 가득 메운 시민. ⓒ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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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관후

16대, 17대 국회에서 보좌진으로 일하고, 영국 런던대학교(UCL)에서 '정치적 대표'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와 경남연구원에서 일하고, 행정안전부 장관정책보좌관, 국무총리 메시지비서관을 지냈다. 정치의 이론과 현실에 모두 관심이 있다. 건국대 상허교양대학 교수로 있으며, <프레시안>을 비롯해 <경향신문>, <한겨레>, <피렌체의 식탁>에 칼럼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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