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는 있고, 공화당은 없다
근대 이후 우리 사회는 늘 미국을 동경해 왔습니다. 미국에서 유행하는 것이면 그것을 세계 어디보다 먼저 가져오고 싶어 했습니다. 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상관없이 말입니다.
사드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미국보다 한 발 앞서 트럼프를 만났고, 그에게 승리를 안겼습니다. 그런데 함께 수입하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공화당입니다.
총선 패배의 원인이 규명되다
총선 이후 넉 달이 채 지나지 않았습니다. 새누리당의 총선 패배 원인에 대해 당내 계파별로 해석이 달랐습니다. 한 쪽은 청와대의 무리한 공천 개입과 친박계의 횡포가, 다른 한 쪽은 일사분란하지 못했던 지도부가 패배의 이유라고 주장했습니다. 전당대회에서 그 결과가 나왔습니다.
당이 일부 손실을 감수하더라도 대통령의 국정 운영에 도움이 될 사람들을 공천해야 한다는 기조를 세우고, 지도부가 공천을 일사분란하고 신속하게 지휘했더라면 패배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입장이 승리했습니다. 청와대와 친박 모임에서는 이랬을 겁니다.
'총선 결과가 이렇게 된 게 다 누구 때문이야? 김무성, 그 친구 협조를 좀 잘 했으면, 우리가 대선 후보로 밀어줄 수도 있었잖아. 대표가 중심을 딱 잡고, 여당 의원으로서 국정을 잘 보좌하지 못한 사람들을 공천할 수 없다, 이렇게 나왔으면, 공천 분란 같은 거 있지도 않았어. 선거도 이렇게 됐을 리가 없고. 국민들은 혼란스러운 걸 제일 싫어한다고. 그 친구, 아직 정치 멀었어.'
'정치'를 해 본 적이 없는 두 사람
우리 대통령은 트럼프와 많은 면에서 다릅니다. 일단 성별도 다르고, 스타일도 다릅니다. 트럼프는 대중과의 접촉을 즐기지만 우리 대통령이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하는 것을 보기란 하늘의 별 따기입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이 같은 한 가지가 있습니다. 두 사람은 대통령이 하고 싶은 것이지 정치를 하고 싶은 게 아닙니다. 그리고 정치를 한 번도 해 본적이 없습니다.
여기서 정치란 우리가 흔히 '정치'라고 부르는 그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영국의 정치학자 버나드 크릭(Benard Crick)이 <정치를 위하여(In Defence of Politics)>에서 정의한 정치란 "나와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설득하고 대화하고 타협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나와 다르다는 것은 단순히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넘어서 출신 배경, 사회 계층, 교육 수준, 경제력, 종교, 인종 등 한 개인을 구성하는 모든 정치, 사회, 문화적 배경을 말합니다.
인간이 사회를 이루고 살게 된 이후, 특히 근대 산업사회 이후로는 우리와 같은 사람을 만나기보다는 우리와 다른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이처럼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질서가 필요하고, 이 질서를 유지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물리적 / 비물리적 수단을 통해 사회를 하나로 통합시키는 것, 다른 하나는 서로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대화를 통해 최소한의 타협을 이루어나가는 것입니다. 전자의 극단적 사례는 전체주의, 파시즘이고, 후자는 '정치'입니다.
트럼프가 '정치'를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비교적 분명해 보입니다. 그는 '호전적 기독교를 믿는 백인 남성 노동자' 이외의 모든 사회적 집단과 대화를 하기는커녕, 이들을 사회 밖으로 축출하려고 합니다. 만약 트럼프의 국가에서 다른 집단들이 계속 살아간다면, 이들은 말 그대로 호모 사케르, 곧 보호받지 못하는 자가 될 것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어떻습니까? 태어나서 단 한번이라도 자신과 생각이 다른 누군가를 진지하게 설득해 본 적이 있을까요? 대통령은 이번에 중국에 가서 '우리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겠다는 야당 의원들에 대해 '국론을 분열시킨다'고 비판하고 '초당적 협력'을 강조했습니다. 그 이유로 '국가 안보'를 들었습니다.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번의 경우가 예외적이라면 말이지요. 그런데 '국가 안보' 말고 다른 문제에 대해서는 대통령이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 본 적이 있습니까?
지시하고, 고집부리고, 삐치고, 원한을 품고, 반대자를 색출하는 것은, 단언컨대 정치의 기술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정치가 아닙니다. 우리 대통령, 한번이라도 '정치'를 해 본적이 있습니까?
'그런 인간을 저는 사람으로 안 본다'
미국에는 트럼프가 있지만, 공화당도 있습니다. 공화당은 정치를 할 줄 압니다. 적어도 정치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공화당이 저렇게 트럼프와 거리를 두려는 태도에 대해, 대선과 함께 치러지는 총선에서 함께 패배하지 않기 위해서라는 '공학적' 분석은 일리가 있습니다. 정치를 포기한 정당에게 다수의 유권자들이 표를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난 총선 패배 직후, 친박들이 겉으로는 아무 말 못하고 있을 때, 호남에서 당선된 이정현 의원만은 그나마 언론과 인터뷰를 했습니다. 그는 유승민에 대해 '그런 인간을 저는 사람으로 안 본다'고 말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정치인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와 미덕은 '진정성과 의리'인데, '자기를 믿어주고 정을 나눈 사람에게 등을 돌린다는 것은 아주 독한 심사를 가졌다는 뜻'이기 때문이라고 밝혔습니다. 김무성 당시 대표에 대해는 '감이 안 되는 인간'이라고 평했습니다.
이정현 신임 당 대표가 앞으로 아무리 많은 말을 쏟아내더라도, 저는 앞으로 그의 행보를 가장 잘 예측할 수 있는 말로 저 언사를 기억할 것입니다.
진정성과 의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국익이라든지, 국민의 안위, 선거의 승패 같은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비아냥과 모욕, 굴종과 손가락질은 얼마든지 감내할 수 있습니다. 본인의 말대로 '쓰레기통에서 건져서 홍보수석을 시켜준' 대통령을 위해 그 정도쯤이야 못 견디겠습니까? 그 속마음은 이렇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여당 대표라는 감투나 권력을 누리기 위해서 당 대표가 된 줄 아십니까? 아닙니다. 오로지 우리 대통령님을 위해서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내 한 몸 망가지더라도 무엇을 해야 조금이라도 마음을 편하게 해 드릴 수 있을까? 그것만 생각합니다. 내가 순천에서 왜 그렇게 선거운동 열심히 한 줄 압니까? 내가 살아 돌아가야 우리 대통령님을 진심으로 모실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더 있기 때문입니다. 총선 과정에서 당 대표가 말을 듣지 않아서 분노로 밤 잠 못 이루시는 대통령님을 보면서 저는 결심했습니다. 살아서 돌아가자. 그래서 대표를 하자. 그래서 마음을 편하게 해드려야 되겠다. 저들이 누구 때문에 여당 의원이 되고, 장관이 되고, 정치를 하는데, 이렇게 배은망덕한 것들이 있나. 내가 저것들을 싹 쓸어버려야 되겠다.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내가 딱 막고 서서 버텨야 되겠다. 제가 이렇게 당 대표를 해서 대통령님이 임기 잘 마치고 편안히 퇴임하시면, 그 때 나는 감옥에 가도 좋고, 길바닥에서 돌을 맞아도 좋습니다.'
차지철, 장세동, 그리고 이정현
진정성과 의리를 찾다보면 정치가 설 자리가 없습니다. 진정성과 의리는 정치의 기술도 아닙니다. 그런 건 깡패들의 윤리지요.
정치의 기술과 깡패들의 윤리가 다른 점은 외부세계의 존재 유무입니다. 깡패의 윤리는 깡패 조직 안에서만 유효하면 됩니다. '형님'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는 누구든 조지고 부시고 해도 됩니다. 아니, 그런 무자비함을 보여야 진정성과 의리를 인정받습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홍보수석의 역할을 다 하기 위해 KBS에 전화를 걸어 협박을 일삼은 이정현 의원의 행동은 정말로 진정성과 의리를 보여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정현 의원이 그 전화를 한 사건은 다름 아닌 '세월호' 참사였습니다. 이런 어마어마한 사건을 접하면, 일단 누구라도 마음이 숙연해지고 경거망동을 삼가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이정현 의원은 어떤 사람들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죽었답니다'라는 말을 들으면, '얼마나요?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어요?'보다는 '그래서, 우리 형님이 이 일하고 뭔 상관이 있다는 거야!'를 먼저 외치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존재합니다. '형님'의 심기가 다른 사람들의 안위보다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정치에서 그런 사람들이 있기는 했습니다. 박정희의 차지철과, 전두환의 장세동이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박근혜의 이정현을 기억하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앞으로 1년 반, 우리는 '쓰레기통에서 나를 건지신' 대통령님을 위해 의리를 다 하는 여당 대표를 보게 될 것입니다. 이명박을 위해 원세훈이 했던 일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닐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정치 부재의 공간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정치가 부재한 곳에서는 각자도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말을 들어줄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들 정신 바짝 차려야 합니다.
서로 다른 생각, 서로 다른 사람들이 공존하는 것, 그것이 정치의 본령입니다. '정치'가 존재하는 공존의 공화국, 대화와 타협을 통한 민주주의, 지금 우리가 빼앗긴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아, 참 날이 덥습니다.
P.S. 이정현 의원은 과거 대통령에 대해 부정적인 기사를 실은 언론사와의 통화에서 '너희는 내가 반드시 없앤다'고 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프레시안>이 조금 걱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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