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 저도 아닌 문재인의 정치
문재인 대표의 어정쩡한 정치가 모든 화를 불렀습니다.
지난 2월 8일 새정치민주연합 전당대회에서 문재인 대표는 45.3%의 득표를 했습니다. 박지원 후보는 41.8%였습니다. 이 때 문재인 대표는 확실한 스탠스를 정해야 했습니다. 박지원 의원을 사실상의 공동대표로 인정하고 당무를 '협치'로 할 것인지, 아니면 박지원 의원을 배제하고 당을 휘어잡을 것인지를 말입니다.
문 대표는 어정쩡했습니다. 두 번 세 번 만남을 통해 박지원 의원을 배려하는 척 하면서도, 실질적으로 박 의원에게 어떠한 권한도 주지 않았습니다. 인사에서는 박지원의 사람을 쓰는 척했지만, 박 의원은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고 선을 그었습니다. 이런 관계가 몇 개월을 이어 갔습니다.
4.30 재보선이 패배로 끝났습니다. 문 대표는 책임을 지는 것도 아니고 안 지는 것도 아닌 모습을 보였습니다. 패배가 대표의 책임인지 당의 체질적인 문제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패배가 대표의 책임이라면 그 때 재신임을 물었어야 했습니다. 재신임을 받은 후에는 심기일전해서 다음 목표를 세운 후 그 다음 결과에 책임지겠다고 했어야 합니다. 재신임의 방법은 당원 투표와 같은 한심한 방법이 아니라, 대선 불출마 선언 같은 과감한 제안으로 했어야 합니다.
재보선 패배가 당의 체질적인 문제라면, 본인이 문제점을 낱낱이 지적하고 당의 환부를 도려내는 계기로 삼았어야 합니다. 공천과정에 문제가 있었다면 그것을, 공천 이후에 당의 화합에 문제가 있었다면 그것을, 당의 선거전략에 문제가 있었다면 바로 그것을 통렬히 지적하고 새로운 개혁의 비전을 제시했어야 합니다.
이도 저도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은 재보선 패배가 누구의 책임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문 대표는 책임을 진 것도 아니고, 스스로 개혁의 칼을 빼어든 것도 아니었습니다. 권한과 위상이 모호한 위원회를 만들더니 거기에 목검 한 자루를 빌려주었습니다. 붕붕거리는 소리는 크지만 아무 것도 벨 수 없는 칼을 주고, '육참골단'이라는 말로 형언했습니다. 그 결과가 지금 나타나고 있습니다.
문재인 대표가 계속 이렇게 정치한다면, 문 대표는 대통령을 할 만한 사람이 못 됩니다. 정책적 판단은 복잡하고 모호한 면이 있습니다. 정치적 판단은 그래서는 안 됩니다. 논리가 명쾌하고 과감해야 합니다. 그래야 리더십이 생깁니다. 지금까지의 문 대표는 대통령 비서실장에 어울리는 사람이지 대통령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정치개혁에서는 새누리당의 2중대였습니다
선거법 개정, 정치개혁 과제들은 결국 모든 것이 새누리당이 원하는 대로 되어가고 있습니다. 새누리당의 의원 정수 확대 불가, 비례대표 확대 불가 주장에 새정치민주연합은 변변한 저항도 한 번 못해보고 따랐습니다.
섣부른 의원 정수 확대 주장이 이 모든 화를 불렀습니다. 전혀 준비되지 않은, 어설프기 짝이 없는 아마추어리즘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례였습니다.
발언의 배경이 없지는 않습니다. 대다수의 정치학자들이 국회의원 정수 확대에 찬성한다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지난 7월 참여연대 의정감시센터는 한국에서 선거와 정당을 전공한 학자들 중 70%가 의원 정수 확대에 찬성한다는 조사결과를 공개했습니다. 문재인 대표의 의원정수 확대 발언은 이런 배경에서 나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국민들이 이러한 내용을 알고 있었을까요? 의원 정수 확대 주장은 당운을 걸고 싸울만한 중요한 정치개혁임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당내에서도 이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이유를 불문하고 국민 대다수가 반대하는 사안입니다.
그래서 이 싸움에서 승리하려면 대단히 치밀한 준비가 필요했습니다. 먼저 당 내부에서 이 목표에 대해 강고한 합의가 있어야 하고, 학계와 시민사회의 전면적인 협조가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박근혜 대통령의 지지율이 떨어지는 시점을 기다렸다가, 행정부를 견제하고 견인할 수 있는 강한 국회의 필요성을 주장했어야 합니다.
문 대표의 일성에 발맞추어 새정치민주연합 국회의원들의 국회의원 특권 포기, 세비 동결 등의 입장 표명이 있어야 하고, 학계와 시민단체에서 일제히 환영 메시지가 나오고, 언론에서는 다른 나라와의 비교를 통해 의원 정수 확대의 득실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소개되고, TV와 라디오에서는 이에 대한 논쟁이 연일 벌어져야 합니다.
그렇게 두세 달을 치열하게 논쟁해서 국민들이 국회의원 수가 늘어나면 어떤 일이 실제로 벌어질지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한 다음에도, 이 개혁안의 성공 여부는 확실히 알 수 없습니다. 이 정도는 정치에 대해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짐작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문재인 대표의 발언은 어땠습니까? 2012년 대선가도에서 안철수 의원의 국회의원 축소 발언에 비해 조금도 낫다고 할 수 없는 수준이었습니다. 새정치민주연합은 앞으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항변이 있을 수 있습니다. '당 안팎에서 저렇게 흔들어대는데 문재인 대표가 그렇게 할 수 있는 여력이 없지 않았느냐. 그렇다고 틀린 말을 한 것은 아니니 뭐라 할 것까지는 또 없지 않느냐.' 아닙니다. 그렇게 할 자신이 없다면 문 대표는 의원 정수 확대에 대해 단 한마디도 하지 말았어야 합니다. '물지 못할거면 짖지도 말라'라는 말은 이런 때 쓰는 말입니다.
결과적으로 선거법 개정 논의에서 새정치민주연합은 새누리당의 2중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의원 정수 확대 불가, 비례대표 확대 불가에 이어, 혁신위의 100% 국민 경선안은 '공천권을 국민에게'라는 새누리당의 말을 충실히 따른 것입니다.
어떤 시뮬레이션을 해 봤는지 모르겠습니다. 새누리당이 제안하는 오픈 프라이머리는 안 된다면서 100% 국민경선은 좋다는 것은 또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습니다. 공정성을 기하기 위한 안심번호 운운은 기술적으로 그럴 듯해 보이는 공학적 기만에 불과합니다.
핵심은 공천권을 당지도부가 가질 것인가, 당원에게 줄 것인가, 국민에게 줄 것인가 에 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당원과 국민에게 의해 선출된 당 지도부가 공천권을 행사하는 것이 충분히 민주적이고 정당하고 생각합니다. 당 대표가 차점자나 최고위원을 어떻게 배려할지는 역시 그가 결정하고 감당할 몫입니다. 공천을 아예 감당치 못하겠다면 당 대표를 그만 두어야 합니다.
공천권을 당원에게 돌려줄 것이라면 총선을 앞두고 대표 체제를 아예 없애고, 선거대책위원장 체제로 가면 됩니다. 선대위원장 체제에서 당원 경선을 통해 후보를 뽑고, 후보 중심으로 선거를 치르면 됩니다.
국민에게 돌려줄 것이라면, 당을 없애고 선거 때만 이합집산 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입니다. 미국의 오픈프라이머리가 국민에게 공천권을 주는 것이라는 말은 거짓입니다. 미국에서 오픈프라이머리에 참여하는 사람은 투표를 하는 순간에 당원으로 이해됩니다. 미국의 오픈프라이머리는 그날 투표하러 오는 '당원'에게 투표권을 주는 제도입니다. 오히려 당원이 되는 기회를 국민에게 크게 열어놓는 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투표를 하겠지만 당원이 되고 싶지는 않은 국민들을 상대로 공천권을 주겠다는 말은 '우리는 정당 아니다'라는 말에 다름없습니다. 당의 정강이나 정책, 정체성과 하등 상관없는 국민들이 당의 후보를 공천한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말인지 저는 이해 할 수 없습니다.
호남을 버려야 합니다
9일 최고위와 당무위에서 혁신위의 개혁안이 가까스로 통과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음주 16일 중앙위원회에서 최종적인 수용 여부가 결정됩니다. 이 개혁안이 통과되느냐 마느냐에 문재인 대표와 새정치민주연합의 미래가 달려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개혁안의 중앙위 통과와 별도로 문 대표는 재신임 투표를 받겠다고도 공언했습니다. 이제 혁신안이 통과되고 재신임만 받으면 이 당의 모든 문제는 해결될 것처럼 보입니다. 누구보다 문재인 대표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틀렸습니다.
진짜 문제는 통과 여부가 아니라 호남입니다. 혁신안이 중앙위에서 통과되든 말든, 문대표가 재신임을 받는 말든, 호남은 불복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무위에서 혁신안이 통과된 바로 다음날인 10일, 전라남도와 전라북도 도당 위원장이 공동명의로 문재인 대표의 사임을 요구했습니다. 박지원 의원은 재신임 투표가 아니라 문재인 대표가 사퇴한 다음 전당대회를 다시 열어서 재신임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당무위에서 중앙위까지 일주일입니다. 이제 겨우 이틀이 지났습니다. 주말을 거치면서 더 거세고 날카로운, 차마 할 수 없는 수준의 인신공격과 비방이 문 대표 측과 반대 세력 간에 이어질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혁신안이 중앙위에서 통과되고, 재신임을 받은 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문 대표는 결단해야 합니다. 호남의 요구를 수용하든지, 아니면 의원들에게 혁신안에 따를 것을 요구해야 할 것입니다. 전자라면, 혁신안을 수정하든지 폐기해야 합니다. 식물 당대표를 계속하든지 사퇴하든지는 그 다음의 일입니다.
만약 후자의 결단을 내린다면, 대표의 명령이 아니라 당의 최고위, 당무위, 중앙위를 통과한 혁신안의 권위, 전당대회에서 뽑히고 재신임을 받은 당대표의 권위에 따를 것인지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에 불복하는 의원이나 세력과는 총선에서 정정당당하게 겨뤄서 국민의 심판을 통해 책임을 지겠다고 선언해야 합니다. 그런 선언을 하지 않으려면, 또 다시 어정쩡한 태도나 취할 것이라면, 재신임 투표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사실 호남 물갈이론은 호남에서 새정련이 기득권을 계속해서 유지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호남에서 기득권이나 얄팍한 의석 수 몇 개가 아니라, 당의 혁신을 위한 새로운 힘, 그리고 정통 야당으로서의 정체성을 얻기를 원한다면 호남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호남에서 의석을 포기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호남의 정치가 구태라면 의석을 잃을지언정 당의 정체성을 잃을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호남을 위한 정치입니다. 무엇보다 호남의 유권자들을 무시하지 마십시오.
박지원 의원은 "혁신을 말하려거든 새정련 의석 130석 전체를 두고 말해야지 28석에 불과한 호남만 이야기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호남은 28석에 불과합니다. 절반을 잃어도 좋다는 각오로, 혁신안에 따르지 않겠다는 현역의원들을 내보내도 좋습니다.
호남을 두려워해서는 새정치민주연합의 당 대표가 될 수 없습니다. 호남을 버릴 자신이 없다면 호남과 대립하면서 당 대표를 할 수 없습니다. 혁신이 옳다는 확신이 있고, 그에 저항하는 의원이 있다면 같이 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지는 것이라면 지는 것입니다. 혁신안에 자신이 있다면 그에 따라 새로운 사람들을 뽑아서 싸움을 붙이십시오. 거기서 누가 이긴들 한국정치의 대세에 아무런 지장 없습니다. 오히려 호남 정치가 견제와 경쟁을 통해서 좋아지는 일만 남았습니다. 호남에서 항구적인 2당 체제, 3당 체제가 들어선다면 더 좋은 일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꼭 기억하십시오. 제1야당의 대표가 물러나느냐, 당이 분열하느냐에 대해 다수의 국민은 별 관심이 없다는 것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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