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레그넘 혹은 비동시성의 동시성
"위기는 정확히 말하면, 낡은 것이 소멸해가고 있는데 새로운 것이 태어날 수 없다는 사실에 놓여 있다. 이러한 인터레그넘에서는 극히 다양한 병리적 증상들이 출현하게 된다." (안토니오 그람시)
인터레그넘(interregnum)은 로마법에서 최고 권력의 공백상태 또는 헌정의 중단을 가리키는 말로, 통치하던 왕이 죽었으나 아직 새로운 왕이 즉위하기 전의 상태를 말합니다. 영국 사회학자인 지그문트 바우만은 이를 불러내, 하나의 시대(regnum)와 다른 시대 사이의 시대라는 뜻으로 활용합니다.
바우만은 이 용어를 통해 영토, 국민, 주권을 가진 국민국가들이 세계시장과 초국적 자본의 영향력에 무너지고 있는 세계화 현상을 설명합니다. 국민국가의 시대, 인민주권의 시대가 종말을 고하고 있는데, 이를 대체할 세계체제는 아직 수립되지 않은 상태인 것입니다.
하지만 2015년 한국을 돌아볼 때는, 권력의 공백이라는 로마법의 원래 뜻, 그리고 그람시가 말한 낡은 것의 소멸과 새로운 것의 탄생 사이의 병리적 증상들이 출현하는 상황이라는 설명이 더욱 적절해 보입니다.
지금 우리는 대통령제라는 왕정을 닮은 체제에서, 왕들이 죽은 이후 아직 새로운 왕을 발견하지 못해 안달이 난 시대를 살고 있는 듯 보이기 때문입니다. 민주화 이후 30년 동안, 낡은 정치를 대체할 새로운 정치를 수립하지 못한 상황에서 합리적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병리적 현상들이 도처에서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2015년의 한국을 설명할 수 있는 또 다른 개념으로 '비동시성의 동시성'도 들 수 있습니다. 독일의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는 '모든 사람이 동일한 시간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뜻으로 이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블로흐는 1930년대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을 연구하면서, 19세기의 권위주의적 전근대의 유산과 20세기의 근대적 이념인 민주주의와 헌정 체제가 동시에 존재하다가 결국 히틀러의 나치즘으로 귀결된 비극적 상황을 이 개념을 통해 설명해냈습니다.
국내에서는 강정인, 임혁백 교수가 이 용어를 통해 한국의 20세기를 설명한 바 있습니다만, 그 설명은 오히려 21세기에 더욱 적절해 보입니다. 올해 우리 대통령과 여당 정치인들은 1970년대를, 야당의 정치인들은 1980년대를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우리 국민들이 모두 같은 시대에 살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압축적 근대화를 경험한 우리 국민들의 삶은 지극히 다양합니다. 어떤 분들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으로 시작한 삶을 살았는가 하면, 지금의 중고생들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에 태어났으니 말입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우리는 한 시대를 살고 있는 것 같지만 모두 각자의 시대를 살고 있는 것입니다.
시대와 시대의 사이를 가리키는 '인터레그넘', 시대와 시대의 중첩을 의미하는 '비동시성의 동시성'이야말로 2015년의 한국사회를 그나마 이해할 수 있는 키워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민주화 이후 30년의 역사 자체가 인터레그눔, 비동시성의 동시성이라는 2015년의 현실을 가장 잘 설명하는 압축적 과거입니다. 민주화 이후 첫 번째 정부는 군부정권의 연속이었고, 두 번째 정부는 그 세력과의 연합으로 탄생했습니다. 세 번째 정부 역시 과거 쿠데타 세력과 손을 잡고서야 집권할 수 있었고, 이로써 왕들의 시대는 끝났습니다.
왕들의 시대 이후 고졸 출신의 대통령은 권위주의를 허물었지만 스스로의 권위를 만들지는 못했고, 뒤 이은 대선에서는 정치가 아니라 경제라는 화두가 처음으로 대선을 지배했지만 결과는 성공적이지 않았습니다. 이 때까지 현재를 살고 있던 사람들이 대선을 좌우했다면, 지난 대선은 과거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 주도권을 발휘했습니다.
왕 같지 않은 왕에 실망한 과거의 사람들이 왕을 부활시킨 것입니다. 이들은 왕이 죽은 지 30년 만에 그 딸을 다시 권좌에 앉혔습니다. 1970년대의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중용되고, 중용되고 싶은 사람들은 그 시대로 자기 시간을 맞췄습니다.
'그라운드 제로'를 준비할 때
인터레그넘의 시대에 중요한 것은 새로운 비전을 가진 정치 질서의 창출일 것입니다. 비동시성의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대립과 갈등이 아니라 화해와 조화를 이루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역할을 할 정치 세력은 아직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내년 총선에 대한 걱정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과거를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진실한 사람'이라고 대통령이 선언했기 때문에, 여당에서는 '친박'을 넘어서 '진박' 경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야당은 분열하고 있습니다. 분열은 때로 새로운 변화의 시작일 수 있기 때문에 그 자체로 나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문제는 분열의 내용입니다.
올 한해 소위 주류와 비주류는 1년 내내 싸웠습니다. 만약 그 싸움의 내용이 박근혜 정부의 실정에 대한 고민과 정책적 대안의 모색을 둘러싼 것이었다면 이 싸움을 나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야당의 입장을 정하기 위해 그러한 논쟁이 치열하게 벌어져서 매일 신문의 머리기사를 장식했다면 사실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러나 이 두 세력이 1년 내내 싸운 것은 '공천권'이었습니다. 안철수가 나가니 문재인이 진보 성향을 강화한다는 평가가 있습니다만, 이것은 다소 뜬금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입장 차이를 두고 제대로 된 논쟁이 벌어진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박준영, 박주선 같은 사람들이 주도하는 신당은 아무런 내용 없이 권력만을 목표로 하는 것이니 언급할 가치가 없습니다. 천정배 의원이 주도하는 신당은 처음에는 진보적 가치를 내세웠습니다만, 뉴DJ와 '국민회의'를 표방하면서 사실상 새로운 가치를 담아내는 데에는 실패했습니다. 그리고 제대 병사의 천만 원 퇴직금을 주장한 엊그제의 포퓰리즘적 공약은 그것을 확신시켜주었습니다.
가치와 정책이 사라진 이러한 분열에서는 그것이 계속되든 아니면 얼기설기 연대나 통합으로 해결되든 별로 기대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분열이 권력만을 탐한 것이라면, 연대와 통합도 권력만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섣불리 예단해보자면, 호남에서는 서로 각축을 벌일 것이고, 수도권에서는 출마한 후보들의 개인적 판단에 따른 후보단일화 가능성을 열어놓은 채로 총선에 임하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문제는 그런 통합, 그렇게 해서 얻은 결과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 하는 것이지요.
'그라운드 제로(ground zero)'를 준비해야 합니다. 이 용어는 핵무기가 떨어진 피폭지점을 일컫는 것으로, '대재앙의 현장'이면서 동시에 '급격한 변화의 출발점'이나 '새로운 변화의 근본적인 중심'을 의미합니다.
현재의 상황으로 보아서는 2016년 총선은 그 결과에 관계없이 이미 그라운드 제로 상황에 돌입한 것으로 보입니다. 한편으로는 대재앙이 될 수도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대변화의 전환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박정희 신성화를 비판하려면 김대중, 노무현 신성화 넘어서야
2016년 총선은 한국정치에서 지난 30년 동안 끌어왔던 인터레그눔의 시대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전환점에서 태어나야할 새로운 정치세력의 조건은 무엇일까요? 우선 과거의 지도자들과 결별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현재의 야당은 김대중과 노무현의 철학을 이어받은 당이라고 자부합니다. 두 전직 대통령의 이름이 거론되면 물불 가리지 않고 싸웁니다. 당 밖이든 당 안이든 가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박정희의 신성화와 얼마나 다른가요?
두 전직 대통령이 아무리 잘 했다 한들, 어떻게 모든 일을 잘 했겠습니까? 김대중의 경제정책 중에서 비판받을 것이 적지 않습니다. 노무현이 한 강정해군기지와 한미FTA는 문제가 없고, 이명박이 한 것은 나쁘다는 식으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 후예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합리적 비판조차 절대 용납하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자신들이 가진 정치적 자산의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요즘 새로운 정치를 하겠다는 사람이 김대중, 노무현을 입에 자주 올리면 의심하라고 합니다. 자기 콘텐츠가 없다는 뜻이고, 말로만 새로운 정치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박지원 의원은 스스로 김대중 정부의 정통을 자부합니다. 그래서 김대중을 한 마디도 비판할 수 없습니다. 태생적 한계입니다. 그는 야당에서 보기 드물게 능수능란하고 노련한 정치인입니다. 그런데 그가 잘하는 것은 과거의 정치에서 잘하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는 그가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앞으로 그가 정치를 잘 할 수 없는 시스템을 원한다면, 아쉽지만 그와 함께 갈 수 없습니다. 김대중을 비판할 수 있는 당이 필요하다면 그는 함께 하지 않을 것입니다.
소위 친노 세력이 야권 세력 내에서 진정한 신뢰를 얻고 싶다면 노무현 정부에 대해 먼저 말해야 합니다. 예를들어, 김만복 전 국정원장은 임기 중에는 물론이고 지금까지도 자질이 의심스러운 사람입니다. 국가 정보기관의 수장을 저런 사람이 맡았다는 것만으로도 국정의 실패를 능히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누구하나 이 문제를 해명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또한 2007년 대선의 패배는 정동영과 민주당의 실패라기보다는 노무현의 실패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참여정부는 사실상 고의적으로 정권재창출에 실패했는데, 지금도 그 선택이 옳았다고 생각하는지에 대해서 누구 하나 말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김대중과 노무현을 추모하고 기념하는 것을 넘어서 냉정하기 평가하기를 주저한다면, 아버지를 비판하는 사람을 싫어하는 현 대통령과 정치 행태에서 다를 것이 없습니다. 민주화 이후 스스로의 정치 행태를 성찰하지 못하는 86정치인들까지, 그들은 모두 인터레그눔의 이전 시대, 비동시성의 과거 시대에 살고 있을 뿐입니다.
팬덤정치를 넘어 가치의 정치로
지금 우리시대의 정치 현상에서 가장 적극적인 시민참여 형태는 아이러니하게도 팬덤정치입니다. 사실 이것처럼 인터레그눔 시대의 병리적 현상을 잘 보여주는 것이 없습니다. 이승만, 박정희,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박근혜 등 대부분의 대통령이 사실 팬덤 현상과 유사한 지지를 받았습니다. 그것은 SNS 시대에 와서도 크게 변하지 않았습니다.
팬덤정치를 넘어, 인터레그눔의 다음 시대에 걸 맞는 정치의 비전을 세워나가야 합니다. 선거를 위해서 대립과 갈등을 이용할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시대의 사람들을 화해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자면 권력에 대해 이해해야 하고, 동시에 정치에 대한 희망을 적극적으로 말해야 합니다.
그 정치는 내용과 가치를 담아야 합니다. 이길 수 있는 프레임을 던지는 방식이 아니라 실제로 사회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답을 내놓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아래로부터는 세상사는 사람들의 어려움을 민감하게 느끼면서 위로는 아젠다 세팅 능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되어서야 날갯짓을 한다고 합니다. 2016년 총선 이후 그라운드 제로에서 새로운 정치적 변화를 준비하는 부엉이들이 여야의 정치권, 시민사회와 학계를 넘어서 함께 고민하는 장을 만들 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인터레그넘에 대한 설명은 진태원의 "몫 없는 이들의 몫-을의 민주주의를 위하여", <황해문화> 89호(2015년 겨울호)를 참조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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