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승수 위원장 종로출마 선언
"참을 수 없는 '정치의 부재', 녹색당의 이름으로 기득권의 장벽을 뚫고 나가겠습니다."
녹색당 하승수 공동운영위원장이 내년 총선에서 종로 출마를 선언했습니다. 지역주의에 안주한 기득권 정당들이 한국정치를 양분하고 있는 현실에서 진보적인 소수정당, 그것도 미래의 가치인 생명과 환경, 비폭력과 평화를 내세운 정당은 그 존재만으로 박수를 받을만합니다.
녹색당이 총선에 본격적으로 뛰어 들었습니다. 하승수 위원장의 종로 출마와 함께 비례대표 후보자 선거도 시작되었습니다. 녹색당이 정당으로서의 정치를 제대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럴 때 응당 녹색당의 행보에 박수를 보내고 격려를 아끼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아쉬운 마음이 드는 부분도 있습니다. 오늘은 녹색당의 '정치'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영국 녹색당의 당선자 루카스는 정치경력 24년의 베테랑
"영국과 캐나다에서는 최근에야 지역구에서 1등을 해서 최초의 녹색당 국회의원을 배출했다. 이것은 기적과 같은 일이다."
2013년 5월, <프레시안>에 실린 하승수 위원장의 인터뷰입니다. 그렇습니다. 영국 브라이튼에서 녹색당이 의원을 배출한 것은 물론 어느 정도 기적 같은 일이었습니다.
영국 브라이튼의 캐롤라인 루카스 하원의원이 환경 관련 시민운동을 하다가 갑자기 녹색당 후보로 출마해서 당선되었다면, 그것은 정말 기적 같은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일어난 일은 그런 종류의 기적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기적이라기보다는 지난한 노력의 결실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과감한 결단과 냉철한 정치적 판단의 결과이기도 했습니다. 유권자들 입장에서는 대단히 합리적인 선택이기도 했습니다. 브라이튼 시민들은 어쨌든 정치경력 24년차의 베테랑을 뽑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국 녹색당의 첫 하원의원이 된 캐롤린 루카스(Caroline Lucas) 의원은 1960년생입니다. 1986년 26살에 입당해서 얼마 지나지 않아 언론담당관을 지내고 총선에서는 대변인을 맡았습니다. 34살에 출마해서 1993년에서 1997년까지 옥스포드의 시의원이었습니다. 이것은 녹색당의 두 번째 지방의회 의석이기도 했습니다.
1999년에서 2010년까지는 영국 동남부 광역선거구에서 11년간 유럽의회 의원을 지냈습니다. 그리고 2010년 브라이튼에서 하원에 당선되었습니다. 당선될 당시 루카스는 정치를 시작한지 24년, '의원' 경력만 15년에 이르는 정치인이었습니다.
케이스 타일러 2.6%를 22%로 바꿔놓다
루카스 의원이 브라이튼 지역구의 녹색당 후보가 되는 과정도 역시 간단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무슨 '추대' 형식이기는커녕 한국정치로 보면 욕 먹기 딱 좋은 과정을 거쳤습니다. 남이 갈아 놓은 밭을 빼앗은 형국이었기 때문입니다.
원래 브라이튼에는 케이스 타일러라는 오랫동안 지역구를 관리해 녹색당 지역위원장이 있었습니다. 타일러는 1999년에 녹색당 후보로 시의원에 당선되었고, 2001년과 2005년에는 총선 후보로도 출마했습니다.
다른 후보가 나섰던 1997년 총선에서 브라이튼의 녹색당은 2.6%의 누가 봐도 소수정당에 어울리는 득표율을 기록했다. 2001년 선거에서 시의원인 타일러가 출마했지만 득표율은 9.3%에 그쳤습니다. 그런데 4년 뒤 2005년 총선에서는 무려 22%라는 경이적인 득표율을 올렸습니다.
지역위원장 타일러가 2.6%의 지지율을 불과 8년 만에 열 배인 22%의 득표율로 바꿔 놓은 것입니다. 2010년 총선에서 브라이튼이 녹색당의 전략적 선거구가 된 것은, 그 곳이 전통적으로 녹색당에게 유리한 지역구였기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타일러의 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타일러는 4년 전 선거에 비해서 무려 12.6%의 상승률을 기록했고, 차점자인 보수당 후보와는 불과 2%차이였다. 이런 추세라면 그리고 다음 총선에서는 해 볼만하다는 기대가 한껏 부풀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당내 유력 인사인 루카스가 브라이튼에 도전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타일러가 일궈놓은 밭을 가로챈 루카스
당시 루카스는 유럽의회에서의 두드러진 활동으로 영국 내에서 상당한 지명도를 갖고 있었습니다. 녹색당에 대한 지지율이 20%가 넘는 지역이라면 루카스 개인의 인기를 더해서 당선권에 들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녹색당이 22%의 득표를 기록한 브라이튼을 출마지역으로 선택한 것입니다.
그래도 물론 쉽지 않은 결정입니다. 다른 당도 아니고 녹색당에서, 처음으로 누군가가 고생해서 만들어 놓은 좋은 지역구를 당내 유명인사가 당선을 노리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루카스 의원 스스로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든 결정"이라고 했을 정도입니다.
당내에서는 당선가능성이 높은 루카스의 결정을 지지하는 측과, 그래도 이건 아니지 하는 대립이 최고조에 달했습니다. 이 때 녹색당의 갈등은 거의 분당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그러자 루카스는 당의 분열을 막기 위해 후보경선에서 10% 이상 이기지 못한다면 후보 지명을 포기하겠다고 공언했습니다.
경선의 결과는 55%대 45%였습니다. 어쨌거나 다른 후보가 시의원 시절부터 각고의 노력을 해서 녹색당 지명도를 올려놓은 지역구를, 지명도가 높은 루카스 의원이 경선을 통해 뚫고 들어가 차지한 셈입니다.
지난 2010년 총선에서 루카스는 31.3%의 득표율로 당선되었습니다. 노동당, 보수당, 자유민주당이 각각 28.9%, 23.7%, 13.8%를 득표했고, 2위와의 차이는 불과 1,250표였습니다. 사실 루카스 의원이 당선되지 못했다면, 녹색당 안에서 무슨 사단이 벌어졌대도 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것은 기적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이 브라이튼에서의 녹색당 하원의원의 당선을 기적이라고 부를 수 없는 이유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그것은 불굴의 노력과 과감한 정치적 결단, 그리고 냉정한 전략적 판단의 결과였습니다.
브라이튼이라는 불모지의 밭을 갈아 놓았던 타일러의 노력, 그 지역의 출마를 선언한 루카스의 과감한 정치적 결단, 그리고 루카스를 선택한 녹색당원들의 비정할 정도의 전략적 판단의 결과 말입니다.
올해 있었던 총선에서 루카스는 재선되었습니다. 득표율은 41.8%, 지난 총선보다 10% 이상 올랐습니다. 2위와의 격차는 8000표로 벌어졌습니다. 앞으로 특별한 일이 없다면 브라이튼에서는 녹색당의 장기 집권 시대가 열릴 것 같습니다.
만약 이것이 기적이라면, 이 기적이 한국에서도 빨리 일어나기를 희망해 봅니다. 그러나 그것을 기적이라고 부르며 부러워만하고 있다고 해서, 이 기적이 일어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승수 위원장의 종로 출마, 루카스는 찬성했을까요?
하승수 위원장이 종로로 출마를 선언했습니다. 종로 출마의 이유는 "녹색당 당사와 청와대가 다윗과 골리앗처럼 서 있는 곳"이고, "새정치민주연합 정세균 현 의원과 새누리당의 오세훈 전 서울시장, 박진 전 의원 등의 치열한 경합이 예상되는 이른바 정치1번지"이며, "서울 한복판"이기 때문입니다.
루카스라면 이 결정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찬성했을까요? 루카스가 첫 번째 시의원 선거를 옥스포드로 정해 당선될 수 있었던 것은, 녹색의 가치를 가장 잘 이해할만한 유권자들이 그 도시에 많았기 때문입니다.
루카스가 브라이튼에서 당선될 수 있었던 이유 역시 그 지역구가 남달랐기 때문입니다. 우선 대부분의 지역구가 보수당과 노동당 중 어느 한 쪽으로 기울어 있는 영국에서 대단히 예외적으로 자유민주당까지 3파전이 벌어지던 지역구였습니다. 30% 정도의 득표만으로 당선권에 들 수 있는 몇 안 되는 지역이었지요.
브라이튼은 또한 영국에서 노인들이 은퇴 후 가장 살고 싶은 도시로 손꼽힙니다. 우리로 따지면 경남 남해 정도에 위치한 브라이튼은 영국에서 가장 기후가 온화하고 해변을 끼고 있는 아름다운 도시입니다. 어느 정도 여유가 있는 연금생활자들이 많이 이주를 해 옵니다. 그래서 횡단보도 신호가 가장 긴 도시라는 별명이 붙어있을 정도입니다.
그러니 다른 도시들처럼 성장주의 이데올로기가 그다지 환영받지 못합니다. 조용히 여생을 보내고 싶은 사람들, 아름다운 자연과 더불어 삶을 되돌아보려는 사람들이 삽니다. 녹색당이 환영받을 수 있는 조건입니다.
양지바른 곳만 찾아다니며 정치를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노동자 후보가 노동자가 많은 도시에서 출마하는 것을 비난할 수 없는 것처럼, 녹색당이 후보가 녹색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은 도시에서 출마하는 것을 비난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단 한 석이 필요합니다
하승수 위원장이 이번 선거에서 당선되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시의원으로, 또 국회의원으로 계속해서 종로에 출마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정치란 그런 것입니다. 소선거구제 단순다수대표제 하에서 정치를 그렇게 해야 합니다.
2013년 인터뷰에서 하승수 위원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선 가능성과 지역개발 욕구를 반영하는 선거제도에서는 거대 기득권 정당들이 힘이 세기 때문에 소수정당이 지역구에서 의석을 차지하기란 매우 어렵고 또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랜 시간을 들여서 정치를 하는 것입니다. 녹색당뿐만 아니라 모든 당과 후보가 사실은 그렇습니다. 우리의 민주화도 그렇지 않았습니까?
하승수 위원장은 이렇게도 말했습니다. "결국 선거제도가 크게 바뀌지 않고서는 기득권 정치구조가 깨지기 어렵다. 다양한 정당들이 가치와 정책으로 경쟁하는 정치가 되기 어렵다. 그래서 독일식이든 스웨덴식이든 비례대표제의 전면 확대가 필요하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기존의 정당들이 우리의 선거제도를 독일식이나 스웨덴식으로 스스로 바꿔줄리 만무합니다. 그런데 유권자들도 그런 선거제도를 잘 모릅니다. 그렇게 해서 누가 당선될지 모르기 때문이지요. 원래 선거제도 개편은 혁명 수준의 요구가 없이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국민들에게 선거제도 개편의 필요성을 인식시킬 한 석, 단 한 석이 필요합니다. 녹색당이 의원이 되면 이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바로 단 한 석 말입니다. 그래서 불굴의 의지와 노력에 더해 냉정하고 전략적인 정치적 판단이 필요합니다.
이제 시작입니다. 정치에 본격적으로 첫발을 디딘 녹색당의 장도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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