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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치가 없으면 정치도 없다

[프레시안 뷰] 개와 돼지의 나라

예의염치(禮義廉恥)

십여 년 전, 중국 후난성(湖南省)의 성도(省都) 창사(長沙)에 있는 악록서원(嶽麓書院)에 우연히 들를 기회가 있었습니다. 악록서원은 976년에 세워진 중국의 4대 서원 중 하나로, 주희, 왕양명 등 중국 유학의 전설적인 인물들이 강의했고, 근대에 들어서도 양계초와 마오쩌둥이 수학한 곳입니다.

지금 악록서원은 중국의 명문 대학교 중 하나인 후난대학교 안에 있는데, 우리로 따지면 옛 성균관을 품고 있는 성균관대학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서원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은 공자의 사당인 대성전입니다. 그리고 대성전 가는 길에 주희가 썼다는 '충효염절(忠孝廉節)' 네 글자가 있습니다.

인의예지, 효제충신은 익숙하게 쓰는 4자성어지만, 과문한 탓으로 '충효염절'은 낯설었고 특히 '염' 자가 그렇게 중요한가 하는 생각이 들어 현지인에게 물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 때 돌아온 대답은 반문에 가까웠습니다.

"인의예지 다음은 염치(廉恥)라는 것을 모르십니까?"

부끄러움을 인간의 덕목, 그 중에서도 정치적 덕목의 수준으로 제시한 것은 공자입니다. 그리고 이를 염치라는 개념어로 만든 것은 순자이며, 이를 국가적인 정치윤리로 끌어올린 것은 <관자>입니다.

<관자>는 국가를 유지하는 필수적인 4요소(四維)로 '예의염치'를 꼽았습니다. 하나가 끊어지면 나라가 기울고, 두 개가 끊어지면 나라가 위태롭고, 세 개가 끊어지면 나라가 뒤집히고, 네 개가 끊어지면 나라는 멸망에 이릅니다.

염치는 청렴하고 부끄러워 할 줄을 안다는 뜻이고, 두 말을 한데 아우르면 청렴하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청렴하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을, 깨뜨릴 파(破)자를 써서 '파렴치'라고 합니다.

▲ 악록서원.ⓒ이관후


나쁜놈들 전성 시대가 필요한가

새누리당 정진석 원내대표는 "인사청문회는 성직자를 뽑는 자리가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인사청문회는 성직자가 아니라 공직자를 뽑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언제 공직자로 성직자를 원한 적이 있습니까? 당 윤리위원장 할 사람을 찾지 못해서 매번 성직자로 임명하는 당에서는 그렇게 생각이 될지 모르겠지만, 우리 국민은 성직자와 공직자를 구분 못할 수준이 아닙니다.

물론 예전에도 아주 훌륭한 사람들만 공직자가 되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한 가지 달라진 것이 있습니다. 이제는 청렴하지 않은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파렴치의 단계에 이른 것입니다.

우리 국민들은 성직자를 바라지 않습니다. 다만, 공직자의 수준은 되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공직자가 모범이 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가장 나쁜 놈의 전형은 아니어야 합니다.

공직자의 임명을 통해서 시대를 각성하게 할 수는 없을지라도, '나쁜 놈들 전성 시대'를 만들어 줄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소설가 성석제는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고 했습니다. 어처구니는 우리를 웃음 짓게 합니다.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그곳에는 파렴치들이 산다'거나 '거기서는 나쁜 놈들이 제일 잘 산다'는 정도까지 갈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철면피를 넘어 파렴치의 세계로

부끄러움이 없는 상태는 무엇일까요? '철면피'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낯이 두껍다는 뜻입니다. 즉, 부끄러운 일을 하고도 밖으로 부끄러움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철면피는 적어도 자신의 행위를 판단할 줄 알고, 그 행위의 주체를 인식하고 있습니다. 철면피의 얼굴에서 철판을 걷어내고 나면, 우리는 금세 발갛게 상기된 그의 얼굴을 보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철면피를 넘어서는 파렴치의 단계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행위에 대한 판단이 중지된 상태입니다. 즉 염치라는 가치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저는 처음에는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잘 이해가 안 되었습니다만, 경험을 통해 깨우치게 되었습니다.

마트에게 가면 종종 '주차 금지' 표시가 된 곳에 차를 세우는 부모들에게 아이들이 묻습니다.

"여기 '주차 금지'라고 되어 있는데 괜찮아?"

부모들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응, 우리는 괜찮아."

아이들은 부모의 손에 이끌려가면서도 무언가 찜찜한 듯 뒤를 돌아보곤 합니다.

이 아이들에게는 아직 염치가 남아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반복되면 점차 파렴치의 단계로 넘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흥미로운 공통점은, '주차 금지' 표시가 된 곳에 주차된 차들은 거의 다 대형차들이고 소형차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행위에 대한 판단 중지의 상태를 넘어서는 '파(破)' 염치의 수준이 있습니다. 바로 유체 이탈의 경지입니다. 행위에 대한 분간을 못하는 수준을 넘어서, 주체의 인식에 실패하는 빠지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요?

보통사람들에게는 어렵지만 스스로 독경을 외어 무아지경에 빠지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아니다. 그것은 내가 아니다."

21세기 한국 정치에서 우리는 이런 상황을 흔히 '주어가 없는 상황'이라고 지칭하기도 합니다.

염치가 없으면 정치도 없다

예와 의가 사라지면 지위와 이익만을 탐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개인적 이익만이 유일한 최고의 가치가 되면, 염치가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정치에서 '공공'의 개념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공적인 가치가 존재하지 않는 정치란 그저 사적인 권력 투쟁의 장이 될 뿐입니다. 이런 무한 투쟁의 장에서는 어떠한 제도도 작동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염치가 없으면 정치가 불가능합니다.

좋은 공직자를 선별하기 위해 국회에서는 인사청문회라는 제도를 만들었습니다. 이 제도는 한편으로는 철면피들을 위해 만든 것입니다. 적어도 공적인 장에서 그 철가면을 벗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이 제도가 작동하지 않습니다. 철가면을 벗고 맨 얼굴이 드러났는데도 아무렇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염치라는 가치가 없거나, 유체 이탈의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 앞에서는 제도가 작동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정치 자체가 작동하지 않는 것입니다.

과반을 점한 다수가 횡포를 부리는 것을 막기 위해 국회선진화법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법은 정치나 국민을 두려워하는 정치 세력에게 작동하는 것이지, 그냥 상대를 깡그리 무시하고 나가겠다고 마음먹은 편에게는 오히려 좋은 방패막이가 될 뿐입니다.

국회선진화법에 따르면 차년도 예산 안에 대해 법정 시한 내에 여야가 합의 처리를 하지 못하면, 그냥 정부 안이 통과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법을 이렇게 만들어 놓은 것은, 여당이기 이전에 국회의 일부이며 그래서 행정부에 대한 감시와 견제를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으리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법은, 여당은 정부의 거수기일 따름이며, 대통령을 돕는 것이 나라를 위하는 길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정당 앞에서는 말 그대로 망연자실해 질뿐입니다.

김영란법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법의 취지는 우리 사회에서 뇌물이나 다름없는 과도한 접대문화를 없애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말이 전도되어 이 제도를 어떻게 피해갈 것인가에만 골몰하는 생각을 여과없이 노출하는 것은 염치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인사청문회, 선진화법, 김영란법은 그 법을 지키고자 하는 의지가 있고, 과도한 욕심에 대해 부끄러움을 갖는 사람들에게 작동하는 법입니다. 실은 모든 제도가 그렇습니다.

부동산 투기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나 규제 법이 작동하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투기를 지속하겠다고 마음먹은 사람들에게 그 법이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 우리는 이미 알고 있지 않습니까?

누가 개, 돼지인가?

올해 한 고위 공무원이 국민을 개, 돼지에 비유해 논란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저 역시 한편으로, 이 나라 국민들이 정말 개, 돼지가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할 때가 적지 않습니다.

사람이 염치를 잃고 제 입에 들어가는 것만 생각하면, 이것이 개, 돼지와 다를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미야자키 하야오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식욕을 주체하지 못하고 끝내 돼지로 변해버린 모습, 지금 우리와 크게 다를 것이 있습니까?

지금 우리 공직자들은 그 중에서도 가장 크게 살찐 돼지들은 아닙니까? 그리고 우리 자식들에게 저렇게 살찐 돼지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리하여, 대한민국은 인간들의 세계가 아니라 거대한 돼지 우리가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개와 돼지는 민주주의를 할 수 없습니다. 도덕과, 윤리, 더불어 사는 삶, 그런 것들이 일고의 가치도 없는 곳에서 민주주의는 작동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민주주의를 바라고, 정상적인 정치를 기대한다면, 개, 돼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염치를 잃은 사람들을 공직자와 지도자를 뽑아서는 더 더욱 안 됩니다. 가면이 벗겨진 후 부끄러움을 느끼는 철면피가, 염치를 아예 상실한 사람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이 글은 <오늘의 동양사상> 제 22호에 실린, 장현근의 "염치의 몰락과 자본의 제국"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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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관후

16대, 17대 국회에서 보좌진으로 일하고, 영국 런던대학교(UCL)에서 '정치적 대표'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와 경남연구원에서 일하고, 행정안전부 장관정책보좌관, 국무총리 메시지비서관을 지냈다. 정치의 이론과 현실에 모두 관심이 있다. 건국대 상허교양대학 교수로 있으며, <프레시안>을 비롯해 <경향신문>, <한겨레>, <피렌체의 식탁>에 칼럼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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