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박만 많아진다면 그런 승리 반댈세"
총선을 앞두고 진기한 광경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여당은 여당과 싸우고 야당은 야당과 싸웁니다.
싸움의 모양새도 점입가경입니다. 여당에서는 유신 시대에도 못 들어본 '진박' 경쟁이 벌어지더니 욕설 녹취록까지 나왔습니다. 야당에서는 분당, 탈당에 이어 통합을 명분으로 싸웁니다. 언론들은 신이 났을지 모르지만 국민들은 진절머리가 납니다.
손익계산서는 분명합니다. 유권자들이 정치에 대해 혐오감이 늘어날수록 여당은 유리합니다. 핵심 지지층이 반드시 투표장에 나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야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야당이 지는 싸움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여당에서 공천을 둘러 싼 혈투가 벌어지는 이유는 총선에서 승리한들 청와대가 반가울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에게 중요한 것은 새누리당 의원들이 많이 당선되는 것이 아닙니다. 합리적 보수 같은 '가짜'를 걷어내고 맹목적인 충성을 해 줄 '진박'들이 한 사람이라도 더 당선되는 것입니다.
작년 한 해, 대통령은 등에 칼을 맞았다고 느꼈습니다. 야당이 지리멸렬해 있는데 느닷없이 아군이 칼을 들이 민 것이지요. 유승민 같은 의원이 늘어나서 청와대에 좋을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여당 의석수가 늘어도 비박계가 지금보다 더 많이 당선된다면 차라리 늘지 않는 것이 낫습니다.
결국 한 쪽에서는 그 세력을 완전히 잠재우려 하고, 반대 편에서는 어떻게든 버티려고 합니다. 이것이 여당에서 벌어지고 있는 싸움의 본질입니다. 윤상현 의원의 취중진담처럼 죽이지 않으면 죽는 싸움이지요.
원래 이런 싸움은 선거가 끝난 후 대선을 앞두고 벌어져야 정상적입니다. 개국 후의 왕자의 난, 반정 후 공신들 간의 혈투란 그 때 벌어지는 것이지요. 그런데 아직 전투가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내부 다툼이 극렬한 것은, 여당이 과반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당은 이해가 갑니다. 그런데 도대체 야당들은 왜 이러는 것일까요? 야권 통합 논의나 공천하는 내용을 보면 야당은 집안 싸움이 난 여당의 위기를 통해 상황의 반전을 도모하기 보다는, 아예 폭삭 주저앉자고 작정한 사람들 같습니다.
김종인이 정말 잘하고 있나?
김종인 대표의 리더십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독재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비상 대권'이 필요하다는 시각도 많습니다. 최선은 아니지만 차선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최선은 불가능했을까요? 정말 김종인이 뛰어난 리더십으로 당의 규율을 바로잡은 것일까요? 그리고 김종인의 목표는 무엇일까요?
우선 필리버스터 정국에서 김종인 대표의 선택지를 검토해 보겠습니다. 김 대표는 한밤 중 비상회의를 통해 필리버스터를 사실상 중단시켰습니다. 두 차례 의총을 거쳤기는 했지만, 사전에 중단 결정이 언론에 보도되어서 이미 김이 빠졌습니다. 김 대표는 '총선을 지면 책임질 것이냐?'고 윽박질렀습니다. 최선이었습니까?
김 대표는 필리버스터에 모아진 국민들의 관심과 지지를 이어가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필리버스터에 참여한 의원들에게는 원기회복제라도 돌렸지만, 필리버스터를 응원했던 시민들과 지지자들에게는 성의있는 해명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 점에서 김종인 대표의 선택은 정치공학적으로는 성공적일지 모르지만 시민참여형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철저하게 공급자 중심의 엘리트 정치의 단면을 보여주었습니다. 무엇보다 모처럼 시민들과 함께 숨쉬고 있다는 느낌을 주었던 야당이 다시 폐쇄적인 모습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좀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김 대표는 '정치적 행위자로서의 국민'을 철저하게 무시했습니다. 필리버스터를 응원하는 시민들을 마치 소풍나온 중학생들 취급하면서 이제 다 끝났으니 조용히 집에 가서 잠이나 자라고 훈시하는 고집 센 교장 선생의 모습이었습니다. 시민들은 축제의 여운도 채 가시지 않은 채 쫒겨 났습니다. 마음에 남은 것은 또 한 번의 배신감입니다.
질서 있는 퇴장은 엘리트주의자들의 시선입니다. 퇴장이야 어쩔 수 없는 것이었지만, 그 퇴장에서 살아있어야 했던 것은 질서가 아니라 감동이었습니다. 이 점에서 김종인 대표는 훌륭한 정책가인지는 모르지만 훌륭한 정치인은 아니었습니다. 특히 민주주의에서는 그렇습니다.
김종인이라서 가능했나?
다음으로 따져 볼 것은 김 대표의 리더십입니다. 김 대표를 개인적으로 좋아하건 싫어하건 이 부분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후한 평가를 하는 듯 합니다. 야당의 가장 큰 문제가 규율과 기강이었는데 그것을 바로 잡은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사실만 놓고 본다면 맞습니다. 적어도 당 안에서 공개적으로 지도부에 대항하는 볼썽사나운 모습은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김종인 대표가 지금이 아니라 6개월 전에 당 대표를 맡았다면 지금과 같은 상황이 가능했을까요?
김 대표가 지금 당을 장악하고 있는 이유는 단 하나, 총선을 코 앞에 두고 그가 공천권을 쥐고 있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지금은 김종인 대표가 아니라 누구든 그와 같은 권한만 쥐고 있다면 당을 조용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새누리당을 보면 분명합니다. 두 달 전만 해도 누가 이한구를 대단하게 보았든가요? 요즘은 김무성 대표도 일단 그 앞에서 머리를 조아려야 합니다. 윤상현에게 죽인다는 막말을 들어도 제대로 화도 낼 수 없습니다. 칼자루가 저쪽에 가 있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 보면 김종인 대표는 공천권을 손에 쥐고 적잖이 무책임한 행보를 해 왔습니다. 현역 컷오프 과정에서는 시스템 공천이라 어쩔 수 없다는 변명을 늘어놓으면서 대구에 출마한 홍의락 의원을 내쳤습니다. 문제가 있다고 말은 했지만 2주가 지나도록 별다른 대책을 내놓지는 않았습니다. 이미 시기를 놓쳐서 이제는 컷오프를 취소한들 홍 의원과 대구가 받아들일 것 같지 않습니다.
최근 이루어진 전략 공천에도 상당한 문제가 있습니다. 김현종을 영입할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그 전에 한미 FTA에 대해 당의 입장이라도 내놓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김종훈을 영입한 새누리당과 무슨 차별성이 있는 당인지 설명이 안 됩니다.
인천에 공천한 윤종기는 강정마을 뿐만 아니라 그 이전부터 '진압 전문' 경찰로 불렸던 인물입니다. 인천경찰청장을 지내는 동안에는 국가정보원 대선 개입 의혹 사건으로 재판을 받았던 김용판과, 용산 참사의 책임자였던 김석기를 직장교육 강사로 초빙했습니다. 윤종기가 '전략 공천'을 할만큼 당의 정체성에 맞는 훌륭한 경찰인지 저는 알지 못하겠습니다. 더민주라면 진압보다는 인권에 전문성을 가진 사람을 영입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수도권에서 12년이나 고생한 지역위원장을 버리고 표창원을 전략공천 한 것도 이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해당지역구는 분구가 되면서 더민주 후보들에게 유리해 진 곳입니다. 표창원이 당에 반드시 필요하다면 비례대표 공천을 주면 될 일이고, 경쟁력이 더 있다면 수도권의 험지에 출마시켜도 됩니다. 굳이 누군가를 희생시켜 가면서까지 지역구를 보장해 줄 일은 아닙니다.
무엇보다, 선거를 코 앞에 두고 영입한 인물들에게 비례대표도 아닌 수도권 지역구를 챙겨준다면, 이 당에서는 이제부터 누가 사서 고생하려고 할지 모르겠습니다. 김 대표는 이제 한 달 뒤에 당을 떠나면 그만일지 모르지만, 이 당은 이번 총선만 치르고 없어질 당은 아닙니다.
이기고 싶다면, 신사처럼 행동하십시오
마지막으로 김종인 대표의 목표에 대해 검토해봅시다. 김 대표는 지금 정도의 의석을 유지하는 것이 목표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이것은 수도권에서 야권의 통합이나 연대가 이루어졌을 때 가능합니다. 그런데 지금 김 대표의 행보는 거기에 도움이 되고 있습니까?
필리버스터 정국을 끝내면서 김종인 대표는 야권 통합 카드를 던졌습니다. 그런데 그 시점이나, 형식, 내용이 실제로 통합을 원하는 사람의 자세라고 보기 어려웠습니다. 김 대표는 야권통합 제안 전부터 지금까지 일관되게 안철수 대표를 무시하는 언행을 일삼았고, 통합 제안도 협박조였습니다.
이런 태도는 국민의당에서 지도부 분열을 야기하기도 했습니다. 국민의당을 좋아하지 않는 더민주 지지자들에게는 '신의 한수'라는 평을 듣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당장은 호쾌해 보일지 모르는 이런 행보가 실제로 야권의 총선에 도움이 될까요?
야당의 분열 자체를 악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야당들이 인물과 정책, 실력으로 경쟁하다가 구도 때문에 단일 여당후보에게 지게 된다면 자연스럽게 후보단일화를 할 수 있습니다.
더민주와 국민의당은 야권에서 경쟁하는 것이지 서로를 죽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민주 지지자만으로는 이길 수 없습니다. 협박으로 국민의당을 와해시킨다면 그 지지자들은 결코 더민주로 오지 않을 것입니다.
이 점에서 국민의당 김경진 변호사야 말로 훌륭하고 용기있는 말을 했습니다. 김변호사는 야권 통합에 대한 당지도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더민주가 우리의 주적입니까?"라고 맞받아쳤습니다.
이 말은 김종인 대표에게 고스란히 돌아갈 수 있습니다. "국민의당이 주적입니까?" 안철수 대표의 "광야에서 죽겠다"는 말은 실은 김종인 대표가 끌어낸 말이나 다름없습니다.
김종인 대표는 어제도 안철수 대표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의가 없다. 정치를 잘 못 배웠다."
글쎄요. 제가 보기에는 김종인 대표의 정치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탈당하고 창당한 지 한 달이 안 된 당에 대해 통합을 제안하면서 악담을 퍼붓는 것은, 잘 배운 예의가 있는 정치인가요?
마찬가지입니다. 국민의당도 폭주를 멈춰야합니다. 친노패권후보 5명이라니요. 더민주가 주적입니까? 김종인의 얕은 수에 놀아나는 것을 멈추고 책임있게 행동하십시오. 막말을 멈추고 건전한 경쟁을 제안하는 쪽의 지지율이 먼저 올라갈 것입니다.
아직도 한 달이 남았습니다
다시 생각해봅니다. 필리버스터가 마무리 되는 국면에서 국민의 감동을 이끌어 내고 경제민주화 이슈로 넘어가는 것이 불가능했을까요? 마지막 필리버스터에서 국민의당에 존중을 담은 야권연대를 제안하면서 국민들에게 야권 지지를 호소하는 것이 불가능했을까요?
아직도 한 달이 남았습니다. 호남과 비례대표에서 최선을 다해 싸우십시오. 싸움의 수단은 비난과 무시가 아니라 인물과 정책이어야 합니다. 새누리당을 이길 수 없는 수도권 지역에서는 3월말을 기한으로 각자 열심히 경쟁한 뒤 후보자간 자율적 단일화를 천명하십시오.
한 달이면 보통 한 번의 기회는 있게 마련입니다. 김종인이든 안철수든 먼저 신사답게 행동하고 멀리 내다보는 사람이 총선 이후의 주도권을 갖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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