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방규와 김창근, 병사(病舍)에서 만나다
대부분의 사상범이 그렇듯 정치적 상황에 따라 좌익수들의 생활은 조금씩 차이를 보인다. 주요 정치적 사건이 터질 때마다 이들에 대한 탄압은 더욱 살기를 띠었고, 사상 전향 공작은 한층 간교해졌다.
장면 정부와 박정희 군사 정권에서 행해진 사상범에 대한 처우와 공안 탄압이 대표적인 예다.
이승만 독재 정권을 무너뜨린 1960년 4.19 혁명은 이들에게 또 다른 기회를 가져다줬다. 민주 정권인 장면 정부가 들어서면서 사상범에 대한 처우 문제가 논의되기 시작했고, 그 결과 군법 회부자는 20년, 민사는 15년으로 일괄적으로 형이 줄었다.
당초 군사 재판에서 사형을 언도받은 임방규도 이때 20년으로 최종 감형됐다.
교도소 내 처우도 전보다는 나아졌다. 대전교도소 특별사동에는 병사(病舍)가 마련돼 중환자들이 다소나마 치료받을 수 있도록 도왔다. 숱한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임방규는 당시 심각한 복막염을 앓고 있었다. 복통과 혈압, 구토까지 동반한 중증이었다.
병사에는 고문 후유증으로 사경을 헤매는 이가 적지 않았다. 어떤 이는 폐가 좋지 않은지 계속해서 각혈을 토해냈다. 더욱이 피부병까지 겹쳐 온몸에서 피가 나고, 진물이 도저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당시 결핵을 앓고 매일같이 피를 쏟았다. 또 독방에 있을 때부터 피부병이 심해서 옷을 걸치지 못할 정도였다. 겨우 담요 하나만 덥고 살았다. 발진에 피고름까지, 온몸이 정말 흉측했다." (김창근 씨 증언)
한 사람은 복통, 또 다른 한 사람은 연신 각혈을 쏟아냈다. 한국전쟁 발발 뒤 회문산 일대에서 기포병단 정치부중대장을 지낸 임방규와 덕유산을 거쳐 지리산 인근에서 남부근으로 파견돼 활동한 김창근이 첫 대면한 모습이다. 1960년 대전교도소 특별사동 병사에서 두 사람은 그렇게 마주했다.
"나는 고문으로 심각한 복막염을 앓았고, (김)창근 선생은 폐가 안 좋아서 계속해서 피를 토했다. 나도 그랬지만 창근 선생 역시 왜소한데다 병까지 얻어 매우 초췌한 모습이었다. 우리는 중환자로 분류돼 4개월간 함께 병사에 있었는데, 이런 저런 얘기를 많이 나눴다. 창근 선생이 일찍 장가가서 부인이 옥바라지 했던 것이 특히 인상에 남는다. 가끔 면회도 오고, 편지 왕래도 있었다. 그런 부인을 칭찬했던 기억도 난다. 그때를 떠올려보면 창근 선생은 말수가 참 적고, 조용했던 분이다. 학습도 열심히 했는데, 어쨌든 사상적 측면을 떠나 매우 성실했던 분으로 기억된다." (임방규 씨가 증언한 김창근 씨에 대한 기억)
1947년 이른 나이에 결혼한 김창근은 남편이 입산한 뒤 친정(전남 담양)으로 간 부인으로부터 이따금씩 편지를 받곤 했다. 그러면 수감자들이 둘러앉아 서신을 함께 보며 교도소 밖을 떠올렸다. 가족과 친구들, 고향의 모습, 전쟁 전 행복했던 시절….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던 이들이 유일하게 감상에 젖을 수 있는 시간이다. 그러나 편지를 덥고 나면 하루 한시 한초의 긴장과 공포가 이들을 또 다시 옥죈다. 누군가의 아들이자, 아버지였을 이들은 그렇게 짓이겨졌고, 또한 파괴됐다.
3개 방으로 구성된 병사에는 20여 명(각 방당 대여섯 명)의 수감자들이 하얀 환자복을 입은 채 치료를 받았다. 하지만 신통할 리 만무했다. 고작 약 한 알씩 받아먹는 게 전부였다. 그나마 구타가 준 것이 몸을 회복하는데 큰 도움을 줬다.
임방규와 김창근은 5명의 수감자들과 함께 한방에서 생활했다. 빨치산은 첫 대면 시 사회에서 어떤 활동을 했는지 자신의 이력을 가장 먼저 털어놓는다. 이른바 요해(了解)사업이다. 시쳇말로 통성명을 하는 것이다. 5명의 '감방 동기'도 체포되기 전 생활을 돌아가면서 늘어놓았다.
"고향은 순창 쌍치입니다. 종형님의 영향으로 좌익 활동을 하게 됐고, 전쟁 뒤에는 전북 야영훈련소 지도원을 지냈습니다. 9·28수복 직후 1개 대대를 꾸려 입산하면서 회문산에 들어갔고요…. 이후 부대가 재편되면서 덕유산으로 이동했는데, 이곳에서 남부군에 편입돼 다시 지리산으로 갔습니다. '지리산 공습' 때 덕유산에서 체포됐으며, 남광수용소, 광주교도소를 거쳐 이곳에 왔습니다. 형은 10년을 받았고요."
임방규는 쌍치 출신인 김창근이 몹시도 반가웠다. 나이도 엇비슷해 고향친구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회문산에서 함께 활동했음에도 소속 부대가 달라 서로를 알지 못했던 두 사람은 그렇게 병사에서 만나 한참동안 얘기를 나누며 가까워졌다.
김창근의 석방, 그리고 남겨진 자의 고통
1962년 김창근이 석방됐다. 10년의 세월, 하지만 그 세월이 남은 평생을 따라다니며 김창근을 괴롭혔다. 몸은 골병이 들었고, 삶은 피폐해졌다. 가족도 뿔뿔이 흩어졌다. 세상에 다시 나왔지만 그는 여전히 외롭고 쓸쓸했다.
육중한 철문을 열어젖히면 일순 정지된 시간과 낯선 조우를 하게 된다. 뭘 해야 할지, 어디로 가야할지 가늠이 안 선다. 체화된 속박, 이로 인해 잃어버린 자기정체성. 그는 자유의 몸이 됐지만, 남들처럼 온전한 자유를 누릴 수 없었다. 더욱이 출소 후 30년간 누군가의 감시를 받으며 생활했다. 그는 늘 '보이지 않는 족쇄'의 속박 속에 살아야만 했다.
김창근이 떠난 특별사동에 일대 변화가 찾아왔다. 1968년 1월21일 남파 간첩 사건인 이른바 '김신조 사건'이 터지면서 박정희 군사 정권은 본격적인 공안 분위기를 형성했다. 또한 좌익수들의 폭동을 우려해 대전에 있던 비전향자들을 전국 5개 교도소로 분산시켰다.
대전, 대구, 전주, 광주, 목포교도소. 이 중 목포는 바다를 통해 도망갈 수 있다하여 또 다시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결국 4개 교도소에 비전향자들이 분산 수감됐다. 임방규를 포함해 특별사동에 있던 80여 명도 전주교도소로 옮겨갔다.
1972년 10월 박정희 군사 정권이 유신헌법을 제정, 영구집권의 발톱을 드러내면서 정치 사상범들은 공안탄압의 최대 희생양이 됐고, 비전향자 역시 엄청난 고통 속에 지내야만 했다.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탄압이 이뤄졌다.
한국전 종전 전후 체포돼 무기징역을 살던 좌익수들은 4·19혁명 이후 20년으로 감형되면서 대부분 출소를 앞두고 있었다. 그리고 군사 독재 정권의 전향공작은 1970년대 초중반 이들의 출소를 앞두고 본격화됐다. 특히, '떡봉이'라고 해서 전향 공작 담당 반원(班員)이 꾸려지기도 했다. 떡봉이는 '사람을 떡매질 하듯 팼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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