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일 비가 내렸다. 3월말 거친 비바람은 제법 쌀쌀했고, 낮인데도 날은 어둑했다. 잔뜩 낀 먹구름 사이로 연초록 새악시가 옥토를 뚫고 방실댔지만, 가라앉은 마음은 한없이 무겁기만 했다.
정유년(丁酉年) 지아비를 잃은 '팔열부(八烈婦)'가 안쓰럽게 남산뫼를 가리켰다. 지변 마을 건너 외롭게 떠있는 남산뫼는 핏빛 같은 속살을 드러낸 채 을씨년스럽게 마을을 내려 봤다. 200여 명의 원혼이 뒤섞여 응어리 된 구릉은 60년 넘는 세월동안 삼도천(三途川)이 돼 그 자리를 지켜선 채 말이 없었다.
1950년 12월 7일(음력 10월 27일) 아침, 전남 함평군 월야면 월악리(지변·내동·성주 마을)와 월야리(동산·괴정·송계·순촌 마을) 앞 남산뫼에 까마귀떼 같은 한 무리의 군인들이 중대장 지시에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작전준비를 끝낸 이들은 그 자리에 매복한 채 중대장의 수신호를 기다렸다.
같은 시각, 월악리와 월야리 주민은 뭔가에 홀린 듯 이른 새벽부터 잠이 깼다. 전날 군인들이 인근 정산리(장교·동촌 마을)에서 70여 명의 주민을 학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기분이 뒤숭숭한 탓에 잠을 설쳤다. 몇몇 젊은이들은 험한 꼴을 피하고자 서둘러 동네를 벗어나 몸을 숨기기도 했다.
정산뿐 아니라 계림리에서도 60여 명의 무고한 이들이 무자비한 총검에 죽임을 당한 터라 이곳만은 군인들 발길이 미치지 않길 바라며 어른들은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하지만 이러한 걱정은 금세 현실이 됐다.
토끼몰이식 작전과 남산뫼 대학살
작전은 토끼몰이식으로 이뤄졌다. 동이 터오자 어슴푸레 비췄던 마을이 한 눈에 들어왔고, 7개 마을을 둘러싼 군인들은 집집마다 뒤지며 사람들을 끌어냈다. 빨치산이 전날 파손한 도로를 복구해야 한다며 안심시키는가 하면, 나오지 않다가 발각되면 그 자리에서 총살시키겠다고 위협하기도 했다.
아침을 먹고 막 상을 치우던 정진억(지변마을·당시 11세) 씨 집에 군인이 들어온 건 오전 9시경. M1 소총을 든 군인은 험한 표정을 내보이며 정 씨 가족을 다짜고짜 잡아챘다. 어안이 벙벙했던 정 씨는 우물쭈물했고, 군인은 "이 새끼 빨리 안 나가"라며 정 씨의 어깨를 총대로 내리찍었다. 중심을 잃은 정 씨가 토방에 나가떨어지자 둘째 형 진상(당시 15세) 씨가 울먹이듯 달려와 동생을 일으켜 세웠다. 집안에는 아버지 정정모 씨와 둘째 형 그리고 정 씨가 있었다.
군인이 들이닥치기 전 정 씨의 큰 형 진덕(당시 19세) 씨는 청년 몇 명과 함께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연당 방죽 수문으로 향했다. 정산과 계림 다음은 월악리라 판단하고 미리 몸을 피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일행 중 한 명이 "마을에 별일 없는 것 같으니 그냥 집으로 가자"고 했고, 함께 있던 이들이 동조하면서 발걸음을 되돌렸다. 결국 운명(運命)은 이들 편이 아니었던 게다.
마을에 들어선 지 한시진이 지났을까. 동네 입구 구렁길에서 군인들이 까맣게 몰려왔다. 이를 보고 황급히 피하려 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후방에 매복한 군인에게 발각되면서 이들은 그대로 포박됐다.
그 시각 큰형을 제외한 정 씨 가족은 마을 어귀에 있는 팔열부정각으로 이동했다. 정각 주변에는 이미 수백 명의 주민이 한데 모여 있었다. 정확한 숫자를 가늠하기는 어렵지만 당시 현장에 있던 몇몇 증언자에 따르면 대략 800여 명 이상 모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들은 팔열각 옆 논에 집결한 뒤 다시 남산뫼로 자리를 옮겼다. 군인들은 남산뫼에 오른 주민을 연령별로 분류한 뒤 또 다시 남산뫼 뒤편 완만한 곳으로 끌고 갔다. 겁에 질린 주민들 등 뒤로 빨치산 주둔지인 불갑산이 희미하게 들어왔다.
세 번에 걸친 확인사살
매서운 눈빛의 중대장이 험상궂은 표정을 한 채 소리쳤다.
"군경 가족 또는 국방경비대 가족들은 나오라."
목소리는 차갑고 단호했다. 몇 초간 침묵이 흐른 뒤 한 청년이 증명을 내보이며 대열 앞에 섰다. 그는 "호국군 소위로 복무 중이다가 미처 후퇴하지 못하고 처가에 숨어 있었다"고 신분을 밝혔다.
중대장은 아무런 감흥 없이 청년을 쏘아보더니 "뒤로 돌아"라고 명령했다. 그런 뒤 허리춤에 차고 있던 권총을 빼 그대로 방아쇠를 당겼다. 이어 두발을 더 명중시켰다. 컥컥거리며 피를 토한 청년은 "대한민국 만세"를 외쳤고, 그대로 엎어져 축 늘어졌다. 당시 죽은 청년은 월악리 인근 계림리 시목 마을에 사는 22살의 정병오 씨다.
냉혈한 같은 중대장은 큰 소리로 "이놈은 진짜 나쁜 놈이다. 우리가 마을에 들어 온 지 언젠데, 여태 나오지 않다가 이제야 나오느냐"고 성을 냈다. 화가 가라앉지 않은 듯 "사상이 의심스러운 괘씸한 놈"이라며 더더욱 핏대를 세웠다. 험한 분위기는 얼음장처럼 차갑게 바뀌었고, 설마 했던 주민들은 그제야 '아! 큰일 났구나'하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군인들은 45세 이상 어른과 10세 미만 아이들에게 간단한 가재 도구를 챙겨 면소재지로 가라고 돌려보냈다. 또 10~15세(17세라는 증언도 있음) 아이들에게는 성냥을 쥐어주며 집에 불을 지르라고 지시했다.
마지막으로 15세(또는 17세) 이상 45세 미만의 사람만 남았다. 몇몇 노인은 자녀와 떨어질 수 없어 무리에 남기도 했다. 중대장은 이들을 향해 "지금부터 명당자리를 잡아주겠다"고 한 뒤 그 아래 움푹 파인 곳으로 이동했다.
비탈진 곳에 들어서니 덩그러니 놓인 무덤 위로 세 자루의 기관총이 설치됐다. 총구는 며칠 전 풍악소리가 요란했던 월악산(월야면 외치리) 쪽을 내려 봤다. 그 밑으로 사람들을 몰아넣은 뒤 "엎드려"라는 소리와 함께 일제히 총격이 가해졌다. 사람들은 흉측한 몰골로 쓰러졌고, 일부는 시체 속에 파묻혀 숨어들었다. 비명과 울음소리로 남산뫼는 순간 아비규환이 됐다.
한차례 사격이 끝난 뒤 중대장이 나섰다.
"산 사람은 하늘이 돌봤으니 살려주겠다. 일어나라."
그 말을 듣고 50여 명이 눈치를 보며 일어섰다. 현장에서 목숨을 부지한 양채문(당시 19세·현재 작고) 씨도 '정말 하늘이 돕는구나' 생각하며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곧이어 2차 총격이 가해졌다. 천우신조로 살아난 이들은 결국 허무하게 죽어갔다.
"이번엔 진짜 살려주겠다. 산 사람은 일어나라."
중대장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허나 아무도 믿지 않았다. 그러자 "정말 살려주겠다. 진짜다"라고 재차 약속했다. 그 말에 10여 명이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발목에 총상을 입은 양 씨는 죽은 척 꼼짝 않고 누워있었다. 옆 사람에 집중된 조준 사격 탓에 온통 피범벅이 됐지만, 군인들 눈을 피할 수 있어 도리어 다행이었다.
중대장은 나머지 생존자들에게 "동네 가서 불을 끄라"고 지시했다. 그런 뒤 마을로 향하는 이들의 뒤통수에 대고 기관총을 갈겨댔다. 결국 몇 발자국 못 떼고 이들 역시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총살이 끝난 뒤에도 군인들은 엎어져 있는 시신을 총대로 휘두르며 꿈틀거리는 이가 있으면 가차 없이 확인 사살했다. 그렇게 200여 명 이상이 싸늘한 주검이 됐다. 한스런 남산뫼 머리 위로 때마침 이슬비가 보슬보슬 내리기 시작했다.
전체댓글 0